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ING-BODY-NATURE

고명근展 / KOHMYUNGKEUN / photography.sculpture   2008_1017 ▶︎ 2008_1204 / 월요일 휴관

고명근_Stone Body 36_필름, 플라스틱_172×85×61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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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1017_금요일_05:00pm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김종영미술관 KIM CHONG YUNG SCULPTUER MUSEUM 서울 종로구 평창동 453-2번지 Tel. +82.2.3217.6484 www.kimchongyung.com

Image Box: 형상의 시간을 저장하는 몸공간에 시간을 저장하다 사진은 시간을 박제한다. 그것도 가장 신뢰할 만한 상태로 보존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은 타 장르에 비하여 다큐멘트의 기능이 강조된다. 사진은 일반적으로 기억의 박물관이자 인간의 보조기억장치로서 역할을 한다. 고명근의 사진조각은 박제된 이미지의 시간을 물리적 조형 위에 재구성한다. 다르게 말하면, 작가 자신이 설정하고 구축한 조각적 구조 속에서, 사진 위에 정착되었던 이미지의 시간을 현재화한다. 핍진성에 가까운 사진의 사실주의는 시간의 박제가 얼마나 정교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대변한다. 하지만 시간은 공간과 물질에 결합되었던 물리적 현존을 증명할 뿐, 그것의 실체까지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작가가 투영한 시간의 이미지는 실체와는 무관한 순수한 이미지가 된다. 나아가 이 이미지는 조각의 구조 속에서 환각적인 상(illusion)으로 변모하면서, 시각적 차원을 확장한다. 그의 조각은 촉지성이나 체적을 지녔다기보다는 가시적이고 더 나아가 몽환적이다. ● 고명근의 작품들은 OHP 필름 위에 전사된 사진의 이미지를 가진 개별적인 조각 작품으로서 존재한다. 재료의 투명한 재질이 이전 조각의 물리적 속성이라는 폐쇄성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다른 차원의 감각구조를 형성한다. 이것은 회화나 현대의 영상예술이 실험할 법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의 작품에서는 특정한 장르형식에 분류할 만 할 경계가 불분명하다. 작가는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고, 조각과의 교수였다. 하지만 작가는 조각의 입체 구조에 자신의 영역을 한정하지 않고, 사진의 이미지를 작품에 첨가했으며, 점차 이미지 자체가 구조를 이루는 투명한 사진조각에 주력하였다. 작품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 두 장르의 결합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의 작품의 성격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을 단순한 초 장르적 결합이나, 현대미술이론이 즐겨 사용하는 개념인 하이브리드(혼성주의, Hybrid) 따위로 정의한다는 것이 너무나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작품은 조각이라는 몸과 사진의 이미지라는 피부를 지닌 혼합물이다. 하지만 이 두 요소의 결합이 파생시킨 결과에 대해 주목한다면, 단순한 이종결합을 통한 존재와 의미의 합치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낼 수 있을 것 같다. ● 조각을 찍은 사진을 다시 자기의 조각으로 환원하는 (혹은 소환하는) 행위는 매우 흥미로운 인식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원래 사진은 무감각하거나 절대 객관적인 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곳에는 분명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첨가되기 마련인데, 그에게도 그런 의도가 읽혀진다. 그의 사진은 양감이나 입체물의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 피부를 본다. 특히 인체조각을 찍은 사진을 보면, 그의 관심과 포커스가 거기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피부는 몸과 공간이 만나는 정말로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으며, 그곳에서 몸의 이야기를 모두 펼쳐놓는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은 기록적인 의미보다는 대상을 만지는 것과 같은 근접적인 시각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의 시선이 촉각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더욱 시각적이고 그러므로 평면적이고, 무엇보다 사진적이다. 사진의 의미를 너무나 잘 일깨우는, 아니 작가는 사진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아버린 그런 사람 중에 하나다. ● 80년대부터 작가는 이 두 장르를 결합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변화의 추이를 살펴보면, 초기에 물질적인 현존성이 강한 작업을 그리고 점차 비물질적인 환각성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 작품에도 이 두 요소는 적절한 비율로 평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어렵지 않다. 사진이 조각을 위한 부수적인 장식물도 아니고 또한 조각이 사진을 위한 액자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조각의 물질적 현존과 사진의 시각적 현상이 형식적으로 그리고 내용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이루며,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의 이미지가 작가가 설정한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면, 조각의 몸은 축약된 키워드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조형요소는 한 작품 속에서 단순히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긴밀한 의미의 맥락(context)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러한 결합양태는 그의 주제 선별에서도 재확인된다. 작가는 자연(nature), 삶(building) 그리고 인간(body)이라는 세 가지 기초적인 영역을 주제로 취하고 있으며, 각 영역들의 현상학적 본질을 캐내어 그것들의 정합을 보여주려고 한다. 또한 작가는 공간, 기운, 그리고 질량적 상태라는 가장 기초적인 조형원리이자 요소를 주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형상요소는 무엇보다 그의 미학적 취향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다. 태도로 판단할 때, 작가는 미식주의자에 속한다. 하지만 그의 이미지 선택이나, 그것을 가지고 작품으로서 재구성하는 과정이나 의미론적 결과를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것이 거의 진언에 가까움을 느끼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고명근_Building-28_필름, 플라스틱_70×50×50cm_2007
고명근_Building-35_필름, 플라스틱_100×50×50cm_2007

