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위장-Prepared Camouflage

하용주展 / HAYONGJOO / 河龍宙 / painting   2008_1023 ▶︎ 2008_1116 / 월요일 휴관

하용주_날것의 욕망_한지에 채색_150×150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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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1023_목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2008_1104_화요일_02:00pm

협찬·후원_월간 객석_운생동 건축사무소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정미소_GALLERY JUNGMISO 서울 종로구 동숭동 199-17번지 객석빌딩 2층 Tel. +82.2.743.5378 www.galleryjungmiso.com

우리 모두의 것인 마스크적 기제 : 위장과 노예상태와 변질된 욕망 ● 하용주의 화면에선 직관적으로 위기가 감지된다. 작가의 세계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검정색 가스 마스크(Gas Mask)착용하고 있다. 시야확보를 위해 거대하게 확대된 두 개의 원형 유리창과 호흡기로 연결되는 꿈틀거리는 고무호스로 된 이 도구는 형태적으로도 몹시 불쾌하고 기형적일 뿐 아니라, 화학전, 호흡기적 질식을 노린 테러, 치명적인 대기오염과 같은, 예견되는 잔혹한 군사작전이나 비극적 재앙이 아니라면 결코 발명되지 않았을 어떤 것으로, 공포와 두려움의 메타포로 이미 전형화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마스크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의 『멋진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복용하는 '소마'와 대동소이한 기제다. '소마'는 모든 사람들로 더할 나위없는 행복감을 느끼게 해 사실상의 노예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부작용이 전혀 없는 알약이다. 적어도 그것을 복용하는 동안만큼은 삶은 희망적이고, 사회는 불평을 늘어놓을 건더기조차 없는 이상적인 터전으로 인식된다. 하용주가 직시하는 세계에서는 그 탁월한 효능의 알약 대신 마스크가 노예적 최면상태를 담보한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한, 체계로부터 가해지는 억압과 통제는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자유를 위해 발버둥치지만 않는다면, 안전은 보호받을 것이며, 예기치 못했던 달큰한 위안이 주어질 수도 있다. 언젠가 익명의 거리작가 뱅크시(Banksy)는 「당신은 아름다운 눈을 가졌군요」라는 작품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몰래 걸어놓음으로써 관객들의 도를 넘어서는 순응주의를 풍자적으로 비꼬고자 했다. 당시 이 익명의 악동이 걸작과 오물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관객의 천격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동원했던 방식 역시 금발여인의 초상화에 하용주의 것과 흡사한 검정색 구난용 가스마스크를 착용케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뱅크시는 점잖은 척 미술관을 찾는 관객들이야말로 이 뻔뻔스러운 보호장비를 착용한 당사자들임을 밝히고자 했다. 미술관의 난해한 '작품들(?) 앞에서 심각해 보이는 투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한, 그럼으로써 자신의 당혹스러움을 그럴싸하게 위장하는 한, 자신의 문화적 소양이 의심받는 두려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이 미술관 방문에서 정작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문화시민으로서의 인증인 것이다. 이러한 등속의 위선적인 마스크적 기제가 아니었다면, 현대미술의 작용들, 권위적인 미술관, 돈뭉치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다니는 미술시장, 위선적인 미술비평과 이론 등 많은 것들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문명, 현대미술의 토대가 건재하게 유지되는데 헉슬리의 소마나 뱅크시, 하용주의 위장용 마스크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유다.

