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ral Outing-꽃으로의 외출

김민규_김인영_김화현展   2008_0923 ▶︎ 2008_1014 / 일,공휴일 휴관

김민규_순수하지만 공의로운 황제 2_캔버스에 아크릴, 금박_162×112cm_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일,공휴일 휴관 금요일_11:00am~07:00pm / 토요일_11:00am~05:00pm

아트포럼 뉴게이트 ARTFORUM NEWGATE 서울 강남구 신사동 643-20번지 프라임빌딩 1층 Tel. +82.2.517.9013 www.forumnewgate.co.kr

오늘날과 같은 체제에서 절대적 권력을 지닌 한사람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적 신념이 이미 인류에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과거 왕이나 황제가 가졌던 권력은 18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시민혁명의 결과로 인해 권력자에게서 대중에게로 이양 되었다. 자유와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쟁취한 대중의 주권은 이제 가장 보편적이고 존중받는 가치의 산물이 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사회에서는 어떠한 인간도 다른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언제든지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고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받는다. ● 이와 같은 현대적 신념은 보편적 관점에서 제도와 법에 의해 실현된다고 본다. 하지만 여기서 실제로 현대의 인간이 충분히 자유로운가? 아니, 과거 왕정이나 제정시대에 비해서 만이라도 좀 더 자유로워 졌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특히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와 법이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다. 비록 법이 일관성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법적용이 항시 공정한가의 문제는 한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확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자유를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자유로 인해 파생되는 '자연 상태(홉스가 지적하였던)'도 해결해야만 하지만 그 수위에 대한 끊임없는 이념적 논쟁과 갈등만 양산할 뿐 뚜렷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근대의 자유주의는 독재자를 이겼지만 대중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해야 하는 현대의 법과 제도가 그 취약성과 한계를 너무도 극명히 드러낸다. 이와 동시에 자유 경쟁체제가 낳은 자본주의적 욕망이 역으로 자유를 현저히 제약하고 있다. 이런 취약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하였고 결국 인문학자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원론적인 회의에 대해 촘스키(Noam Chomsky)는 파워 엘리트들의 독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음모론일 뿐이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자유의 허용과 제약의 문제가 전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 또한 인간이 자유를 얻음으로써 정말 행복해졌는가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제기한 사례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절대적 권력에서부터 벗어난 인간이 과연 그만큼 행복해 졌는가에 대해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자유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불안과 무기력을 괄목할 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를 얻음으로써 함께 경험하게 되는 고립감과 고독에 기인한 바가 큰데, 이 때문에 인간이 누리는 자유가 항상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오히려 자유가 인간의 정서적 보호막을 제거하고 군중 속의 고립을 유발시켜 자아의 공백 상태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언제든지 이러한 자유에서부터 도피하여 복종과 굴종에 향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그것은 현대사에서 있었던 나치즘이나 파시즘에 대한 대중적 추종과 무관하지 않다.

김민규_민주적이지만 정의롭지는 않은 황녀_캔버스에 아크릴, 금박_162×112cm_2008

존 듀이(John Dewey) 또한 에릭 프롬과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인간의 나약하고 변덕스러운 태도를 지적한다. 그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위협이 비단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독제세력에 의해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권위와 규율에 의존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 속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제도와 가치 속에서 신앙으로 군림하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개념이, 사실상 우리 자신의 심리적 본성 속에서 고독과 무기력을 유발하는 인자로 격하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러한 본성은 절대적인 권력자에 대한 대중적 향수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인류는 비록 수세기동안 자유를 위해 투쟁하여 왔지만 인류가 그와 같은 일관성을 계속 유지하여 왔던 것은 아니다. 가장 급진적으로 구체제를 혁파했던 민족이 다시 왕정복고로 회귀하였던 사례를 비롯하여 현대의 전체주의가 대중의 동의를 업고 민주정권을 붕괴시켰던 경우 등을 보더라도 대중은 스스로에게 부여된 자유를 항상 향유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양면적인 반응은 최근의 전형적인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민주적인 의식이 확고하다 할 만한 현대의 대중들은 이익을 제한하는 규제에 적극 반발하다가도 공권력이 실추되었다 싶으면 엄정한 공권력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익상 반대되는 집단들에 대해 강력한 공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대중 심리는 자연스럽게 전체주의나 절대 권력에의 추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 정치적 동향과 더불어 에릭 프롬이 지적한 인간의 '자유에서의 도피' 경향은 '자유'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혼란을 가중시킨다. ● 나의 작품은 자유에 대한 인간의 순수한 신념과 자유의 이면에 발생하는 강제의 필요성 사이에서 과연 이상적인 접점을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관련이 깊다. 절대권자를 상징하는 어진(御眞:동양의 전통적인 왕의 초상)의 형태는 자유를 회피하여 강한 대상에게 의탁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자유에 대해 정의롭고 양심적인 제제를 가하는 이상적인 권위의 상(像)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공의와 양심이라는 거룩한 용포(龍袍)를 입고 폭력과 아집이 아닌 원칙과 진실의 왕홀을 쥔다면 우리가 그 권위를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권위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자유에 대한 미흡한 태도로 인해 자아의 공백을 초래한 현대인이 쉽게 빠질 수 있는 권위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순수한 의지로 쟁취한 자유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기 위한 명분이다. 이 명분은 하나의 물음에 대한 답에서 성립할 것이다. 정의와 원칙이 서 있는 자유를, 또는 민주적인 가치를 수호하는 권위를 어떻게 실현하겠는가가 그 물음이다. 나의 작업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학자나 전문가적인 입장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또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고민하고 추구해야할 문제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 김민규

