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적 추상, 숨박질, 그리고 나그네

정규옥展 / JEONGGYUOK / 鄭圭鈺 / painting   2008_1216 ▶ 2009_0118

정규옥_untitled(red)_캔버스에 유채_100×140cm_2008

초대일시_2008_1216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아트팩토리 인 다대포 ART FACTORY IN DADAEPO 부산시 사하구 다대1동 1522-1번지 Tel. +82.51.264.0358 / +010.2047.5330

무차별적 추상, 숨박질, 그리고 나그네 ●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 급히 차를 휘몰아 다대포 해수욕장 부근에 도착했을 때, 수평선 너머에 걸려있던 석양 또한 서둘러 모습을 감추고 있는듯했다. 미팅 약속을 했던 작가 정규옥은 다대포 주변의 공단(工團)에 자리를 잡은 공동작업실(Atrist-in-Residency)의 스튜디오 프로그램(Studio Program)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들 중의 한명이다. 낡은 공장을 리모델링하여 오픈한 다대포의 공동작업실은 세상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멋진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쉽게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을 실천하고 계신 후원자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단지 전문 경영인과 콘텐츠의 부재로 인하여 프로그램이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앞으로 점차 개선되어갈 것이라 믿는다. ● 골목을 두어 번 돌아서 막 작업실 주차장에 들어설 즈음 공단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저 멀리 을숙도의 갈대숲에서 불어오는 을씨년스러운 찬바람 때문인지는 몰라도 희끗희끗 보이는 작업실 건물이 조금은 추워보였다. 하지만 주차장까지 나와 반갑게 나를 맞이한 작가를 따라 들어선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마치 온실 같았다. 아마도 작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눈빛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이지 싶었다. 정규옥의 첫인상은 조용하고 다소곳했다. 얼핏 그녀의 작품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도 닮은 듯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잠시 뿐, 그녀의 작품 속에 배어있는 거친 숨소리를 발견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화면 위에 널브러져 있는 그러나 지극히 절제된 추상적 형상들과 마치 무작위로 찍어 눌린 듯하지만 정교함과 중량감이 느껴지는 마티에르 속에 개인적 체험에서 우러나왔으리라 추측되는 터프한 붓질과 강렬하고 다양한 색들이 수줍은 듯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정규옥_untitled(park)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08

통상 서양미술에서는 회화를 크게 구상과 추상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는 사실적이며, 그 외 비사실적인 것은 모두 후자로 간주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분류방식이 회화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적 측면에서는 매우 유용하고 그를듯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구분의 근간을 이루는 미학적 토대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간략히 대략 다섯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지 싶다. ● 첫째, 서양미술사는 칸딘스키를 추상화의 선구자로 간주하고 있다. 웃기는 소리다. 추상은 태초부터 있었고 또 본능이다. 그게 어떻게 칸딘스키의 것인가? 서양미술이 권력일 때만 가능했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한번 들어보기나 하자. 칸딘스키 왈, "대상(對象)과 무관한 그림그리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미술이 사실주의와 비사실주의로 이분화되던 시대의 시대정신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런 엉터리 주장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지 싶다. 둘째, 알다시피 구상이든 추상이든 회화는 어차피 일류전(illusion)일 뿐이다. 일류전의 우리말은 환영(幻影)에 가깝다. 환영은 실제(實際)의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구상이든 추상이든 다 가짜 즉 허상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실(寫實)을 미술의 가치를 결정짓는 절대적 기준으로 섬기고 있기도 하거니와, 추상은 묘사력이 부족한 화가들이나 하는 하치로 여기고 있기도 한다. 셋째, 구상은 추상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구상이 추상이라고? 그렇다. 왜냐하면 화면 위에 그려진 형상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든지 추상적으로 그려졌든지 간에 그것들은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추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결론은 두 번째 경우로 귀결된다. 넷째, 한 때 추상미술이 '구체미술(Concrete Art)'이라고 불리었던 시절이 있었다. 말하자면 기학적인 형상 - 점, 선, 면 등 - 을 띠고 있는 추상적 형상들이야말로 구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지 않느냐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섯째 구상이든 추상이든 회화를 평면 위에 칠해진 물감 덩어리들로 간주해버리는 경우다. 말하자면 회화를 아예 하나의 물건(物件)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는 일찍이 20세기초반의 유럽의 다다이스트들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이 개념의 발전된 형태가 오늘날의 '오브제 미술'인 셈이다. 급기야는 마르셀 뒤샹같은 작가는 아예 남성용 소변기 즉 레디메이드(기성품)를 미술이라고 주장해버리고 만다.