하용주_춤추는 모방자_한지에 채색_130×200cm_2008
하용주_준비된 위장-Prepared Camouflage展_2008

하용주의 회화적 서사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거의 모두 가스 마스크에 의해 생존을 연장하고 있다. 일종의 탯줄에 해당되는 유연하게 꿈틀대는 호스가 아니라면, 그들의 호흡은 일순간 중단될 수밖에 없다. 절망의 신호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 「거대한 위장」에서 보듯, 대지(大地)는 위장용 전투복 패턴의 끝없는 연속이다. 스스로를 철저하게 위장하는 것 외엔 다른 실존의 조건은 없다. 배후조정과 노예적 순응, 거짓관계와 소통의 잔인한 위장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이 시대의 온갖 극적 상황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부조리극에서 마스크는 이미 역사와 상황의 전제조건이다. 그것 없인 어떠한 현상도 해석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연인의 사랑조차 마스크 착용자들의 제한된, 타자화된 권한일 뿐이다. 위장을 포기하는 순간, 약속되었던 일체의 안녕과 행복의 조건들은 회수되고 말 것이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못한 사람들은 위협적인 국외자로서 단호하게 다루어진다. 그들은 격리수용되거나 고작해야 표류할 자유만이 주어진다. 이렇듯 소통은 위장의 전제 하에서만 이루어진다. 위장이 가능하지 않다면, 소통도 부재할 뿐이다. 위장이 거짓소통을 낳고, 거짓소통이 다시 위장을 정당화하는 비극의 순환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소통의 바다」에서 보듯, 그들은 자신들의 필사적인 허우적거림을 무시로 허위로 돌려보내는 거대한 체계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 이 문명의 늪지대에서 역설의 폭과 거짓의 깊이는 측적할 수 없을 정도다. 연대의 급수가 높다는 진술은 사실상 유리의 심도가 깊어지는 것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는다. 춤과 연회는 사귐(sociality)이 아니라, 사귐의 위선, 또는 위선적인 사귐의 결과일 뿐이다. 이름을 부를수록 서로는 더욱 이방인이 된다. (마스크를 거부한)이탈자들은 도망칠수록 감시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만다. 언어는 자신의 발화로 되돌아오고, 사랑조차 절대고독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위장된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용주의 서사는 존재론적인 변태의 한 과정을 그린 「날것의 욕망」에서 극대화된다. 마스크가 착용하는 도구를 넘어 존재 자체가 되어가는 이 과정은 어느 날 갑충(甲蟲)으로 변해버린 카프카의 그레고르의 그것만큼이나 섬뜩하다. 어떤 측면에선, 서서히 동화되고 포섭되어가는 하용주의 인간이 그레고르의 돌연한 곤충화보다 더욱 재앙적인 것일 수도 있다. 딱딱한 등껍질과 각질의 칸들로 나뉜 둥그런 배를 가지게 되긴 했지만, 적어도 그 순간 그레고르는 두려운 현실과 최소한의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이라는 극적인 대비를 고통스럽게 인식하고 있다. 카프카의 주인공은 현실세계 자체가 악몽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곱씹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악몽도 진화했다고 해야 할까. 하용주의 인물은 악몽 속에서만 존재감을 느끼도록 서서히 변질되어가고 있다. 위장의 체계에 녹아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변신은 아예 인식과 반성의 토대 자체를 허물어뜨리면서 조금 씩 조금 씩 교활하게 진행되고 있다. 존재는 추한 외모를 가진 제3의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체계의 일부로 편입되어가는 것이다. 마스크화된 인격, 저항의 전적인 결핍, 여기에 또 하나의 메타포가 더해지는데 그것은 이 존재의 결핍이 부양하고 있는 적색의 식물이다. 