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on

이동환展 / LEEDONGHWAN / 李東煥 / painting   2008_1210 ▶ 2008_1216

이동환_상처의 조건_장지에 수간채색, 아크릴_197×312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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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환 인스타그램_@2flydong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pm~06:0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1(관훈동 195번지) 13층 Tel. +82.(0)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나는...(중략) 수없이 많은 승냥이를 습작했다. 그러나 승냥이는 자꾸만 개처럼 그려졌고, 그때마다 나는 세상에 대한 증오와 애정이 부족되어 있음을 절감하곤 하였다. (이외수,『훈장』) ● 1975년에 소개된『훈장』은 소설가 이외수의 등단작이다. 여기에는 스스로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승냥이를 그리는 미술학도가 등장한다. 이외수는 1981년에 발간된 소설 『들개』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묘사한다. 이번에는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한 남자가 99마리의 들개를 한 화면에 그려 넣고는 영영 세상을 떠난다. ● 이동환이 이번 전시에 내놓은 「두려움을 감추는 기술」(2008년)은 어쩔 수 없이 이들 소설을 연상시킨다. 이외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을 보고 거의 자동적으로 이외수의 소설을 언급한다. 하지만 정작 이동환 자신은 이런 비교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외수를 즐겨 읽었던 1980년대에는 이외수를 읽지 않았고 1990년대에야 이외수의『벽오금학도』를 읽었는데, 선계(仙界)와 신통력 운운하는 이 소설이 영 마뜩찮았다. 이동환은 조정래의 소설처럼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디딘 채로 건강한 실천의 전망을 제시하는 작품들을 높이 산다.

이동환_구덩이_장지에 수간채색, 아크릴_197×312cm_2008

이동환 자신은 이런 분류에 수긍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그의 그림들을 보면 그가 1980년대 이래 한국의 미술계에 드리웠던 커다란 그림자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그림자를 명료하게 정의하긴 어렵지만 거칠게나마 말하자면 '미술은 사회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를 적시하고 개선의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미술은 자본주의의 탐욕과 모순으로부터 벗어나 고유의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등의 관념이다. 이들 관념은 서로 모순을 일으키며 충돌하며 혼재했고,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미술가, 미술학도들은 그 속에서 갈팡질팡했다. ● 1993년에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체제에 저항하고 계급 모순을 고발해 왔던 '민중미술'은 방향을 잃고 급격히 와해되었다. 개혁성을 지니면서도 억압적이고 고루했던 김영삼 정권 말기에 닥친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 전체를 돌이키기 힘든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경제적 위기 자체보다 더 끔찍한 건 고통과 불안을 맛본 사회가 빠져든 배금주의라는 수렁이었다. 이제 추상적인 혹은 초월적인 가치에 대한 추구나 기성 질서에 대한 도전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당연히 한국의 미술계도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사회의 착취와 모순을 준열하게 고발하는 대신 미술품을 구매하는 이들의 취향에 적극적으로 영합했고, 이제는 주류사회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를 포기한 채 물질적 가치와 예술계 내부의 권력만이 존중할 만한 가치임을 뻔뻔스레 내세웠다. ● 이동환의 2001년 개인전 『길을 잃다』展에는 IMF 직후의 좌절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화가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듬을 계기를 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가치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기는 어려웠다. 이동환이 겪은 어려움은 그가 그림 속에서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동환_성장촉진 프로그램_장지에 수간채색_197×312cm_2008

『길을 잃다』展에서부터 인물이 공간에서 소외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비록 초기의 작품이지만 1995년의 개인전에 출품된 그림 속 인물들이 땅에 발을 단단히 딛고 강건하게 서 있던 것과 비교하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대신에 이동환은 인물이 자리 잡은 혹은 자리를 잡아야 할 공간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에서 인물이 완전히 추방된 건 아니지만 이전처럼 당당하게 발을 붙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동환의 그림 속에 남아 있기 위해 인물들은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 첫째, 분절된 움직임으로 분해된다. 둘째, 뒤틀리고 냉소적인 유머의 동반자가 된다. 첫 번째 유형은 2004년의『아무렇지 않게...』展과 2005년의『흔들리는 대명사』展, 두 차례의 개인전에서 등장했다. 『아무렇지 않게...』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어떤 이야기의 진행이 암시되지만 『흔들리는 대명사』에서는 이야기로서의 성격은 약화되고 '분절된 움직임의 연속'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이동환_두려움을 감추는 기술_장지에 수간채색, 아크릴, 목탄_197×312cm_2008

