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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8_1217_수요일_06:30pm_영아트갤러리
후원 / 경기문화재단
2008_1217 ▶ 2008_1223 관람시간 / 11:00am~07:00pm
영아트갤러리 YOUNGART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관훈동 105번지) 2층 Tel. +82.(0)2.733.3410 www.youngartgallery.co.kr
2008_1224 ▶ 2008_1230 관람시간 / 11:00am~05:00pm / 12월 25일 휴관
한데우물문화공간 갤러리 GALLERY HANDEWOOMUL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23번지 대민빌딩 B1 전시실 Tel. +82.(0)18.379.1990 cafe.daum.net/suwonartstreet
연기緣起적 세계를 위한 희망 - 이윤기의 청자회화에 깃든 생명론 ● 도법스님이 말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연기법이다. 모든 게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연기적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면 너 없이 나 못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산소·부모 없이 태어날 수 없다. 내 노력만으로 사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자기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도몽상(뒤바뀐 생각)이다." 라고. 생명평화결사가 탁발순례를 마치며 마련한 '생명평화의 길을 묻다'란 즉문즉설에 나서서 그랬다. 모든 생명이 그물코로 연결돼 있다는 것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 현실적 테제를 망각하게 되면, 해일이 일고 전쟁이 터지며 죽음이 난무한다. 현재, 인류는 이 그물코의 파괴로 인해 치유 불가능한 세계로 치닫고 있다. 어머니 자연은 훌륭한 어부여서 찢겨지고 뭉친 이 그물코를 언제나 본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지만, 이제 그 한계에 직면한 것은 아닌지 두렵고 무섭다. 얼마 전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생긴지 딱 1년이 되었다. 1년 동안 태안의 바다와 육지는 우려했던 두려움과 무서움이 무엇인지 죽음에 가까운 체험을 치러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바로 '우리'에게서 왔다. 사람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기름찌꺼기를 걷어냈다. '벌떼'는 긍정의 표현이 아니다.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저항'의 언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환경재앙을 불러 온 이 기름의 폭력에 맞서 벌떼처럼 달려가 저항했던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셈이다. 태안은 이제 서서히 살림의 기운을 되찾고 있다.
작가 이윤기는 해안이 시커멓게 타 들어갔던 바로 그 태안에 다녀왔다. 방제작업을 도우면서 그는 그 검은 바다에 떠 있는 흰 옷의 사람들을 발견한다.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은 사람들이 방제복을 입고 석유를 걷어내고 있던 그 장면은 그에게 매우 숭고하게 다가왔다. 그는 화성시 동탄의 목리 작업실로 돌아와 이 때의 강렬한 기억을 작품으로 풀어내기 위해 다양한 스케치를 했다. 일차적으론 화면의 전면을 검게 칠한 후 흰 사람들을 그려 넣는 것이었는데, 사실적 재현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어서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았다. 단지 기억을 회화적 재현으로 끝낸다면 작품의 상징이 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방책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다가 풀어낸 것이 상감청자를 화면으로 호명한 뒤 학 대신 방제복 입은 사람들을 상감한 것이다. 흰 방제복을 입고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가 펴면서 기름찌꺼기를 걷어내는 사람들의 형상은 놀랍게도 청자가 가진 미학을 현실미학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데 그가 청자를 떠 올린 것은 올해 통일미술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개성을 방문해서 본 고려청자 때문이었다.