작가를 따르면 이 식물은 일종의 식충식물에 작가 자신의 상상을 더 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흐느적거리는 적색의 식충 식물은 인간 존재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도발적인 욕망의 은유다. 이 꿈틀대는 욕망과 위선으로 뭉쳐진 이 부재의 덩어리에서 존재의의 역동성, 생명의 신선함과 심오한 매력을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존엄하다"고 외쳤을 때의 그 존엄함은 이 마스크화 되어가는 익명의 얼굴과 텅 빈 슈트의 그 어디에도 없다. 존재는 사물화되고 생명은 가증한 비(非)생명에 잠식당해가고 있다. 마스크화된 인격이야말로 살아있음으로부터 유리되고 추방된, 파멸의 연금술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용주_거대한 위장_한지에 채색_200×710cm_2008
하용주_거대한 위장_한지에 채색_200×710cm_2008_부분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와 이름을 반납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방독면 뒤로 자신을 숨긴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위장과 통제의 기제 뒤에 가려진 채 정체불명이다. 익명성과 부재가 정체성의 유일한 대변자일 뿐이다. 이름을 반납하는 것은 사실상 모든 것을 반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이 없다면 과거도 기억도 무의미하고, 역사도 미래도 신기루에 지나지 않은 개념일 뿐이다. 그것에선 이름을 지닌 어떤 것도 남겨지거나 잉태될 수 없다. 그들은 통제와 집단학습이라는 현재적 조치 안에서만 존재하는 '카우치 포테이토(couch-potato)'형 인간, 곧 경험의 결핍과 그를 대체하는 시뮬라크르들에 의해 기획되고 통제되는 전형적인 현대적 유형의 인간이다. 이들은 스팩터클, 게임, 서커스, 오락산업 따위의, 사람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순응적으로 교화하는 기제들에 쉽게 스스로를 위임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강력함 힘을 발휘하는 주체는 '다양한 기분전환거리와 일시적인 욕구충족물들'을 배급하는 사람들이 된다. 학습에 의해 욕망 자체가 왜곡되기 때문에, 욕망 또한 결핍의 연장에 불과하다. 왜곡된 욕망은 만족이 아니라 만족의 시뮬라크르를 갈망한다. 이 시뮬라크럼의 유독한 순환메커니즘은 오늘날 점점 더 오락화되어가고 있는 현대미술, 현대문화의 그것이기도 하다 : " 새로운 종류의 진정제가 오늘날 이른바 고급문화라고 불리는 것 전체를 통해서 제공되고 있다. ...다양한 문화적 실행과 예술품들-회화, 고급음악, 춤, 문학, 연극-이 대중연예와 여행 산업과 긴밀히 어우러져 운용되고 있고 ... 그렇게 해서 새로운 사회적 지형도가 생겨나서 현대적 오락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기분전환과 오락과 연예프로그램을 즐기는 사회, 그리하여 무감각 속으로 잠들어가는 사회가 지배적으로 된 것이다." (리 호이나키) 하용주는 존재에 부단히 위장을 종용하는 체계에 순응되어가는, 텅빈 슈트의 부재와 식충식물의 극악한 욕망으로 무너져내리는 「날것의 욕망」의 그가 바로 자신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 특히 현대인간의 보편적인 자화상임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거짓과 노예적 순응주의로 가득한 거대한 체계 안에서 살고 있다는 진실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하용주의 회화는 서술적이다. 그에게 회화는 시대와 사회의 기억을 함축해내는 예민하게 온도가 조절된 저장고다. 그에게 형태와 색은 생각과 느낌을 실어 나르는 문명의 오래된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다. 탐미적 형식주의나 과학주의의 변용인 공허한 실험주의는 작가의 인식에 수반되는 절박함으로 인해 여기 발붙일 자리가 없다. ■ 심상용

