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portrait

강대영展 / KANGDAEYOUNG / 姜大榮 / mixed media   2008_1015 ▶︎ 2008_1026 / 월요일 휴관

강대영_Leonardo da Vinci, Mona Lisa, 1503~6_2008

초대일시_2008_1015_수요일_05:30pm

관람시간 / 12:00pm~08: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벨벳_GALLERY VELVET 서울 종로구 팔판동 39번지 Tel. +82.2.736.7023 www.velvet.or.kr

강대영, 이름 없는 신화의 著者 ● 비약하건데, 서구문명의 팽창은 원근법에서 비롯됐다. ● 그것은 중세가 인간의 창조성이 말살된 암흑의 시대로 규정되고, 고대야 말로 인간이 회복해야할 문화절정의 시대로 선포되었을 즈음 태동한다. 인간과 사랑을 나누고 질투도 했던 희랍의 신들이 전사회적으로 재조명되며, 부정할 수 없는 절대자였던 중세적 신격이 차츰 붕괴되던 바로 그때인 것이다. 필리포 브르넬레스키, 레온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르네상스적 만능인들에 의해 원근법의 소실점은 점층적으로 심화됐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직선적 무한확장이라는 생래적 장점을 십분 발휘하게 된다. 바로 불경한 갈릴레오에게 감히 천체망원경을 만들게 하는 사상적 원동력을 제공해주며, 하늘 위 이치도 인간의 관심권 안에 가둘 수 있다는 인문학적 사유의 도약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르네상스와 근대 사이의 학자들이 신과의 수직적 거리를 급격히 좁혀갈 즈음, 원근법은 또한 지구의 수평적 거리를 좁히며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다음 세기를 준비해 왔던 것이다.

강대영_Pierre Bonnard, 남과 여,1900_2008
영화 『복수는 나의 것』中 벽 너머의 신음소리를 듣는 장면

허나 서구인들은, 원근법의 재앙과도 같은 폐해에 대해서는 미처 예측하지를 못했다. ● 모든 사물에는 전면과 측면이 있고, 후면과 단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원근법적 사고는 한 가지 방향으로는 끝없이 깊게 보되, 그 총체적인 구조에 대한 이해가 제한되는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수평선 저 편의,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타인을 지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고, 자신들도 그 일부인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왔다. 그들은 어느새 단선적 시야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는 형벌을 받았고, 그들의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기술은 그 속에서 학살과 파괴의 도구일 뿐이었다. ● 서구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신격은 커녕 인격마저 잃어가는 야수 같은 사회를 등지며 방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방향적 사고로 인한 반목에 대해 절망하고 또 고민해야 했다. ● 여기 한 남자와 여자가 있다. 이제 막 격렬한 정사를 나눈 직후인 듯한 두 남녀는, 탈의용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꽤나 허탈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해 알고 싶고, 절실히 다가가고 싶고, 하나가 되고 싶어 몸부림쳤었건만, 인간은 인간에 대해 철저한 타인일 뿐, 그 간극을 도저히 좁힐 수 없다는 절망에 대한 허탈함이며, 개인주의의 상징적 동물인 고양이들의 배치로 그 농도가 한층 배가된다. ● 그리고 여기 또 한 남자와 여자가 있다. 가난한 두 남녀는 지붕 밑 다락방에 세 들어 산다. 남자는 여자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고백할 용기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옆방에서 성희의 절정에 오른 여자의 신음 소리가 울려온다. 질투와 절망에 사로잡힌 남자는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여자를 원망하며 자살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갈머리 없는 남자의 철저한 오해였을 뿐, 여자는 외로움에 지쳐 극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거친 신음소리를 냈던 것이다. ● 소통의 단절에 대한 절망을 '벽'이라는 단어로 상징화 하며, 로맹 가리는 보나르의 탈의용 칸막이를 문학적으로 대체했다. 서로를 살려야할 인간이 서로를 죽게 만드는 벽 하나 간격사이의 미궁... 이렇듯 자기가 아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게 만드는 원근법적 시각의 결말은 참혹했다. 그들 절망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 박찬욱의 생뚱맞은 오마쥬 만큼, 자신들의 실패한 문명에 대한 뒤샹의 저 자학적인 오마쥬 만큼...

