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blematic individual

백순공展 / PAIKSOONGONG / 白淳共 / painting.installation   2008_1112 ▶ 2008_1130 / 월요일 휴관

백순공_일상의 사유_설치_가변크기_2002

초대일시_2008_1114_금요일_05:3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벨벳_GALLERY VELVET 서울 종로구 팔판동 39번지 Tel. +82.2.736.7023 www.velvet.or.kr

백순공, 문제적 개인 ● 금융자본이 들어오면서 미술판도 영화계처럼 실적 위주의 사회가 되어 간다. 교수님 따가리 짓 하지 않아도 전시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서열의 파괴가 있을 것이며, 학벌과 학력에 상관없이 작품의 시장성만으로 평가받고 대우받는 순기능도 분명히 있을 거다. 하지만 실적과 실력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만은 역시 명심하자. 실력을 기반하지 않은 실적은 영화계의 오늘처럼 붕괴의 위험성이 너무나 크다. 요 근래에 전시 과정을 생략한 채 옥션에서 데뷔해서 옥션에만 전념하는 젊은 작가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것은 대중과의 소통이나 비평과의 교감은 외면하고, 판매에만 가치를 둔다는 부정적인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역시나 판매에 안정적인 시장의 요구에 차츰 타협하게 되고, 페인팅이라는 장르의 범주 안에서 극사실적이고 팬시적이며 팝아트 성향이 강한 작품들 일색이 되어가기 마련이다. 시나리오 작가로서, 누군들 조폭 코미디만 쓰고 싶었겠는가? 미술 창작행위의 사회적 기능보다,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순간, 미술판 여러분들도 차라리 배고팠던 작년 이전이 좋았던 때라는 걸 깨닫는 날이 서서히 올 거다. (2007년 8월, abc peper 연재 칼럼 중 발췌) ● '웃기시네(cine)'라는 자조적 필명으로 영화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지금은 폐간된 웹진이기에, 그때 썼던 글들 중 일부를 종종 전시 서문에 적절히 버무려 활용한다. 필자들 원고료 줄 예산도 쪼달려서 요즘은 전시 서문을 직접 쓰고 있는데, 글의 분량을 성의의 척도로 내세우기에도 적절하고, 덩달아 전시 주제와 교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 위의 글은 금융자본에 대한 경계의식에서 시작됐었다. 당시와 같은 미술판의 호황을 영화판에서는 2000년도부터 월드컵 직전까지 이미 충분히 겪어봤다. 소위 '묻지마 투자' 라고 명명된 바 있는 자금의 풍요 속에서, 상당수의 영화인들은 좀 더 경쟁력 있는 콘텐츠 구축에 대한 노력에 소홀했었다. 조폭 코미디라는 검증된 수익모델에만 안주하는 경향이 짙었고, 다양한 콘텐츠 개발을 통한 이윤창출이라는 정공법보다는, 우회상장을 통한 주가상승으로 자금을 확보하려는 편법 시도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연출부 막내나 로드 매니저들까지 발로 뛰며 성과를 인정받을 생각보다는, 인터넷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연예 관련 주식정보에만 촉각을 세웠다. 그러는 사이 암암리에, 영화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으면서, 단기차익을 위한 자금 유치에 재능 있는 이들이 영화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고, 실제로 엔터테인먼트 관련사 중 상당수가 그런 목적을 가진 금융 전문가들에 의해 지배됐었다. 자본은 무척이나 냉혹했다. 위의 글을 쓸 시점은, 그런 그들이 하나 둘 영화판을 떠날 시기와 일치한다. 영화가 더 이상 돈을 불러 모으지 못한다고 판단한 순간, 자본의 뒤를 쫓아들어 온 이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미술판 전시 오프닝 자리에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함께 축배를 들었다.