하용주_소통의 바다_한지에 채색_200×300cm_2008
하용주_수평적 분열_한지에 채색_130×130cm_2008

Mask Mechanism for All of Us : Camouflage, Enslavement and Twisted Desire ● The viewer instinctively grasps emergency in the painting by Yongjoo Ha. In his pictorial world, almost everyone wears a black gas mask. With two enormously exaggerated circular eye windows for clear view and a wriggling rubber hose connected to a respirator, the device has an unpleasing and even deformed shape. It is something that was never meant to be created without chemical warfare, gaseous suffocation terror, cruel military operation or tragic calamity with foreseen fatal air pollution. It already epitomizes as a metaphor of fear and horror. Masks function as much the same as Soma that people take living in the "Brave New World", a novel by Aldous Huxley. Soma is a hangover-free hallucinogen that makes users perfectly euphoric and thus keeps them in the enslaved stage. As long as people consume Soma, life seems full of hopes and the society has nothing to complain about and becomes a perfectly ideal place to live in. In the world that Yongjoo Ha looks into, the masks replace the superbly effective pills by promising the hypnotic enslavement. As long as people put the masks on, they would not feel any pressure or control from the society. Unless you struggle to escape, you will be safe and may get rewarded with surprising sweet relieve. The pseudo-anonymous street artist, Banksy, once sneaked into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surreptitiously hung his work, You Have Beautiful Eyes and thus twisted the inordinate conformance that spectators had toward the institutions. It was a lady wearing a black rescue mask (seeming like the one found in Yongjoo Ha's painting) that the by-then unknown mischievous artist used to dash cold water on the viewers who would not distinguish crap from the masterpiece. Through the whole process of this act, Banksy tried to point out that genteel museum goers were the same ones as the woman in his painting who wore the brazen protective gear. As long as they nod with a serious tone of voice when facing an impossible-to-understand "work of art", and so disguise their embarrassment, they should not be afraid that someone will doubt their cultural attainments. What people try to obtain by visiting art museums is attestation as a cultured citizen. Without such two-faced mask mechanism, none of the art operations, authoritative museums, art market buzzed with huge pile of money, and hypocritical art criticism and theories of today would not be possible. This is why Huxley's Soma and Banksy's and Yongjoo Ha's camouflage masks are greatly in demand in order to maintain the foundation of the present civilization and contemporary art. ● Most people in the Yongjoo Ha's pictorial narratives are extending the scanty existence on the gas masks. They would stop breathing momentarily without the help of the wriggling hose, seemingly like a sort of umbilical cord. It is not the only signal of misery. In his Great Camouflage, the great land is filled with endless patterns of the camouflage battle dress. There are no other existential conditions than disguising oneself completely in here. Everywhere in the painting we find modern dramas written around the conspiracy, enslavement, deceptive relations and ruthless disguise of communication. In this theatre of the absurd, masks are already prerequisite of the history and circumstances. None of the phenomena could be interpreted or explained without it. Even love of lovers is limited love between mask wearers, that is, love of others. At the moment of throwing out the disguise, all the promises of security and happiness will be taken away. Unmasked people are treated relentlessly as subversive outsiders. They will be either quarantined or given mere freedom to drift away. Like this, communication is possible only under disguise. Unless the disguise is possible, there will be no communication. Disguise produces false communication, which again justifies the disguise, and thus the tragic cycle is born. In the Ocean of Communication, people desperately flounder in the water, being unable to escape out of the massive waves of system. No one can estimate how wide the paradox is, how deep the lies are in the swamp of this civilization. To state that the measure of the historical age is old is to say that the depth of the glass is deep. Dancing and partying are not sociality but results of hypocritical sociality or social hypocrisy. The more they call each other, the more they become strangers. Refugees who refuse the masks will be watched more closely as they run away farther. Words fire back into where they were spoken and even love becomes mere camouflage to start on crash into absolute solitude. Yongjoo Ha's narrative reaches the climax in his painting, Desire of the Raw which depicts the ontological metamorphosis. The process of wearable equipment transforming into a being itself is as terrifying as that of Kafka's Gregor turning into a monstrous vermin one sudden day. In some ways, Yongjoo Ha's figures, in the gradual process of being assimilated and won over, are far more miserable than Gregor in a sudden transformation. Even under the crusty shell and hideously segmented abdomen, Gregor was painfully identifying himself powerless against the formidable reality. The main character of Kafka's was clearly affirming the fact that reality itself is a nightmare. However, would it be said that the nightmare has evolved over a time? The figures in Yongjoo Ha's world have slowly degenerated into the beings who can feel existence only in the nightmare. They have dissolved in the system. The transformation is slyly destroying the entire foundation of awareness and reflection little by little. They are not the third being in ugly appearance, but utterly incorporated as part of the system. In addition to masked personality and complete absence of resistance, there is another metaphor, which is the red plant grown by the dearth of existence. According to the artist, this insectivorous plant was created with the artistic imagination. The wobbly red plants imply the impulsive hidden human desire. It is impossible to discover dynamics, sparkles and charm of life from this creature of snaky desire and hypocrisy. Dignity, which William Blake said all things that are living have, can be found nowhere in the anonymous beings disguised with masks and empty jackets. All beings become lifeless and get nibbled away by the inanimate. Indeed, what the alchemy of destruction it is that the masked personality is destined to be isolated and expelled if taking life! ● By wearing masks, people turn down their true identities and names. We never know who they are behind the gas masks. They are nameless shielded by the mechanism of camouflage and control. Anonymity and absence are the only words for identity. Giving up the name is renouncing everything indeed. One's past and memories become meaningless without names, the history and the future will be a mirage of concepts. There will not be any names to last or to be born. The people are couch potatoes existing in the present system of control and group programming, or they are typical contemporary men whose lack of experience is well managed and controlled by the alternative simulacra. They surrender themselves to the mechanism, such as spectacles, games, circus, entertaining industries, etc., which distracts their attentions and edifies them easily adaptable to the society. In this situation, the most powerful group is people who distribute the various recreational materials and momentary satisfiers. As the education distorts desire itself, the desire is merely the extension of dearth. Distorted desire desires not satisfaction but the simulacra of satisfaction. Perilous circulating mechanism of simulacrum is contemporary arts and culture that become more and more entertaining: "A new kind of anodyne is available throughout what has recently been called high culture. ...the various cultural performances and artifacts-in the fine arts, serious music, dance and literature, the legitimate theater-operate in close concert with the popular entertainment and travel industries... A new social configuration has emerged, affecting everyone enjoying modern diversions: the society of distraction, of amusement, of being entertained, of being lulled into insensibility." (Lee Hoinacki) Yongjoo Ha said that the figure in the Desire of the Raw reflects himself, who is getting adjusted to the persistent system of disguise, of empty jackets and of insectivorous plant of flagrant desire. However, it is indeed a portrait of human being, especially of us today. Who will deny the fact that all of us are dwelling on the enormous system filled with lies and enslaving adaptation. The painting of Yongjoo Ha is narrative. For him, the painting is like a storage room with temperature control system, to preserve the memories of time and society. Forms and colors are like olden wagon wheels of civilization to carry the loads of thoughts and feelings. There is no room in his painting, for aesthetic formalism and empty experimentalism that is based on the transfigured science. ■ SHIMSANGYONG

Vol.20081020g | 하용주展 / HAYONGJOO / 河龍宙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