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빛을 탐하다

윤명숙展 / YOONMYUNGSOOK / 尹明淑 / photography   2008_1017 ▶︎ 2008_1030

윤명숙_바다, 빛을 탐하다#02_디지털 프린트_95×140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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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1017_금요일_06:00pm

갤러리 브레송 기획초대전

작가 슬라이드쇼_2008_1017_금요일_06:3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갤러리 브레송_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충무로2가 고려빌딩 B1 Tel. +82.2.2269.2613~4 cafe.daum.net/gallerybresson

모든 풍경은 상처이자 꿈의 경험이다 ● 바다 이야기를 하자면 나도 밤을 꼬박 새울 수 있을 것 같다. 생애 최초로 보았던 여수 오동도의 바다로부터 시작하여 동해 감포 바다와 고성 앞바다, 서해 흑산도, 남해 통영, 득량만 앞바다, 그리고 울릉도와 제주도, 마라도, 청산도를 둘러싼 사면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이십대에 나는 툭하면 바다로 향했고 마침내 남지나海와 벵갈만의 바다, 아라비안海에까지 이르렀다. 지중해와 대서양이 남아있긴 해도 나는 수많은 다른 색깔의 바다 위에 다른 형상으로 뜬 달을 올려다보며 삶을 움켜쥐었다 풀어놓았다 하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이십대와 삼십대, 누구에게나 바다는 간절한 나이에 이르면 저절로 향하게 되는 그리움의 고향이자 다시금 찾아가게 되는 생명의 모태 같은 그 무엇인가 보다. ● 그런데 윤명숙 작가의 바다 풍경은 아련한 추억이 아니라 아주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인다. 기억을 거스르고 거슬러 결국 태초의 시간까지 가버린 것처럼, 누구나 바다라는 말에서 느낄 법한 아름답고 슬프고 애잔하고 행복하기도 했을 시간의 흔적이 그 바다엔 없다. 사람의 자취도 없고 뭇 생명의 낌새조차 쉬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광막하다. '바다'가 '아'라는 경탄어로 발음되기도 이전의 어떤 상태, 그러니까 다시 말해 천지가 뭍과 물로 나눠지기도 전의 原始. 윤명숙 작가는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작가는 한여름과 한겨울 바다에 나가 열흘이 지나도 단 한 컷도 셔터를 누르지 못하는 외로움의 날들을 혼자 견디며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다 우주만물이 비롯된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물이 신화적 原水 관념으로 가장 크고 뚜렷하게 구현되어 있는 바다가 꿈틀, 찰라적으로 몸을 비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한 컷, 구름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신의 계시처럼 시나브로 스며 나올 때를 기다려 또 한 컷, 그렇게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나갔던 것일까? 윤명숙 작가의 바다를 대하고 있으려니 나는 우리들 사람의 기억 속에는 이미 남아있지 않은 신화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하였다. 그 바다는 공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 몸속에 선험적으로 획득된, 그러나 여태껏 잊고 살았던 까마득한 태초의 이미지였다.

윤명숙_바다, 빛을 탐하다#01_디지털 프린트_95×140cm_2008

물 혹은 바다에서 천지창조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라의 시조가 된 동명왕과 박혁거세의 탄생도 그렇고 큰물이 지고 난 다음 또 다른 세상이 창조되는 홍수신화도 그렇다. 힌두교 사원에 자주 등장하는 '우유바다 휘젓기' 신화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갠지스 강을 여신 강가라 부르며 물에 최고의 신성을 부여해온 인도인들이 만들어낸 이 창조신화에 의하면, 신들과 아수라들이 서로 싸우며 천 년 동안 우유의 바다를 휘저은 끝에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가 된 암소가 나타나고 술의 여신과 행운의 여신이 나오고 단와따리라는 이름을 가진 의학의 창시자가 不死의 감로수가 든 병을 들고 나타났다고 한다. 신과 아수라들은 서로 감로수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식과 월식이 생겼다 한다. 이 신화에 나오는 주요 신이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비슈누인데, 세상을 창조하고 재생 유지하는 신인 비슈누가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신들이 승리하고 비로소 우주만물이 생성되던 힌두의 바다처럼, 윤명숙 작가의 바다는 생경하면서도 낯익고 혼란스러우면서도 참으로 고요하다. 그리고 그 속에는 늘 빛이 있다.