Body ● 인간의 신체는 장구한 조각의 역사에 있어서 90%이상을 차지했던 주 대상이었다. 다른 예술장르와는 달리 조각이 갖는 인체에 대한 관심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작가도 인간의 신체가 지닌 아직까지도 해갈되지 않은 미적 욕구를 추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실재 인간의 몸이 아니라 그 몸을 대상으로 삼아 정련되어진 조각품들이며, 고대에서 근세조각에 이르는 다양하고 미적가치가 뛰어난 작품들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작가는 먼저 사진가로서 이 작품들의 이미지를 찾아내고 기록하였다. 조각된 신체는 인체미의 에센스를 발굴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이미지의 차용은 마치 object trouve처럼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위한 기초재료로서 의의를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얻어진 미적 감동은 실제 조각이 지닌 것보다 한 단계 상승한 효과를 불러온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보는 것이 원 조각의 실체라기보다는 그것의 파편화된 (혹은 단편화된) 이미지이며, 작가의 미감과 감각이 발굴해낸 중요한 원 재료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작품 속에서 재편됨으로서 원본이 지녔던 에센스를 작가 특유의 조형 해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조각 작품을 이용한 조각 작품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만, 엄격하게 보면, 작가는 단지 이미지를 빌려왔을 뿐이며, 또한 그 이미지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원 이미지들을 작가는 자신의 조형의도에 조응하여 재구성하고 있는데, 부분인용이나 중첩 그리고 데칼코마니와 같은 병치는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형상문법이다. 이 매 과정의 선택이 또한 예술상의 중요한 작업원리로 작용하고 있으며, 또한 제유적인 형상논리가 포함되면서 보다 섬세한 조형언어로서 다듬어지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치밀한 형상사유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고명근_Eve-3_필름, 플라스틱_57×30×30cm_2008

Building ● 유구했던 하지만 이제는 폐허에 가까운 건물의 파편들이 모여 새로운 조형물로 재탄생된다는 것이 작가 고명근의 고고학적 작품론이라 하겠다. 이전 작가는 브루클린 거리의 낡은 집들의 창과 문의 이미지를 조합하여 콜로세움을 만든 적이 있다. 낡은 것은 시간의 유물이다. 작가는 이 과거의 시간들을 모아 새로운 건축을 시도한다. 마치 바벨탑과 비슷한 혹은 일종의 오벨리스크를 연상시키는 그의 조각건축은 시간을 초극한 또 다른 기념비가 되고 있으며, 인간의 익명적인 삶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시각적인 역사로 축적된 현상을 건축이라는 거울을 통해 반영하고 있다. 어떤 비평가는 이 작품들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유적지'라고 지칭했지만, 삶의 궁극적인 흔적으로서 형상은 오히려 고고학적 유적지라고 하는 편이 낳을 것 같다. 건축가로서 작가는 역사와 삶의 시간을 남긴 집들의 피부인 벽을 평면에 전사하고, 이것을 완벽한 대칭의 구조로서 배치한다. 대칭은 작가의 작업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형상문법이다. 이 구성은 인위적이긴 하지만, 원래 대상에서 볼 수 없었던 다른 미적 개념을 생성시킨다. 절대적 평형과 더불어 대칭은 신성(神聖)에 이르는 즉 감각적 경계를 초극하는 수단으로서 작품에 사용되며, 시뮬라크르와 함께 현대미학의 또 다른 화두인 숭고미(sublime)를 지향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고명근_Air 6_필름, 플라스틱_60×87×21cm_2008

