박진홍展 / PARKJINHONG / 朴鎭鴻 / painting   2008_1015 ▶︎ 2008_1028

박진홍_self-portrait_캔버스에 유채_116.7×80.3cm_2008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_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신관 2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나의 전경과 후경, 트라우마의 베일을 찢고 나를 보다 ●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조건화된 전망 즉 주어진 상황을 선의식이라고 한다. 그것은 존재를 훌쩍 뛰어넘는 까마득한 원형의식이나 원죄의식일 수도 있고, 관례와 관습, 제도와 체계일 수도 있다. 태어난다는 것은 이처럼 자기와는 무관하게 어떤 틀의 자장 속으로 편입된다는 것이며, 의식이 그 틀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무의식처럼 개인적으로 축적된 경험이 이런 선의식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선의식으로 인해 어떤 것을 통해 다른 것을 추정할 수 있으며, 흐릿한 것을 통해 명료한 것을 추정해낼 수 있다. 군중 속에서 지인을 즉각 알아볼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인지도 때문인데,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인지도 역시 선의식의 한 경우랄 수 있다. ● 토르소와 초상 그리고 얼굴에 대한 축적된 시각정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박진홍의그림이처음엔무엇을그린것인지쉽게간파하기힘들다. 물론 이는 그 그림의 단조로운 구도 탓에 얼굴이란 것이 쉽게 인지됨으로 억측일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억측이 작가의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의미를 갖는다. 단조로운 구도와 인지도 탓에 얼굴임을 식별할 수는 있지만, 그 뿐이다. 그러니까 얼굴 그림이라는 사실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나아가 그 얼굴마저도 상식과 통념을 훌쩍 벗어나 있다. ● 말하자면 얼굴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그려진 얼굴을 지운 것인지 온통 불분명하다. 아마도 그리고 지우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중첩시킨 것 같다. 이를 통해 얼굴이 뚜렷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이 해체되고, 결국 그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것 같다. 종래에는 얼굴을 그리겠다는 목적의식과 재현의지는 사라지고, 오로지 그 과정과 궤적만이 남겨진 것 같다. 혹여 얼굴(얼굴이라는 기표)을 통해 비가시적인 다른 무엇을 암시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박진홍의그림에서얼굴은다른어떤경계로진입하기위한구실처럼보인다. ● 작가의 그림에는 하나같이 얼굴 초상이 그려져 있으며, 그 제목은 모두 자화상이다. 이런 사실은 작가의 그림이 끊임없이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회화의 한 전형으로 보이게끔 한다. 그 과정에서 얼굴을 그리고 지우는 반복행위는 결국 자기긍정과 자기부정이 그 반복행위만큼이나 극명하게 교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치열한 과정을 통해 진정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의 근사치에 도달하려는 것은 아닐는지. 진정한 자신? 진정한 자신은 상식적이고 통념적인 얼굴의 표면 위로 드러나는가? 진정한 자신과 얼굴은 서로 같은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작가는 아마도 얼굴을 표상으로 해서만 겨우 암시될 수 있을 뿐인(얼굴이라는 표상이 아니고서는 암시될 수조차 없는), 그러면서도 정작 얼굴이 아닌 그 이면의 불분명하고 불투명한, 비가시적이고 불가지적인 어떤 전망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박진홍_self-portrait_캔버스에 유채_116.7×72.7cm_2008

그렇다면 도대체 얼굴의 이면으로 열린 전망이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는 얼굴과 머리를 구분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얼굴이 사회적 기호인 반면에 오로지 머리만이 진정한 주체(자신)에 속한다고 본 것이다. 이를테면 얼굴은 호의적이거나 적의를 드러내 보이는, 상냥하거나 공격적인, 품격이 있거나 경박해 보이는 등의 온갖 형태로써 사회가 공유하는 기호이며 자산이라는 거다. 대개의 초상화는 이런 사회적 기호로서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표정관리라는 속된 말이 암시하듯 얼굴은 가장하거나 꾸미거나 연출할 수조차 있다. 이처럼 얼굴이 사회와 연동된 것이라면, 머리는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다. 머리는 표상이 부재하는 기표인 탓에 타자에게 낯설고 심지어는 자신에게조차 낯설다. 그러면서도 원초적인 것들이나 억압된 것들, 이를테면 자연성과 본성, 무의식적 욕망, 살해욕구와 폭력욕망, 신성과 악마, 지극한 쾌락과 퇴폐, 터부와 신비, 금지된 것, 애매하고 모호한 것 등 제도권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은 온갖 것들을 아우른다. 또한 그것은 사회가 공유하는 기호(혹은 공인된 기호)가 아닌 만큼 사회로부터의 룰의 적용을 받지 않는 전적으로 자율적인 공간이며 세계이다. 한마디로 머리는 그 세계가 개시되는 어떤 지점이며 장소인 것이다. ● 박진홍의 그림이 겨냥하는 지점 역시 이처럼 얼굴의 배후로 열린 전망이며, 머리로부터 개시되는 세계와 그 세계가 열어 보이는 비전일 것이다. 이때 그 세계나 비전은 심연이나 무의식적 욕망일 수도 있으며, 어둠과 침묵일 수도 있고, 어눌함과 중얼거림과 몽롱함이 뒤섞인 몽상일 수도 있으며, 해면처럼 우울을 머금은 실존적 혹은 존재론적 자의식일 수도 있고, 자폐(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다른 이름인)와 자해(신경증)가 실타래처럼 뒤엉킨 트라우마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얼굴이 해체되고 얼굴의 씨알(얼굴소)인 자국과 흔적과 얼룩과 궤적으로 남은 작가의 그림은 이 중에서도 특히 트라우마를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트라우마는 그 이유를 알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일종의 존재론적 상처이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상처가 일종의 원죄의식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타고난 자의식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죄의식은 기독교의 원죄론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것으로서(자의식은 종교의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유독 강한 자의식을 타고나 그 자의식의 굴레를 족쇄처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이유는 트라우마가 표상이 부재하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그 상처를 문화적 기호나 사회적 기호로서의 스투디움(표상이 있는 기호)과 구별하여 푼크툼(표상이 없는 기호)이라고 일컫는다. 