정규옥_I'm a bird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08

아무튼 이러한 논란들 덕분에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미술재료와 사유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이젠 재료와 사유의 운용에 있어서 성역은 없다. 이와 같은 시대에 물감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미술적' 행위라기보다는 '선택'의 의미로 해석되어지기를 강요받고 만다. 기실 회화가 미술의 꽃이었던 시대도 있었다. 회화가 권력이었을 때 가능했던 사건이다. 요즘은 모든 위계질서를 상대적인 관계로 간주해버린다. 계급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오직 '차이' 만이 강조되는 세상이다. 이러한 시대에 회화를 통하여 권력의 부활을 탐하는 행위는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무늬만 슬쩍 바꾼 또 다른 형태의 불가시적인 미술권력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온갖 수단과 장치가 난무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튀고, 뜨기 위한 어떠한 미술적 행위도 용서되는 세상이기도하다. 이러한 트랜드 속에서 회화의 미래는 암담해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회화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거래가 용이한 상품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점이 현재까지도 작가들의 발목을 잡는 매력! 들 중의 하나일 듯싶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너무 세속적인 편견이다. 보다 전문적인 관점에서 보면 회화만큼 오랜 역사를 유지하며 사회적 검증을 통과한 장르가 없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생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사유를 담아내는 데 있어서 회화만큼 효율적인 장르도 드물지 싶다. 이러한 인식을 근간으로 해서 정규옥의 추상 작품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자.

정규옥_untitled(glow with ll)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08

먼저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음~ 추상만 고집하는 건 아닌데요, 제겐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도 그리고 싶은 것들이 추상적인 이미지로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그것들을 그리는 거예요~" 정규옥은 풀어놓고 싶은 삶의 압축 파일이 많은듯하다. 그것들을 캔버스라는 한정된 프레임 속에 모두 풀어놓기에는 구상보다는 추상이 훨씬 용이했을 터이다. 그 결과 그녀의 캔버스는 추상적 이미지들로 꽉 차있다. 허나 정규옥의 추상은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지적했던 구상과 추상의 분별을 넘나드는 '무차별적'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이 경우 그녀의 추상은 당위(當爲)다. 또한 그것들은 단순히 작가의 사유의 압축파일을 푼 추상이 아니라 정교한 가공을 거친 재압축 파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압축→풀기→재압축이라는 반복의 결과로 획득되어진 (무차별적)추상을 통하여 작가가 노리는 효과는 무엇일까? 사실 한 작가가 지닌 사유의 정체를 단지 몇 점의 작품들을 관찰한 후 이해하려는 시도는 참으로 무모한 짓인지도 모른다. 추상작품의 경우 그 이해는 더욱 곤혹스럽다. 게다가 재압축된 추상이 또다시 거친 붓질과 두터운 마티에르에 의해서 압박되고 있는 경우에는 더 더욱 난해한 것이다. 그러나 정규옥의 경우에는 거친 붓질과 묵직한 마티에르의 압박 덕분에 오히려 재압축 된 추상의 시각적 효과와 의미가 극대화되고 있는 듯! 하다. 그 결과 작가의 제스츄어(의도)가 드러날 듯 말듯 마치 숨박질(hide-and-seek) 하는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화면의 긴장을 유도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된 장치인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의 사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작가의 수줍음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갓 서른에 인생과 우주를 논하기에는 좀 이르다고 여길 수도 있고, 수줍을 법도 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그 수줍음에서 삐져나오는 거친 숨소리는 또 무엇인가?

정규옥_untitled(trip)_캔버스에 유채_130×160cm_2008

"나는 날고 싶다./ 무의식적 비상이 그립다./ ~진정한 나그네는 떠나기 위해 떠난다." 슬쩍 훔쳐본 작가의 노트다. 아, 그랬구나. 겹겹이 쌓인 마티에르 속에 숨겨진 작가의 숨소리 즉 정체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정규옥은 서울과 독일에서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나오고 다시 부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다대포에서 잠깐의 여정을 풀고 있다. 나그네의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시간이지 싶다. 불란서의 어느 철학자는 현대를 유목(nomadism)의 시대라고 정의한 바 있다.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 의미를 대략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기존의 방식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부정하는 변혁의 추구 -". 조금은 거창한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방황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향한 충고처럼 들린다. 유목은 공간과 정신을 포섭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다국적 문화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태생적으로 유목민인 셈이다. 그러나 유목의 의미를 몸소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늘 집시나 이방인처럼 살기는 어렵다. 그것은 예술가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실천하는 예술가가 드물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가는 늘 이방인이라 했던가.

정규옥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90×125cm_2008

정규옥의 캔버스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의 공간이다. 사유의 공간이자 유목을 지향하는 공간이다. '무의식적 비상'과 '진정한 나그네'를 꿈꾸는 - . 또한 그것은 작가의 사유의 정체가 들키면 어쩌나 싶어 터프한 붓질과 무거운 색들로 재압축된 추상을 압박하고 또 압박하고 있는 공간이기도하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작가의 수줍은 의도라는 것을 안다. 그 의도가 '기존을 부정하고 늘 변화를 추구하고자하는' 작가의 거친 숨소리라는 것도 눈치 챘다. 그렇다면 정규옥이 노린 효과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이러한 판단이 옳다면, 작가 정규옥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인지도 모른다. ■ 하용석

Vol.20081228d | 정규옥展 / JEONGGYUOK / 鄭圭鈺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