두 번째, 뒤틀리고 냉소적인 인물은 이미 1995년의 개인전에서 단초가 보이고 2001년의 개인전에서 조금씩 부각된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2007년의 개인전 『병적인 웃음』展에서 마침내 '양(羊)'의 탈을 쓰고 등장하기에 이른다. ● 이처럼 인물이 묘사되는 두 가지 방식은 곧 이동환의 그림에 내재된 두 가지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개의 방향으로 뻗은 힘 때문에 이동환의 그림은 이따금 혼란스러워 보이거나 여러 층위의 이야기들이 산발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방향성은 이동환의 그림을 규정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 앞서 예를 든 이외수는 물질적 탐욕에서 자유로운 예술적 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현실의 사회적 맥락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대해서는 회의적(적대적)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소설『훈장』에는 주인공과 그의 친구가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료 학생들에게서 구타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동환_She is..._장지에 수간채색_91×72.5cm_2008

선계(仙界)를 바라보는 이외수의 입장에서야 이처럼 속 편한 소릴 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의 역할과 방향을 직접 짊어진 예술가에게는 '이해타산에서 벗어난 순수한 예술적 가치'와 '현실에 대응하는 예술의 실천적 역할' 양쪽 중 어느 한쪽을 쉬이 팽개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동환의 그림은 이 두 가지의 방향을 끌어안은 채 모순과 균열을 감내하면서 벌이는 싸움이다. ●『아무렇지 않게...』展과『흔들리는 대명사』展에서 인물들의 움직임은 분절된 채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들 전시에 나온 그림들은 동물과 인물의 움직임을 처음으로 연속촬영한 머이브리지의 사진(1872년부터)이나 뒤샹의 초기작인「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12년) 등과 쉬이 비교된다. 그렇다면 이동환은 왜 새삼스레 앞선 이들의 작업을 되풀이한 걸까? 나는 우선, 이동환이 화면에서 인물을 '지우기' 위해 인물을 움직임으로 분해했다고 본다.

이동환_눈 먼 양_장지에 수간채색_91×116.5cm_2008

인물을 지우려는 시도는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 인물이 화면 속 공간에서, 바꿔 말해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와 고민, 암중모색의 방법론이다. 머이브리지와 뒤샹 등의 작업과 이동환의 그림의 결정적인 차이는 머이브리지 등의 작업에서와는 달리 이동환의 그림 속 인물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의 모습은 앞으로 걸어가는 것인지 뒷걸음질을 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어떤 경우에는 뒷걸음질을 치는 듯한 느낌이 더 선명하다. 꼭 비디오테이프를 앞뒤로 빨리 감을 때 볼 법한 모습들이다. 인물들은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대신 마치 시계추처럼 하나의 극과 다른 극 사이를 왕복한다. 이 왕복운동 속에서 인물들의 무게는 가벼워진다. 마치 허깨비나 잔영인 듯 가벼워져서는 끝내 운동의 '궤적'으로만 존재한다. ● 이동환은 투사의 면모를 지닌 예술가다. 문제는 예술을 수단으로 삼은 싸움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적의 힘이 너무 강대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표적이 자꾸 움직여서 겨냥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피아(彼我)도 불분명해진다. 척결해야 마땅할 부정적인 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은 모습을 바꿔 가며 이리저리 숨어들었다 갑작스레 나타나며, 심지어 우리 편에서도, 내 안에서도 자라난다.

이동환_Q씨가 들려준 그녀 이야기_장지에 수간채색_116.5×91cm_2008

이를 이동환은 '양(羊)'이라고 봤다. 이동환이 그린 '양'은 그런 부정적인 요소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이다. '양'은 거대 권력이고 모순이고 위선이고 허위의식이다. 그래서 작가는 양을 "내가 죽여야 할 놈"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놈은 손이 닿지 않은 멀고 높은 곳으로 물러났는가 하면 어느 새인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린다. 작가는 절망 끝에 헛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병적인 웃음"(2007년 개인전의 제목)이다. ●움직이는 표적을 쫓자면 이쪽도 움직여야 한다. '양'을 쫓아 좁은 길을 지나 비바람을 뚫고 함정에 빠져 가며 내닫는다. 그래서 '늑대'이다. 이동환의「두려움을 감추는 기술」에는 똑같은 모습의 늑대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마치 마릴린 먼로나 모나리자를 복제한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처럼. 그런데 이 늑대들은 각각 다른 여러 나라의 국기를 달고 있고, 이들 국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국가들, 바꿔 말해 지구상의 나머지 지역을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득실에 따라 농단하는 깡패 나라들을 가리킨다. '이들도 믿을 수 없는 놈들이란 말인가?' 국기의 친숙하고 말끔한 디자인은 늑대들의 야성을 속박하는 매듭처럼 보인다. 늑대들은 국기 뒤에서 당장에라도 뛰쳐나올 마냥 눈을 번득인다. ■ 이연식

Vol.20081213e | 이동환展 / LEEDONGHWAN / 李東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