강대영_Marcel Duchamp, L.H.O.O.Q(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 1919 Marcel Duchamp, 샘, 1913 Edouard Manet,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다빈치로 시발되고 상징되는 서구문화의 중흥은, 뒤샹의 고해성사와 더불어 종언을 고한다. 모나리자로 신성화되고 성역화된 서구예술의 존엄한 가치가, 그저 '뜨거운 엉덩이를 가진 헤픈 년'이었을 뿐이라고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것이다. '갤러리로 와서 내게 오줌을 싸 주세요'라고 유혹하는 소변기가 음탕한 그녀의 엉덩이 자체이며, 이 뭣 같은 시대에서는 예술의 창작과 감상이라는 고상한 행위 일체가, 수치심도 모르고 길바닥에서 헐떡대며 오입하는 발정난 개처럼 극단적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일찍이, 마네의 시대에 이미 암시된 바 있을 정도로 유구한 내력을 갖췄다. ● 마네는 우아한 '코스츔'으로 성장한 부르주아들의 여흥장면을 포착하며, 근엄한 가식 뒤에 감추어진 그들의 속물근성을 독특한 시각으로 폭로한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중, 여인의 발끝이 지향하는 사내의 사타구니 지점과의 간격을 임의로 약간 좁히기만 해도 이해의 속도는 몹시 빨라진다. 사내의 가랑이 사이에 허옇게 드러난 여인의 종아리가, 대책 없이 과장되게 발기한 사내의 성기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며, 그 거대 성기와 직면하고 있는 여체와의 대립관계가 바로, '갤러리에서의 윤락행위'라는 'L.H.O.O.Q와 샘'의 변신합체 로봇 같은 기능성과 의미 일치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머지 사내의 손의 위치를 눈여겨보자. 그의 오른손은 나부의 둔부를 슬며시 두르고 있음으로 해서 은밀히 성적 연관성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왼손은 어떤가? 사내의 아랫도리 위에서 폭신폭신하게 부풀어 오른 쿠션 위에 은근슬쩍 놓임으로서, 관자로부터 사내의 감추어진 성적 욕망을 유추하게 하는 은밀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미로에서의 보물찾기 같은 그런 숱한 암호놀음의 마지막은, 조롱 섞인 미소로 관객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나부의 눈빛이다. 그것은 품위 있는 '코스츔'을 걸쳐 입고 고상한 갤러리에 와서, 우아하게 여흥을 즐기는 너희들도 우리랑 똑같은 잡것들이라는, 아니 우리가 바로 너희라는 거울효과 내지는 '자화상적 전언'을 던져준다. 그들이 그린 자화상이 바로 그들을 감상하는 우리 자신인 것이며, 그것은 모더니즘에서 '시'를 얻지 않고 '코스츔'만 얻었다는, 당대 시단에 대한 김수영의 일갈에 대해 잠시 음미할 계기를 제공한다.

강대영_우리가 비워야 할 것, 문화공간 KMG, 대구, 2007

현대미술은 뒤샹에게 '비판정신'이 아닌 '코스츔'을 얻었다. ● 그 여파는 인상파의 시조로 추앙하기엔 뭔가 애매모호한 공화주의자 마네가, 고야와 도미에에게서 '혁명의 정신'을 상속 받은 반면 후일 인상파로 통칭되는 그의 후학들은, 마네의 '기법'만을 확산시키고 정착시킨 것만큼 광범위하게 증폭된다. 그리고 역시 뒤샹의 절박한 자기모멸감 또한 추후 절대적 자본주의 체제의 신화로 추앙되며, 정신은 마모되고 그 외형만 답습하는 데미안 허스트 류의 말기적 예술상업주의의 무한폭주로 이어진다. 그래서 처음 강대영의 포트폴리오를 받아보며, 새하얀 소변기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흡혈하는 모기떼들에서, 예술의 비판의식은 사라지고 금융자본적 이윤 부풀리기만 남은 현대미술의 황폐한 자화상을 떠올렸다. 우리는 각기 연기자, 연출자, 제작자, 배급자, 투자자, 소비자로서, 냄새나고 지저분한 현대미술의 왜곡된 전형에 주뒝이를 처박고, 맹목적으로 열심히 뭔가를 빨아먹으려고 안달들이 났으니까. ● 벨벳에서의 이번 전시에서도 작가는 욕망(흡혈 모기떼)과 자정(소변기 자체)이라는 상호 대립적 메시지를 지속시킨다. 다만 이번에는 벨벳의 1층 전시장에서 식탁을 통한 굶주린 욕망을, 그리고 지하 전시장에서는 변기와 세면대 등의 세정기구를 통한 자정의 호소라는 디스플레이 상의 분리가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욕망과 자정의 상징물이 서로 역전되어 보임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것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저 마네와 뒤샹과 같은 욕망의 폭로가 아닌, 자정의 의지이기 때문일 거다.

강대영_Self-portrait展_2008
강대영_Self-portrait展_2008

아마도 작가는 지하 전시장에 변기와 세면대 작품을 배치함으로서, 한 상 잘 차려진 1층에서의 폭식 이후, 소화와 배설과 세척의 과정을 통해 다시 관자에게 '비움'의 미덕을 강조하고자 한듯 싶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자본의 과잉되고 무절제한 식욕은 이미 소화가 불가한 규모이기에, 항문을 통한 정상적 경로가 아닌 입을 통한 비상식적 재배출이 더욱더 적합하고 절실해 보인다. ● 따라서 지하 전시장에서는 오히려, 뒤샹의 오브제를 연상시키는 변기와 세면대를 열심히 뜯어먹고 있는 현대미술의 욕망이, 그리고 1층 전시장에서는 더불어, 소화가 아닌 토사의 결과물로서의 식탁풍경이 비움의 의미를 확보한다. ● 1층 전시장의 식탁풍경은 사과와 알과 군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과와 알에는 각기 전환과 시작이라는 상징성이 있으며, 또한 그것을 따고 깬다는 행위에는 신의 피조물에서 주체로서의 각성, 응축된 잠재력에서 팽창으로의 전환이라는 의미부여가 뒤따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과와 알을 뜯어먹음이 아니라 새로이 토해내려 하고 있다면, 같은 맥락에서 군중들도 헐리우드 영화 속 거대 모기떼에 포위된 위급한 상황이 아닌, 지난 세기의 오류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염원 또는 예고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식들을 잡아먹은 아버지에게 몰래 구토약을 먹인 뒤, 다시 토해내진 형제들과 힘을 합쳐 크로노스와 싸운 제우스를 연상시킬 만큼 신화적이다. 다시 말해 지하에서 1층으로 역류하는 강대영의 이번 전시 자체가 우리 미술판에 대한 거대한 토악질이며, 그것은 우리 세대에 대한 반성과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의 모뉴먼트로 오래도록 구전될 거다. ■ 문철

Vol.20081013d | 강대영展 / KANGDAEYOUNG / 姜大榮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