네이처 포엠 18 파티 장면 영화 Nine 1/2 Weeks 중 파티장면

나는 기본적으로 미술인이 아니라 영화인이라 자각하며 산다. 그래서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최초로 접하게 된 계기도 몹시 불순하다. 어린 시절 동시상영관에서 킴 베이싱어의 나신을 훔쳐보다 그 존재를 처음 알았으며, 그녀의 황홀한 육체만큼 강렬하게 큐레이터라는 직종의 진정성을 각인 받았다. 인사동 대관화랑에서 무료하게 방명록을 지키고 앉아 있는 불친절한 아가씨나, 그림 팔아줄 테니 말 잘 들으라며 건방 떠는 나까마들과는 확연히 다른...큐레이터인 엘리자베스(킴 베이싱어 분)와 월 스트리트의 잘 나가는 금융 전문가인 존(미키 루크 분)은, 9주 반 정도의 기간 동안 격렬하고 다채로운 육체적 접촉을 나누며, 지난 백여 년 동안 서구 문명 내의 예술과 자본의 관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와의 관계, 본질과 외형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 영상들을 남긴다.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사적인 성행위에 그치지 않음은, 저 유명한 얼음 애무의 장면이 차츰 줌인 되며 엘리자베스의 얼굴로 클로즈업 되고, 바로 이어서 누운 인체 그림과 디졸브 되어 갤러리로 공간전환 되는 장면이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엘리자베스와 존의 개인적인 은밀한 관계가, 큐레이터와 자본가와의 사회적 관계로 은유적인 등치를 이루며, 예술과 자본,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본질과 외형 사이의 필연적인 불화와 대립을 엔딩 장면의 사적인 결별을 통해 암시하도록 장치하는 것이다. ● 따라서 나인 하프 위크의 다채로운 야한 장면들은 일종의 '짤방'이다. 그게 없었다면 아드리안 라인의 기획은 투자를 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가 정작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연출할 수 없었을 테니까...감독의 문제의식은, 엘리자베스가 초야에 묻혀 작업하는 노작가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그를 결국 설득하여 전시를 성사시키는 장면에서 극적劇的으로 드러난다. 여기에서의 劇은 호랑이(虎)와 돼지(豚)가 칼(刀)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담은 상형문자이며, 그런 극한 대립과 갈등은 희랍 신화 이래 모든 드라마의 기본이며 원형이 된다. ● 작업실 근처 강가에서 노작가가 직접 낚은 물고기와, 그의 전시 오프닝 날 탐욕스럽게 뜯겨나가는 생선찜과의 대립, 화려하고 분주한 파티에 정작 적응하지 못하고 낯설어하는 노작가와, 그의 작품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흥청망청 거리는 군상들과의 갈등...감독에게 이보다 더 극적인 상황은 없었을 것이며, 그런 극의 절정에 서서 엘리자베스는 눈물을 흘렸고, 영화는 파국으로 이어질 엔딩장면으로 속도감 있게 전환된다. 총 115분이라는 러닝 타임 중, 그 3분이 이 영화의 본질이며 핵심이고, 나머지는 그것을 위한 외형이자 사전 장치일 뿐이며, 그 만큼의 진실도 없는 우리 현실은 그래서 야한 영화보다도 못하다.