윤명숙_바다, 빛을 탐하다#03_디지털 프린트_95×140cm_2008
윤명숙_바다, 빛을 탐하다#04_디지털 프린트_95×140cm_2008

여기서 나는 잠깐 산과 바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신들의 거처는 주로 산이다. 그리스 로마신들은 올림푸스산과 헬리콘산에 기거하고 곤륜산에는 중국의 신선들이 살며 수미산에는 사천왕과 제석천이 산다. 이 성스러운 산엔 첩첩산중만큼이나 확실한 신들의 상하체계가 존재한다. 신들은 산에 모여 회의를 하고 세상을 다스린다. 산은 넓고 넓은 대해에 둘러싸여 있거나 수신들이 다스리는 바다를 끼고 있다. 신들의 세계에는 으레 산과 바다가 있는데 그것은 남성적 힘의 상징인 산과 여성적 생명의 상징인 바다, 이 둘이 있어야만 비로소 창조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화 이후에도 산은 여전히 종교적 영역으로 성스럽게 남아있는데 반해, 바다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나는 좀 의아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해마다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는 하지만 바다는 산처럼 성역화 되지 못하고 생활의 근거지이거나 추억의 근거지로 머무는 것이다. 그것은 바다, 물이 가진 유연한 물질성이 바위와 흙으로 이루어진 고정의 물질성보다는 훨씬 사람과 친밀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 물, 혹은 바다의 물질성. 윤명숙 작가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몽상의 철학가 바슐라르가 생각난다. 그도 물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물질의 이미지가 소멸하기 쉬운 공허한 이미지나 표면적인 형식을 넘어 내면과 존재의 근원에 파고 들어가 원초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찾아내려는 상상력을 '물질적 상상력'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우리의 상상력이 불과 공기, 물, 흙 이들 4원소 중 어느 것에 결부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상상력으로 분류된다고 했던가. 바슐라르에게 물은 미완성된 꿈의 공허한 운명이 아닌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근원적 운명이었다. 그는 물을 부드러운 물과 난폭한 물로 나누기도 했는데, 윤명숙 작가의 前作과 新作을 동시에 보면서 바슐라르가 떠오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윤명숙_바다, 빛을 탐하다#06_디지털 프린트_95×140cm_2008
윤명숙_바다, 빛을 탐하다#07_디지털 프린트_95×140cm_2008

카오스 속에서 낮게 내려앉은 짙푸른 바다, 어두운 하늘과 구름, 무거운 빛, 외로운 짐승처럼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미지의 섬들, 그리고 바다 표면 위에 거칠게 돋을새김을 하듯 꽂히는 빗방울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높은 파도가 이는 폭풍우의 바다는 아니건만, 그녀가 찍어낸 전작 바다의 이미지들은 한결같이 산처럼 육중하다. 신들의 바다다. ● 그런데 최근에 찍은 바다는 그랑부르(Grand Bleu)다. 하늘에서 위엄스럽게 비추던 빛은 이미 바다로 내려와 앉았다. 그 빛은 산산이 부서지면서 보석처럼 빛난다. 물결 하나하나가 생선의 비늘처럼 살아나고 그 물결은 다시 매끄러운 비단결처럼 잔잔히 일렁인다. 그런데 그것이 물로 가득한 바다가 아니라 물이 존재하지 않는 달이나 외계의 별 표면을 연상시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전작의 바다가 난폭한 물, 그러니까 물 중에서도 오히려 남성적인 물질성을 띄고 있다면 신작의 바다는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그 변화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바다를 찾아 몇 날 몇 일 혹은 몇 달이나 몇 년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바다는 변하지 않았을 것인데. ● 누군가 가라사대, 모든 풍경은 상처이자 꿈의 경험이다. 그 말이 맞다면 바다가 변하는 이유는 그녀의 안, 또한 당신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최현주

Vol.20081017b | 윤명숙展 / YOONMYUNGSOOK / 尹明淑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