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수묵 · 영상전

황선숙展 / HWANGSUNSOOK / 黃鮮淑 / video.animation   2008_1202 ▶ 2008_1231 / 월요일 휴관

황선숙_오하루의일생을보다_실험영상, DV, 사운드_00:03:57_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_경기문화재단

상영시간 / 화~일요일_01:00pm~05:00pm / 월요일 휴관

UV하우스_UV HOUSE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323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Tel. +82.31.947.5958

황선숙의 수천 프레임으로 된 수묵화-회화의 신화로부터 자유하기, 또는 수묵정신의 새로운 현현 ● "나는 수천 프레임 뒤에 숨어서야 비로소 한 장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오늘날 회화의 담론은 과도함을 넘어 신화로 작동하고 있다. 작가의 사인이 추가되는 순간 기념비적인 것으로 화하는, 일련의 '회화-육화(肉化)설'을 의심하는 사람은 오늘날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회화는 고차원 형이상학이나 천상의 시학을 담아내는 '언어 위의 언어'로 정의되고, 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으로 거래되며, 그 생산자인 작가에겐 인간을 넘어서는 지위가 주어진다. 반면, 황선숙은 이 과도함의 관습, 흥분된 시론(時論)에서 다소 쭈뼛거리는 부류에 속한다. 그는 영웅적인 회화를 앞세워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대신, 오히려 그 뒤로 숨으려 한다. 황선숙은 왜 자신의 회화를 의미들을 녹여내는 탁월한 용광로로 주장하는 예술가들의 대열에 서기를 주저하는가? ● 가까이로는 푸코(Micheal Foucault)가 옳았다. 사실 우리는 관찰되고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우리의 예술론들에도 조정과 통제의 결과가 반영되어 있다. 감시와 통제는 지각과 인식체계서부터 시선의 작용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개입한다. 즉, 우리는 보도록 되어있는 것을 보고, 그리도록 되어 있는 것을 그린다! 예컨대 지난 2,30년간, 우리의 이미지 생산자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의미에 대한 폄훼, 일체의 가치지향을 우롱하는 장식과 오락, 혼돈과 표류에 대한 서글픈 정당화, 몰인간적 이윤추구의 예찬 등을 그 내면적 축으로 삼는 것들을 만들어내라는 것이었다. 가타리((Felix Guattari)표현을 따르자면, 명령의 주체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다. 그 동안 그토록 현대적인 정신의 사원들, 즉 세계의 미술관들의 빈공간을 채워야 하리라고 믿어져왔던 이미지들, 예컨대 먼로나 마우쪄뚱, 수퍼맨이나 미키마우스, 내장과 배설물들의 재현들에서 시대를 점유하는 명령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황선숙_수묵산조_수묵영상, DV, 사운드_00:04:24_2008

이 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담론적 과장은 거의 관습화되어 있다. 하나의 그림, 하나의 조각, 하나의 회화 이미지와 하나의 조각이미지에는 그것들로선 감당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는 고도의 의미부하가 걸리곤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는 이미지가 영혼의 활기찬 동반자로서의 고유한 잠재적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회화와 조각 이미지들이 여전히 영혼에 관련된 사업의 일환으로 간주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라벨과 대중선동에 의존할 뿐인, 내면세계와 영혼과는 무관한 다른 산업의 산물에 더 가까워져 있다. ● 이쯤에서라면, 왜 황선숙이 하나의 영웅적 이미지를 방패삼는 대신, 수천 개의 이미지들 뒤로 숨어야 했던가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손에 쥘 수 있지 않을까. 수천 개의 반영웅적 이미지들로 짜여져 있는 이 '후퇴의 미학'은 두 개의 중추로 지지되는데, 곧 노동과 시간이 그것이다. 노동은 우선 4분(分) 여를 위해 3천 장 이상의 드로잉을 실현해야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통하는 동안 공허한 관념이 먼저 걸러지고, 다만 유희적일 뿐인 개념의 텅 빈 내부는 폭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은 그렇지 않은, 즉 이념과 강령, 본성과 욕망의 즉각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정련된 것이 된다. 시간은 진실로부터 거짓을, 알곡으로부터 쭉정이들을 걸러내는 신(God, 神)의 고유한 여과장치다. 어둠이 빛과 맞서지 못하는 것처럼, 거짓은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역사 자체를 속였던 거짓은 아직 없다. 시간은 비움의 과정이고,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정화'의 미덕으로 가는 여정이다. 이 정제로 인해 황선숙의 세계는 단순하면서도 통합적이고, 서술적인 동시에 명상적인 것이 된다.

황선숙_바람결에_실험영상, 35mm, 무음_2008

'하나의 이미지'라는 회화의 신화가,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이미지의 홍수시대에 얼마나 작동할런 지 의문이다. 오히려 신화화된 회화가 회화를 더욱 거만한 것으로, 더욱 묘지(墓地)적인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황선숙으로부터 우리가 제공받을 수 있는 분명한 깨달음 하나는 하나의 이미지에서 천개의 의미를 추론해낼 사람은 소수-또는 극소수-인 반면, 수천 개의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란 사실이다. ● 황선숙의 세계에서 하나의 이미지는 겸허히 침묵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전체에 귀속한다. 여기서 각각의 드로잉들은 수학적 의미에서의 한 장의 그림, 하나의 언어, 하나의 의미, 하나의 제스처 이상으로 과장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며, 그럼으로써만 자기를 넘어서는 봉헌에 가담한다. 기꺼이 수천으로 나뉘는 겸허한 이미지, 이야말로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은 채 종이에 스미고 기꺼이 시(詩)와 연대하는 진정한 수묵정신의 한 현현인 것이 아닐까?