Adrian Lyne_Nine 1/2 Weeks_1986 Garry Marshall_Pretty Woman_1990

그녀가 다급히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든다. 곧바로 연결되는 침실장면을 통해, 그 대상이 존이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낯설지 않은 연결은, 앞서 언급된 두 남녀의 애무 장면과 큐레이터와 자본가와의 대화 장면 간의 전환에 대한 역진행임도 직감할 수 있다. 아마도 위로가 필요했을 그녀에게, 존의 침실은 아무런 위안이 못된 듯하다. 아니, 오히려 그와의 모호했던 관계가, 파티장의 충격과 동일한 것이었음을 명확하게 깨달은 듯하다. 앞 장면에 이어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와, 등을 돌리고 누워 잠든 존의 모습을 감독이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서, 우리는 서로 소통할 수 없는 그들의 잘못된 관계가 이제 한계에 달했음을 예감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남자의 옷장에서 말없이 자신의 옷을 챙겨 떠나는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통해, 금융자본의 절대 권력에 은밀하게 저항해왔던 선배 영화인들의 고뇌를 조심스럽게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징후는, 단순한 신데렐라 스토리로만 여겨졌던 귀여운 여인에서도 포착된다. 절정기 자본주의의 가장 고등한 교환주체인 금융인과, 가장 저열한 교환주체인 창녀의 만남부터가 예사스럽지 않다. 그들은 헐리우드 로맨틱 코메디의 전통적 남녀 주인공의 관례에 대한 파격으로 시작해서, 서로의 영혼을 파고 사는 관계를 넘어 영혼이 하나가 되는 사랑의 관계로 발전한다. 그녀를 통해 그는 적대적 기업합병이 아닌 실물경제에 대한 투자라는 경제개념의 전환을 하고, 그것이 못마땅한 변호사는 홧김에 그녀를 당당히 겁탈하려 든다. 너의 존재는 교환을 위한 것이고, 내게는 그 댓가를 지불할 돈이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관계는 너와 그의 관계처럼 정당하고 합당하다며...뒤이어 백마 탄 왕자처럼 그를 쫓아 달려온 '회장님은 아구를 돌려 버리며', 이 세상엔 가치를 계량화하여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분명히 선언한다. 악당을 물리쳐주길 바라는 건 딱히 공주만이 아니었을 거다. 그 빛나는 한방에는, 감독과 피디와 제작자의 감정이 실려 있음을, 영화 한편을 위해 몇 년씩 비굴하게 기다려본 업계 관계자라면 누구나 감지할 수 있을 테니까. 소호와 월스트리트와 헐리우드를 오가며, 그들이 지속적으로 암시하고 반복적으로 우려했던 일들이, 리먼 브러더스 사태를 시발로 하는 자본주의의 파국적 상황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백순공_일상의 사유_설치_가변크기_2005

창작자는 사회에서 받은 영향을 작품을 통해 그대로 사회에 되돌려준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전시 서문인 이 글을, 해당 작가 한 명을 위해 쓰지 않는다. 벨벳에서의 개인전은 특정 개인의 전시로 국한되어 기획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것은 사회로부터 그가 어떤 영향을 받았고 무엇을 돌려주려는가 하는 일종의 '개인과 사회의 관계전' 이며, 그러므로 그가 속한 사회에서 주변으로 밀려나온 관계를 드러내주는 '문제적 개인전'이라 할 수 있다. 백순공은 지난 16년간, 최소한 서울이라는 도시-사회 내부에서는 전시를 하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그 도시-사회 내에서의 작가라는 정체성의 성립은, 이십년 전 나인하프위크를 통해 바라본 뉴욕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갤러리라는 제도권으로부터 우선 부름을 받아야하고, 기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길 원하는 사장과 어색한 미소를 지어야 하며, 그림을 소비할만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최대한의 실적을 올려야 한다. 그것은 역으로, 판매도 안 되고 기사로 다뤄지지도 않으며 갤러리의 초대도 없는 이는 작가라고 할 수 없고, 많이 양보해서 최소한 그 사회 내의 각광 받는 유능한 작가가 아님은 분명하게 규정한다. 그러다보니 벨벳은 종종, 소위 미술계에서 각광 받는 유능한 작가들로부터 애정 어린 충고를 들어야 한다. 찌라시 미술지 기자들과 가면무도회를 즐기는, 집단사교 무도장 같은 그들 관념 속에 공고히 구축된 중앙 화단에서,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고 알더라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즉 리뷰 한 줄 나가지 않고 앞으로 나갈만한 친분관계조차 구축해 놓지 않은, 그런 작가들에 대해 그들은 터무니없는 우월감을 갖고 장소팔 고춘자 같은 만담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작년 설에 먹은 떡국과 소주가 역류할 것 같은 시류 속에서, 백순공은 서울과는 멀찍이 떨어진 지방의 한 소도시에 은둔하며, 우리 사회가 배설해온 온갖 잡지들을 묵묵히 파쇄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중엔 중앙화단 작가들과의 관계도가 뻔히 읽히는 미술잡지도 한권 정도는 끼어 있었을 것이며, 그러거나 말거나 그것들을 잘게 부수고 일일이 재조합하는 그는 벨벳이 지향해온 작가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백순공_무제-일상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콜라쥬_73×93cm_2008
백순공_무제-일상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콜라쥬_130×195cm_2008