우리 인식 속에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이 각인되어 있어서 상감청자하면 대체로 이 청자가 떠오른다. 운학(雲鶴. 구름과 학)문양이 상감된 이 청자의 균형미 넘치는 품새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도 한 몫 한다. 하지만 상감의 문양은 운학 외에도 양류(楊柳. 버들)를 비롯해 보상화(寶相華)·국화·당초(唐草)·석류와 같이 꽃과 풀, 열매 등 다양하다. 그 중 운학과 국화문양이 가장 많고, 지역의 특성에 따라 생김새도 다르다. 그가 본 개성의 청자는 허리가 잘록하면서 어깨 볼륨이 큰 것이었다. 청자의 빛깔도 달라서 아주 농익은 색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김과 상관없이 상감문양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태안에 모인 사람들로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청자라는 그릇은 문양이 새겨지는 하나의 대지라 할 수 있다. 이 훌륭한 모판이 없다면 문양은 한 낱 그림 쪼가리 밖에 되지 않는다. 청아한 비취색은 그릇이란 대지를 덮은 하늘이며 또한 우주다. 바로 거기에 상감해 넣은 것이 학과 나무, 꽃들인 것이다. 청자에 담긴 세계는 이 땅의 자연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자연의 가장 응결된 미학이 함축된 세계이기도 하다. 하여 이 청자는 최근 교수신문이 연재하면서 선정한 "한국의 미, 최고의 예술품" 중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그가 그런 의미들을 사유하며 작업실에 틀어 박혀 회화적 가마로 구워 낸 청자들은「청자상감자원봉사자문매병」,「청자상감쓰레기줍는사람문매병」,「청자상감소식을전하는사람문매병」,「청자상감물주는어머니문매병」,「청자상감씨뿌리는아이문매병」,「청자상감물놀이문매병」 등 여섯 작품이다. 우리 전통회화의 특징이랄 수 있는 여백을 한껏 살리면서 청자만을 그린 이 작품들은 상징을 분산시키지 않고, 청자 고유의 미학인 '자연미학'을 '현실미학'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현실미학이 다시 자연미학으로 합일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문명의 반자연적 폭력에 대해 성찰케 한다.「청자상감자원봉사자문매병」는 본래 학이 있던 자리에 방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배치했고, 구름이 있던 자리는 기름띠가 되었다. 이 청자는 본래 국보 제68호의 운학문매병이었다. 이 매병의 학 문양은 원과 원의 밖에 둘 다 존재한다. 흑백상감한 원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학과 구름을, 원 밖에는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는 학과 구름을 새겼다. 원의 안과 밖이 어떤 상징인가에 대해선 밝혀진 바 없지만, 원이 예술적 상징 언어로서의 미학을 테두리지은 것이라면, 밖은 자유의 몸짓으로서의 자연이 아닐까 한다. 작가 이윤기는 '자원봉사자' 매병에서 이 원과 밖 경계 없이 방제복 입은 사람을 새겨 넣어 상징과 현실이 기름유출로 피폐해 졌음을 고백하고 있다. 때로 자연의 내부와 외부는 이렇듯 인간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청자상감쓰레기줍는사람문매병」은 원 안의 학을 그대로 두고 그 밖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을 그려 넣었다. 이것은 학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속살이 치유되고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며, 자연과 환경, 그 씨알 주체의 생명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삶터는 오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자연의 밖에서 그들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의 찌꺼기를 줍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희망의 인문학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 일이 지루하고 또 무력한 것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시들을 둘러싸고 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또 그 시를 읽고 있는 우리들의 고통에 대해서, 좀 더 성숙하고 예민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략) 무력한 인문학이, 게다가 연약한 한 편의 시가 인간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무모하다. 그러나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작가 이윤기가 그리기라는 회화적 상감으로 구현해 낸 이 청자들의 맥락 또한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태안의 복구가 다시 사람의 힘으로 희망을 되찾아 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그 이전, 그러니까 평택 대추리에서 현장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작가다. 그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이러한 '사람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의 밖은 문명이 아니라 또 다른 자연이다. 바로 그곳에서 사람들이 산다.「청자상감소식을전하는사람문매병」에서 '쓰레기 줍는 사람'이 우체부 아저씨로 바뀌어 표현된 것을 보라! 우체부는 기름띠가 천지인 갯벌을 가로질러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린다. 그 소식이란 무엇일까? 매명 주둥아리 위에 한 마리 제비가 앉아 화면의 정적을 깨고 있다. 제비의 귀환은 봄의 귀환이자 생명 움틈의 귀환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작품이 타전하는 소식은 태안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귀환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 작가 이윤기는 이 작품에서 한 편의 시처럼 타인의 고통을 감싸 안은 '희망의 소식'을 길어 올린다.「청자상감물주는어머니문매병」은 원의 안, 힘차게 날아올랐던 학이 있던 자리에 어머니를 그렸다. 어머니는 상징이 있던 자리마저 다시 씻겨내고 있다. 원 밖의 학은 치유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다시 상징이 되어야 하고 서사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바로 거기가 시의 자궁이며, 모든 예술의 궁극의 모궁(母宮)이지 않은가. 어머니 자연은 생명 치유의 손길로 거대한 씻김의 굿판을 벌이고 있다.「청자상감씨뿌리는아이문매병」는 예술이 꿈꾸는 이상향이자 소망의 실체라 할 수 있다. 이 청자에선 원의 안과 밖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경계 없이 모두가 하나다. 아이들이 씨를 뿌리며 대지를 일구고, 흑염소가 그 대지의 지평에서 풀을 뜯는다. 운학도 자유롭게 춤춘다. 그리고「청자상감물놀이문매병」에 이르면 이제 아이들과 꽃이, 물이 완전히 동화된 세상이 된다. 물아일체(物我一體)란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이윤기는 회화로 구워 낸 청자를 통해 상처받은 그물코를 치유했다. 그의 회화는 이명원식으로 풀면, 연약한 그림 하나가 인간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무모하다. 그러나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윤기의 회화는 바로 그 지점을 우리에게 또박또박 들려주고 있다. ■ 김종길
Vol.20081219c | 이윤기展 / LEEYUNGI / 李允基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