푼크툼의 어원인 점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상처가 언제 어떻게 나에게 뿌리내리고 나의 일부가 되는지 알 수도, 해명할 수도 없는 부지불식간의 상처인 것이다. 너무나 투명하게 그 상처와 대면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에 대해서 불분명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 모순, 이 아니러니, 이 역설로부터 존재의 비의(秘意)가 열린다. 그리고 예술은 이 알 수 없거나 말로써 옮길 수 없는 것들과 관련이 깊다. 이처럼 트라우마를 말로써 옮길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원래 말이 부재하는 차원(정확하게는 마치 말을 감싸고 있는 후광처럼 말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간직돼 있는 차원)인 침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박진홍_self-portrait_캔버스에 유채_45.5×33.3cm_2008
박진홍_self-portrait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08
박진홍_self-portrait_캔버스에 유채_194×130.3cm_2008

자크 라캉은 '나는 나의 말 속에 들어있지 않다. 해서 나는 여기에 없다'라고 말한다. 의식적인 내가 말하는 것을 무의식적인 내가 매번 수정하고 교정하고 번복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해지는 '여기'가 아닌, 말이 부재하는 장소인 '저기' 침묵 속에, 내면적인 눈빛 속에, 파르르 떨리는 눈썹 속에, 앙다문 입술 속에, 거의 드러나지 않게 떨리는 손이나 손사래 속에, 온몸에 돋은 소름 속에, 잘 정비된 공장처럼 순환하는 혈류 속에, 내가 쳐다보는 나무속에, 내가 움켜쥔 흙 속에, 내 손을 빠져나가는 물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박진홍의 그림 역시 고집스러우리만치 일관된 자화상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들 어디에도 작가는 없다. 아마도 작가는 닮은꼴의 신화를 동력으로 하는 재현의 함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닮은꼴은 존재를 한갓 일면이나 표면, 박제나 화석으로 축소시킨다. 닮은꼴이 아니라면 작가는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거나 암시되고 있는가. 그림 속에서 작가는 조각나고 파편화되고 흩어지고 뒤죽박죽된다. 재현의 문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합하고 집산되며, 분절되고 이접되는 움직이는 존재, 비결정적인 존재, 예상할 수 없는 존재로서 현상한다. 그 얼룩과 자국, 흔적과 궤적을 재구성해보면 작가 박진홍을형성시킨존재의결이보이고, 인문학적 지층이 보이고, 감수성의 강도가 감지된다. 주체란 이처럼 재현된 일루전이 지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하고 이질적인 조각들을 대면하는 관객(나)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 고충환

박진홍_self-portrait_캔버스에 유채_116.7×72.7cm_2008
박진홍_self-portrait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08

My Foreground and Background: Tearing Away the Veil of Trauma and Looking at Myself ● I call a view that has been conditioned before one is even aware of it?a given situation?"pre-consciousness". This can be a distant proto-consciousness or a consciousness of original sin that leaps far above existence, and it can be customs and conventions, institutions and systems. Being born means entering the magnetic field of some framework that is unconnected with oneself in this way, and consciousness means accepting the constraints of that framework. At the same time, individually accumulated experiences also form this pre-consciousness, like the unconscious. As a result of this pre-consciousness, we are able to presume other things through it, and deduce the clear through the cloudy. Our ability to recognize an acquaintance immediately within a crowd results simply from degree of recognition, but if you examine it, this degree of recognition as well could be called an instance of pre-consciousness. ● If we do not assume previously accumulated visual information about the torso, portrait and face, it would be difficult at first to discern easily what Park Jin-hong is painting. Of course, this could be a conjecture due to a face being easily recognized as a result of the paintings' repetitive composition. But this conjecture has meaning insofar as it is concerned with the artist's painting. We can distinguish something as being a face due to its unvarying composition and degree of recognition, but that is all. Thus, one can recognize only the fact that it is a painting of a