팝 아트는 파퓰리즘이 아니다. 워홀의 진정한 가치는, 예술이기 위해 필요한 기존의 외형적 조건을 모두 파괴함으로서, 우리에게 예술의 본질 자체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끔 한 저력에 있다. 그의 무수한 아류들에 의해 그의 본질이 아닌 외형이 대량으로 복제되어 거래되고 있지만, 뉴욕 팝의 시원은 거창하고 엄숙한 기존 예술에 대한 반항과 조롱이라는 분명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하물며 대량생산과 유통의 대명사 같은 차이나 팝에도, 천안문 사태라는 망각할 수 없는 확연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하지만 그들을 벤치마킹한 소위 코리안 팝에는, 최소한의 사용가치적 진정성도 없이 오로지 교환가치만을 위한 바람잡기만 존재한다. ● 백순공의 작업은 그 형식면이나 정신면에서 의외로 워홀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다. 일종의 쓰레기인 버려진 잡지를 주재료로 선택한 그의 철학이 형식면에서, 유럽 예술의 엄숙주의를 비판하며 일상에서 예술을 발견하고자 했던 그의 철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외형만을 추구하는 우리 문명에 대한 거부와 비판으로, '파쇄' 라는 기법을 선택한 면에서도 본질로 돌아가자는 정신성이 뚜렷하게 연상된다. 그는 자신의 꼴라쥬 작업에 대해,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의 퍼포먼스적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일종의 수행처럼 보인다. 자연에서 생명을 얻은 것이 모두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듯, 너무 많아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우리 사회의 온갖 이미지들과 텍스트들은, 그의 손에서 흙처럼 분해된다. 그리고 그 손으로 다시 빚어, 그는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투박한 그릇을 만드는 도공이 된다. ● 대체 누구를 위해? 그는 파쇄지를 낱낱이 이어 붙이는 방식의 설치 작업을 해왔다. 그것은 그가 작업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즐기고 의미를 두어왔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그에 의해 파쇄된 우리 문명의 온갖 산물처럼, 그의 작업 또한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파쇄되어 다시 형성되기를 바라는 의지일 거다. 그가 주로 다루는 재료는 일종의 쓰레기이며, 전시 형태가 아닌 작업실에 수북이 쌓인 광경은 그 자체가 쓰레기로 보인다. 외형에 대한 그런 의지는 자신의 작업이 껍데기로 유통되길 철저하게 거부하며, 그 정신성을 담아낼 누군가를 위해 사용되길 바라는 분명한 지향성을 보인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후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그리고 붓질이 아닌 예술에 대한 정신을 그들에게 온몸으로 가르쳐온 거다. ● 의식할 수 있는 명백한 차원에서는 '경제적 생활' 이란 전적으로 교환가치, 즉 타락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생산과정 속에서의 소수의 개인들, 즉 모든 방면에서의 창조자들이 남아 있어, 이들은 본질적으로 사용가치를 지향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은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문제적 개인들'이 되는 것이다. (루시앵 골드만, 소설 사회학을 위하여 중) ■ 문철

Vol.20081116e | 백순공展 / PAIKSOONGONG / 白淳共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