김인영_A Look-1_캔버스에 애나멜_160×80cm_2007
김인영_A Look-2_캔버스에 애나멜_160×80cm_2007
김인영_A Look-3_캔버스에 애나멜_160×80cm_2007
김인영_A Look-4_캔버스에 애나멜_160×80cm_2007

A Look ● 우리의 뇌가 눈을 통해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형체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세계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를 통해 우리가 본다고 말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둥글게 보는 대부분의 사물들은 둥긂을 문자 그대로 구현하지 않는다. 그 사물들은 단지 둥긂에 근사(近似)하다. 바닥의 물웅덩이나 벽지의 얼룩을 보고 사람의 얼굴, 동물의 모습 등을 찾아내는 것도 비슷한 사고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 의미 없는 추상적 얼룩을 보고도 특징적 형태를 찾아내고 이미 알고 있는 특정 대상과의 유사함을 찾아 유추함으로써 그 이미지를 파악한다. 이 사고 과정을 보면 우리가 눈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를 추상화시켜 저장하는 데 얼마나 능숙한지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구조화시키고 조작하여 저장해두고 시각적인 외부자극을 그 저장된 기억의 틀에 대입시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 작용은 예술작품의 창작과 감상에서도 어김없이 일어난다. ● 나는 현실의 인식과 표현이 추상화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현실의 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재현'한다기보다는 물감과 형태를 조작하여 희망하는 형상을 짜맞춤으로써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나의 작품에서는 페인트의 물성과 흘리는 방법을 이용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고, 페인트가 캔버스의 표면에 흐르면서 나타나는, 우연의 효과가 가미된 얼룩들로 작품을 구성한다. 이것들은 앞서 말한 사고과정을 통해 '형체 이루기(shape-building)'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며, 그림의 포맷이 기존에 익히 알고 있던 산수화의 것임을 알아챌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떤 상(像)을 찾아내려고 하는 그것이 우연적 효과와 강한 색채, 광택의 페인트 얼룩일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 김인영

김화현_고매한 결합_장지에 채색_120×105cm_2008
김화현_胸中萬華_ 장지에 채색_137×55cm_2008

전신(傳身) ● 동양화에서는 인물화에 있어 전신(傳神), 즉 인물의 외양 뿐 아니라 정신까지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림 속의 몸은 정신을 전달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관람자는 몸만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 형형한 눈빛이 인물의 기개를 잘 나타내는지는 논의될 수 있으나, 눈이 큰지 작은지, 나아가 아름다운지 추한지는 문제되지 않는다. ● 이와 비슷한 예는 서양미술에서도, 특히 남성을 재현한 작품에서 흔히 발견된다. 몸은 주인공의 지위·권력·지성·인품 등을 먼저 드러내려고 하며, 몸이 몸으로서만 보이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작품 속 남성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바를 보여줄 뿐 작품 밖 관람자의 요구는 철저히 외면한다. ● 이런 작품들을 대할 때 나는 무력함을 느낀다. 학자의 깊은 지혜가 전해지는 그림도 좋고 영웅의 위풍당당함이 드러나는 그림도 좋지만, 그들의 위대함은 나의 취향에 부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 속 인물에게 있어 그림 밖의 나는 어떤 사람이어도 상관이 없고,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도 상관이 없다. 아예 내가 그 자리에 없어도 상관이 없다. 이러한 시각경험은 나의 욕망과 기대가 무시되는 느낌을 주며, 나의 존재 자체도 마치 없는 듯이 취급되는 느낌을 준다. 정신 또는 인격과 분리되지 않은 남성 신체는 시선의 온전한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관람자를 시선의 온전한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시선을 가하는 자'로서의 내 자리를 다시 찾고 싶었다. 그래서 오로지 나의 시선을 위해 존재하는, 내가 보아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남성 신체의 이미지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보이기 위한 몸'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기 위하여, 나는 이러한 신체가 미술사를 통해 어떻게 표현되어 왔는지를 공부하였다. 필요에 따라서는 원전이 있는 자세를 내 작품에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흉중만화』에서는 신윤복의 「미인도」를, 『군자지교』에서는 카라바지오의 「악사들」을 차용하였다. ● 나의 그림 속 남성 신체는 몸 이외의 다른 것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혹 인물의 정신세계를 암시하는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몸을 더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소도구로서만 사용된다. 몸 자체로서만 드러난 몸은 보는 이의 취향과 욕망에 따라 평가의 대상이 되며, 이 때 시선은 권력으로서 행사된다. 온전히 대상화된 신체를 그림으로 옮기는(傳身) 행위는 나로 하여금 나의 취향과 욕망이 긍정되고 존중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 준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은 무엇인지 찾아 나가고 그것을 가시화함으로써, 시선의 주체로서의 내 위치가 확보되는 시각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 김화현

Vol.20081013c | Floral Outing-꽃으로의 외출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