Nature ● 그의 자연은 숭고한 자연이다. 궁극의 의미를 상징하는 자연은 기, 운동 그리고 에너지 등 비물질적인 것에 의해 생명을 획득한, 아니 그것이 곧 생명인 기호(sign)들로서 나타난다. 고명근은 이러한 자연의 전체를 제유하는 방식으로 가장 원리적인 조형의 틀을 준비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크리스탈이나 정육면체 혹은 매우 간단한 형태의 집의 모양을 갖춤으로서 자연현상이나 자연물을 담아두는 용기처럼 보인다. 이미지와 조각 구조의 만남은 자연이 지닌 유기체적인 혼돈성에 작가가 만든 조형적 질서 속에 재편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러므로 조각의 몸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의미와 상징을 보유한 자율적인 매개체가 된다. ● 그러나 무엇보다 이 형태가 풀, 나무, 물, 하늘 그리고 대기 등 근원적인 것과 조형적 의미론으로 긴밀한 의미소통을 수행함으로서 관객의 관조적 시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자아의 성찰을 요구하는, 마치 종교적 대상물처럼 변화한 모습으로 보여진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작가는 자연을 투명한 조각의 방 속에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공간을 형성시켜 놓고, 전체의 자연의 핵심적인 부분을 성유물(holy relic)처럼 전시한다. 또한 건축적인 형태의 몸을 상정함으로서 자연을 담은 용기가 하나의 성소나 제의적 장소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이러한 모습은 자연의 궁극적 섭리를 신화나 종교의 상징체계로 설명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더 나아가 이러한 체계로서 영원과 무한 그리고 심연과 같은 숭고미의 표본을 제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이라는 소우주 속에서 자연은 조형적 질서를 찾고, 또한 평정과 의미를 획득한다.

고명근_ Air 1_필름, 플라스틱_102×74×74cm_2003
고명근_Soil-1_필름, 플라스틱_49×32×32cm_2003

고명근의 조각은 다른 형태의 Camera Obscura(방)이 된다. 다른 것이 있다면, 고명근의 것은 밝다는 점이다. 그 방의 표면은 바로 작품의 피부가 되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입방체로서 존재한다. 몸을 이루는 물리적 구조는 이미지를 지니기 위한 매체이자 동시에 이미지가 말하는 내용을 요약한 지극히 개념적인 존재이다. 이 형상성은 스스로의 굴곡이나 주름(들뢰즈 식으로 말하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평면을 제공하는 것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하지만 그 평면은 바로 불러온 이미지가 또 다른 활동력을 얻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평면으로 구성된 입체는 빈 공간을 제공하고, 이곳은 이미지로 채워질 순수공간이 된다. 그의 작품은 형상의 피부가 몸을 대신하거나 그것을 가상적으로 채운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기관 없는 신체" (역시 들뢰즈)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고명근은 조각이란 물리적 실체와 사진이란 가상적 이미지가 만나는 지점을 정하고 그것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 빗나가도록 혹은 슬쩍 겹쳐지도록 하면서 약간은 불명료하면서, 즉 촉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환상적 공간감을 형성해 낸다. 이를 위하여 작가는 여러 층으로 압축된 피부(플라스틱) 판을 만들어냈다. 그 판이 중첩되면서 파생되는 약간의 불명료함이나 이미지들의 충돌현상이 빚어내는 몽환성과 현기증을 유발시키는 시각작용은 일상적인 인간의 눈으로 얻기 힘든 미 체험을 가져다주며, 이 속에서 우리는 감각의 허무함과 더불어 이미지의 순간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 작가는 "몸은 우리의 외피이며 우리는 그 안에 기억, 감정, 의지를 담는다. 몸은 인간의 일차적인 한계이며, 결국 인간은 그 한계 안에서 갇혀 소멸한다. 그리고 그 소멸이 있어서 몸은 진정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의 언급은 이미지의 속성인 순간성, 그리고 그것이 지닌 허무주의(Vanitas)와 가상성(simulation)이 작품 속에서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이 두 관념의 영역이 교차되는 그 지점이 작품을 이룬다. 다시 말해 물질적 순간이 작품이며, 이 순간은 공간성의 현존이 시간의 관념과 교차되는 순간이 된다. 그리고 그 곳은 바로 가상이 숭고라는 관념적 차원으로 전이되는 곳이기도 하다. 고명근 작품은 현대미술의 거대한 화두이자 이상인 시뮬라크르와 숭고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 김정락

Vol.20081018f | 고명근展 / KOHMYUNGKEUN / photography.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