face, and everything beyond that is unclear. Furthermore, even that face has far escaped the bounds of common sense and prevailing ideas. ● In a sense, it is completely unclear whether he has painted a face or whether he has erased a painted face. It seems that he may have repeated and overlapped painting and erasing countless times. Through this process, the face does not become clearer. Far from it?it seems to become dismantled, ultimately leaving only the barest traces. It appears that the hitherto existing goal consciousness and will to reproduction in which one seeks to draw a face has disappeared, and only the process and tracks remain. Perhaps he has tried to allude to something else, something non-visual, through the face (the expressed that is the face)? Perhaps for that reason, the face in the paintings of Jinhong Park appears to be a pretext to penetrate some other frontier. ● Every one of the artist's paintings features the portrait of a face, and they are all titled as self-portraits. This fact makes the artist's paintings appear to represent a pattern of artwork of a self-reflective tendency, returning constantly to the self. In the process, the repeated act of painting and erasing the face ultimately reveals that self-affirmation and self-denial are crossed between as explicitly as that act of repetition. Perhaps he is trying, through this intense process, to reach some approximation of essence that can be called the real self. The real self? Does the real self appear on the surface of a sensible and conventional face? Are the real self and the same similar to one another, or are they different? It may be that the artist is aiming at some view that can only be hinted at narrowly through the representation of the face (that could not even be hinted at without the symbol of the face), yet is not in fact the face, but something unclear, opaque, unseeable and unknowable hidden underneath. ● Then what on earth is the view opened up through what lies under the face? Gilles Deleuze once divided between the face and head. He thus held that while the face is a social symbol, only the head belongs to the real subject (self). In other words, the face is a symbol and property shared by society in various forms, whether showing good will or hostility, gentle or aggressive, dignified or frivolous. In general, portraits depict the face as this kind of social symbol. As implied by the coarse phrase "expression management", the face can even disguise, embellish or perform. If the face is thus something interlocked with society, the head belongs to an entirely different dimension. Because it is something expressed without its external representation, the head appears foreign to others and even to ourselves. At the same time, it combines together all manner of primitive and repressed things unreduced to the language of the institutionalized sphere: nature and the true self, unconscious desires, the urge to kill and the desire for violence, divine nature and demons, extreme pleasure and decadence, taboos and mystery, the forbidden, the vague and the obscure. And as it is not a symbol shared (or authorized) by society, it is a space and world that is totally autonomous, where the rules of society do not apply. In short, the head is the point and place where that world begins. ● The point sought by paintings of Jinhong Park as well would be the view opened up behind the face in such a way, the world beginning from the head and the vision that world opens up. This world or vision might be the abyss or unconscious desires; it might be darkness and silence; it might be a reverie in which stammering and muttering and haziness are mixed together; it might be an existing or existential self-consciousness so aked with melancholy like a sponge; and it might be trauma, twisting together the retreat into the self (another name for the