황선숙_아버지의아버지의_실험영상, 35mm, 무음_00:04:24_2007

존재와 세계의 소통, 교차, 연대 ● 황선숙은 '영웅적인 하나', '기념비적인 한 방'의 신화를 비켜간다. 그의 '애니메이션-수묵'이 이미 탈신화적이고 탈시의적인 동시에 더욱 전통에 젖줄을 대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오늘날의 철없는 과학적 실증주의나 하위종교적 교의가 아니라면, 본질이란 흔들리는 현상들에 실려 얼핏 모습을 드러낼 뿐이라는 사실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 우리가 포획한 모든 정의론적 지식은 사실 불규칙하고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것들로부터 도출된 것들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것들', 명멸하는 사유의 꼭지들, '부유하는 의식의 그림자'..., 그것들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 대가로 지불하고 있는 담보들이다. ●「수묵산조」, 에서 산조들을 구성하는 어느 것도 자신을 내세우거나 웅변하지 않는다. 어떤 이미지도 자신의 바벨탑을 쌓지 않는다. 부분은 전체에 포함되고, 전체는 부분들로 해체된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어느덧 강약을 머금은 톤이 된다. 추상적인 구획들의 점멸들 속에서 이내 하나의 집(house)이 건축되고, 집은 창문으로, 창문은 다시 수묵 톤의 다양한 단계들 속으로 빠르게 소멸되어간다. 수묵의 터치와 농담의 변주 안에서 사물은 형태를 구축했다 이내 해체된다. 짧고 가는 터치들은 사슴 등의 가지런한 털로 화한다. 느긋했던 농담 속에서는 서서히 사람의 얼굴이 드러난다. 나뭇잎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물결처럼 가볍게 출렁이다 정말로 물결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연결이 빠르게 진행된다.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는 반복적인 형상들로 인해 본래적 의미에 묶여 있던 이미지들은 새로운 힘으로 정화"된다. 여기서는 움직임, 자유, 연대, 이동, 양보 외에 어떤 것도 주체거나 중심일 수 없다. 모든 것들은 다른 모든 것들과 연대해 있으며,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들로부터 단절되어 있지 않다. ● 4분 40초짜리 「숨 꿈」, 에선 황선숙이 무엇을 위해 이미지의 신화, 또는 신화적 이미지를 포기했는가가 더욱 자명해진다. 시작은 형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추상적인 유동으로부터다. 그 반죽같이 꿈틀거리는 것에서 먼저 정방형으로 함축된 집이 나타나고, 풍선 같은 아이의 숨결이 그 뒤를 잇는다. 바람에 날리는 아이의 머릿결은 그토록 소담한 가슴들로 연이어진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허물어 이내 산으로 솟거나 강으로 흐른다. 그리고 이 더 이상 소외와 분열이 없는 대지에서 아이의 그네가 창공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이 모든 연대, 연결, 교차의 길목들마다 무언가가, 어떤 절실한 그리움의 정서가 배어나온다. 이를 위해선 베토벤의 현악3중주에 섞인 풍경소리와 새의 지저귐, 그리고 쓸쓸한 바람결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커다란 두 눈망울에 맺힌 눈물의 계보를 흐릿하게 밖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연상적 사유, 생(生)의 많은 지점들을 되짚기 ● 연상작용은 기억의 네트워크를 점검하고 그 요인들의 상관성을 음미하는 과정이다. 연상은 그러므로 세계를 향해 뛰쳐나가거나 불필요한 논쟁에 끼어들려는 부질없는 욕망에 편승하는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맴돌면서 그 밑바닥으로 향하는 사유의 일환이다. 황선숙의 작업은 이 연상의 안내를 따라 존재의 내부로 향하는 하나의 예시적인 여정이다. 이 여정에 등장하는 것들, 집, 문(問), 아이, 따스한 포옹, 시선, 서늘한 바람, 새, 사슴 등은 모두 그 내부에 시적 함의를 머금은 이정표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길을 묻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길이 경직과 편견에 길들여진 우리의 내면세계로 인해 거의 언제나 방해받아온 바로 그 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 여행이 정의론적 지식이 허용하는 배타성, 분석이 담보하는 우월감, 설명, 개념화나 도식화가 안겨주는 지적 안도감에 의해 상시적으로 교란되어 왔던 바로 그 여행리라는 사실 말이다. ● 우리의 동참을 호소하는 듯한 이 길은 행복과 원숙함에 이르는 반듯하게 난 직선도로 따위가 결코 아니다. 이 길은 오히려 우리의 집착이 포기되는 고통을 수반하고, 자신의 내적 허위가 드러나는 수치심을 견뎌야 하는, 그런 고단한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서는 길은 언제나 이와 같이 때론 먼 길을 돌고, 생의 많은 지점들을 되짚어야 하는 것임을 어찌하랴! ■ 심상용

Vol.20081211f | 황선숙展 / HWANGSUNSOOK / 黃鮮淑 / video.ani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