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 DAM & WEIBANG GALLERY Presents   최경태展 / CHOIKYOUNGTAE / 崔鏡泰 / painting   2008_1211 ▶ 2008_1220 / 월요일 휴관

최경태_Doll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08

초대일시_2008_121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일요일_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웨이방 갤러리_WEIBANG GALLERY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720.8222 www.weibanggallery.com

갤러리 담_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최경태의 인형, 혹은 욕망의 불구적 형식 ●인형은 어린 육체에 대한 그의 욕망의 사소한 변형일 수도 있고, 혹은 어린 육체에 대한 그것에 상응하는 또 다른 불구적 욕망, 곧 페티시즘의 일종일 수 있다. 그러나 평자의 입장에서, 이번 작업은 최경태식 미학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경태가 그의 미술적 표현의 실천논리에 있어서 유의미한 변환과 '굴절'(refraction)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굴절은 비평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의 굴절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예술장(artistic field)의 효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점을 조금 달리 말하면, 곧 최경태가 유의미한 미술적 실천을 통해 미술장 내에 진입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경태_Doll_캔버스에 유채_162.2×112.1cm_2008

미술장의 관점에서 최경태의 인형은 그가 미술장의 존재와 그것의 굴절효과를 보여준다. 최경태가 보여주는 이 굴절효과는 최경태가 미술장 밖에서 미술장 내부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동시에 최경태가, 사회공간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의 지평으로부터 미술장의 자율적 가능성의 공간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그 적나라한 어린 육체로부터 인형으로 변화는 미술장 내외에서 최경태가 그리는 위치와 궤적의 변화와 일치한다. 이러한 변화는 한때 자신을 민중미술가로 호명했던 리버럴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바, 양립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게임들 사이의 설명되지 않는 개종(conversion), 혹은 변절이 아니라, 장의 경계를 통과할 때 나타나는 관찰되는 지극히 당연한 굴절에 충실한 효과로 보인다. 어린 육체와 인형의 차별성이 전혀 다른 게임의 논리가 아니라, 정당한 굴절인 이유는 어린 육체와 인형이 그것들 사이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욕망에 관한 삶의 동일한 문제들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형은 삶의 사회적 형식에 관한 최경태의 발화를 미술장 내 언어로 변환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평자의 비평적 관점에서 그의 인형을 미술장의 존재와 굴절의 증거로 보려는 이유는, 삶과 사회에 대한 최경태의 지속적인 문제의식이 비교적 일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최경태의 이미지 실천의 궤적 속에서 어린 육체와 인형 사이의 대립은 그저 개인양식(individual style) 상의 사소한 변화가 아니라, 미술장의 존재와 장 내외에서 작가의 위치 변화를 보여준다는 판단이다.

최경태_Doll_캔버스에 유채_45.5×65.1cm_2008

최경태가 인형을 통해 발언하려는 것은 여전히 욕망의 문제이다. 그의 욕망은 곧 개인의 문제이자, 회화의 문제이며, 자신의 욕망에 관한 내밀한 발언이자, 욕망의 코드로 소통될 수 있는 사회적 세계에 관한 회화적 발언이다. 그의 발언은 어린 육체에 대한 직접적인 사실묘사에 비해 좀 더 중첩되고, 우회하며, 은유된 이미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인형은 곧 그러한 중첩과, 우회, 은유가 만나면서, 욕망에 관한 개인과 세계에 관한 회화적 발언이 생산되는 지점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평자는 최경태 미학의 지형에서 현재의 인형작업이 어린 육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와 상응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최경태가 한낱 어린 육체를 탐하는 비윤리적 외설작가가 아니라, 미술장 내의 굴절효과를 자신의 이미지 조직 방식을 통해 표현하는 정당한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이번 인형작업은 최경태가 미술장 내 합법적 행위자라는 사실에 대한 뒤늦은 증명과도 같다. 물론, 이 증명은 미술장 내에서 생산되는 상징자본을 경제자본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우호적인 전환율을 부여하는 기능 역시 수행한다. 곧 상품가치에 대한 무한한 회의와 의심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는 미술시장에서 최경태의 작업의 안전한 상품가치를 보장하는 비평적 근거일 수 있다.

최경태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08

여고생 이후 최경태가 보여주었던 사회비판은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의 모순을 완전히 체화함으로써 성취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비판의 객관적 주체가 아니라, 비판의 대상와 완전히 동화하는 극점에서 성취되는 비판의 전략을 채택해 왔다. 이점은 최경태의 초기 민중미술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당시 최경태는 윤리적으로 우월한 민중미술가의 선도적 입장에서 권력을 비판했다. 그러나 여고생 연작에서 그의 비판은 스스로 어린 육체를 탐닉하는 비윤리적 중년 변태가 됨으로써 수행되었다. 최경태는 자신과 자신의 그림을 발가벗겨 세상에 내 놓음으로써, 동시에 자신에 대한 비난과 멸시를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역설적으로 전체 사회공간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성에 관한 집단적 위선과 기만, 그리고 권력의 훈육적 작동을 들추어 냈다.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계 밖에서 순결한 시선으로 그것의 모순을 지적하기 보다, 자본의 모순 속에 철저하게 자시을 위치함으로써, 오히려 목적을 성취하는 복잡한 비판의 형식이었던 것이다. 때로, 최경태의 비판의 동지여야 할 페미니스트, 비평가, 작가들이 오히려 그를 비난하는 것은 최경태의 비판적 위치취하기(positioning)를 잘못 읽어냈기 때문이다.

최경태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08

스스로 자신을 버림으로써 예술/예술가를 버린 체계의 존재와 모순을 반증하는 방식이다. 여고생 이후 최경태는 욕망의 문제에 접근하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더욱 자본의 모순 속으로 한발 더 접근한다. 최경태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또 그렇게 드러난 욕망을 통해, 욕망과 상품논리의 관계에 좀 더 다가서는 것이다. 최경태가 자신의 욕망을 노출함으로써 증명하려는 욕망의 자본주의적 형식이란, 그것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불구적 상황 속에 놓여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소비의 원천이며, 따라서 욕망의 충족은 소비와 생산의 확장적 순환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은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욱 더 부추겨져야만한다. 충족될 수 없는 욕망. 영원히 갈구되어져야 할 욕망의 회로. 평자는 이를 욕망의 불구적 형태로 규정하고자 한다.

최경태_Adarasi Fantasy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08

최경태는 욕망의 불구적 형식을 자신의 욕망을 통해, 나아가 회화를 통해 재현하려는 듯 보인다. 어린 육체에 대한 최경태의 욕망은 변태라는 불경스러운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불구적 형식이라는 것이다.

최경태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08

사회공간은 지배와 억압, 차별과 저항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으로 이미 진화했다. 이 사회공간의 모순은 이미 폭발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의 독재/민중의 이분법 구조가 아니라, 인종, 고용, 지역, 환경, 성, 교육, 세대, 문화의 갈등이 서로 교차하면서, 부글거리는 그런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공간의 비대칭적 분화는 어느 때 보다 여전히 이미지 조직에 관한 사회적 실천을 요구한다. 물론, 변화된 상황에서 미술의 사회적 실천은 과거와는 다른 형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 차별성은 곧 미술장의 굴절과 사회공간으로의 재환류되는 미술실천에 의해 달성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장 내 합법적 행위자인 동시에 사회적 개입자인 최경태는 이러한 과제를 합법적으로 수행할 소수의 실천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 김동일

Vol.20081211e | 최경태展 / CHOIKYOUNGTAE / 崔鏡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