self-reflective tendency) and the harming of the self (neurosis) like a spool of thread. ● Out of these, it is trauma in particular that the artist's paintings powerfully evoke, with the face dismantled and only its seeds (facial elements) remaining?the marks and traces, spots and tracks. Trauma is a kind of existential wound whose reason is unknowable and whose treatment is impossible. It is impossible to know the reason because the wound originates from a kind of consciousness of original sin and is the product of an innate self-consciousness. The original sin here is not related in any way to the Christian doctrine of original sin (self-consciousness is a far cry from religious consciousness); there are only people, born with a strong self-consciousness and walking around wearing the restraints of the self-consciousness like shackles. ● And it is impossible to treat the wound because trauma is a wound that lacks a outer representation. Roland Barthes distinguished this wound from the studium (symbol with an outer representation) as a cultural or social symbol, calling it the punctum (symbol without an outer representation). As with the etymology of the word punctum, this invisible wound is an instantaneously appearing one, such that one cannot know or elucidate when and how it will lay roots in me and become a part of me. The secret meaning of existence is opened up from this contradiction, this irony, this paradox, wherein one can really only express the wound indistinctly even when confronting it all too clearly. And art is deeply connected with these things that cannot be known or expressed in words. It is impossible to transfer trauma into words because it originates from silence, the dimension at which words are absent (precisely a dimension where the original form of language is maintained intact and undamaged, like a halo of light surrounding the language). ● Jacques Lacan said, "I am not contained in my words. So I am not here." It is because the things spoken by my conscious self are continuously revised, corrected, repeated and negated by my unconscious self. It is because I am located with the silence "there", a place where worlds do not exist, rather than the spoken "here"; within the internal countenance; within the quivering eyebrow; within the tightly closed lips; within the barely visible shaking or waving of the hand; within the goose bumps rising up all over my body; within the flow of blood circulating, like a well-serviced factory; within the trees I gaze upon; within the dirt I clutch in my hand; within the water flowing out of my hand. ● The paintings of Jinhong Park as well are self-portraits consistent to the point of stubbornness, yet the artist is nowhere to be found in them. Perhapsheknowsofthetrapofrepresentation, which has as its driving force the myth of resemblance. Resemblance reduces the being to a simple side or surface, a taxidermy piece or a fossil. If not with resemblance, then where and how is the artist present or implied? He is in pieces, fragmented and scattered and jumbled within the painting. At a dimension completely different from that of the grammar of representation, he takes form as a moving presence, an indecisive presence, an unpredictable presence that meets, separates, gathers and scatters, one that ruptures and transfers. If you reconfigure those spots, marks, traces and tracks, you can see the texture of the being that gives form to the artist Jinhong Park. You can see the humanistic strata and detect the power of his sensitivity. Is it not true that the subject is thus not something in dicated by a reproduced illusion, but rather something reconstructed within the consciousness of a viewer (myself) confronting in discriminate and heterogenous fragments? ■ Kho Chung-Hwan

Vol.20081012g | 박진홍展 / PARKJINHONG / 朴鎭鴻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