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_MISSING

나현展 / NAHYUN / 羅賢 / mixed media   2009_0109 ▶ 2009_0222

나현_상륙후작전회의_디지털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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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_2009_0131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01:00pm~10:00pm

갤러리 상상마당 GALLERY SANGSANGMADANG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7-5번지 문화플래닛 상상마당 2층 Tel. +82.2.330.6223 gallery.sangsangmadang.com

실종과 의사擬似 다큐멘터리 ●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대미술의 전경은 사방으로 방사하는 스팩트럼과 함께 애매성이란 안개로 자욱하다. 이 애매성이란 안개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모든 장르와 장르, 형식과 형식이 서로의 경계를 잃어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것은 지향하지 않은 채 나타나는 자연스런 부산물이다. 그런데 매번 이 부산물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애매하다는 것은 무언가 명확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재의 분명한 징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오늘의 현대미술 또한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듯 부유하기 때문이다.

나현_No12_캔버스에 페인트, 바니쉬_179×130cm_2008

1. 7인의 실종과 찾아나섬 ● 나현의 이번 프로젝트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최초의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던 한국전(1950-53)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보병 1개 대대와 해군 군함 1천을 포함한 약 3400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던 프랑스는 참전군인 중 3분의 1이상의 대규모 사상자를 내었고 그 중 7명이 실종 처리되었다. --- 나는 --- 실종된 7명의 병사를 찾는 과정에 작가의 정체성의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 나현의 이번 전시는 하나의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실종과 찾아나섬. 실종과 찾아나서는 것은 일종의 상황극이나 메타포로 구성된 유사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된다. 실종과 찾음의 과정은 매우 안정적이며 견고한 어떤 예술적 틀 밖을 지나는 문제와 같다. 그러기에 나현의 프로젝트는 하나의 과정이고 일시적인 사건에 머문다. 나현의 이번 한국전쟁 중 실종된 7인의 프랑스군 찾기는 아주 이상한 국면에 있다. 한국전쟁 중 실종된 유엔군 실종자 수는 총 47만 267명이고 미군은 8천 117명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 가운데 나현은 7명의 실종 프랑스군 찾기를 프로젝트로 삼았다. ● 나현의 한국전쟁 참전 프랑스군 실종자 추적 프로젝트는 그 지점이 복잡하다. 복잡하단 말은 다른 면에서는 모호하게 들릴 수 있다. 사라진 7인의 프랑스 군인들. 그들은 어디에 묻혀있을까? 그들은 프랑스 국적의 사람이기에 앞서 보편적 존재성을 지닌 고귀한 한 사람이다. 그들의 국적은 남한도 북한도 프랑스도 아닌 보편적 사람에 속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현의 프로그램은 일종의 프로파간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나현에게는 국적은 문제 선상에 없다. 그에게 어느 순간 운명처럼 다가온 실종이라는 사태 또는 인연이 보다 중심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다른 얼굴처럼 보였다. ● 그가 설정한 4차원으로서의 사건들이 '나'를 그리고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신념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해 왔는데, 이번 프로젝트 또한 이러한 일련의 아이디어와 기획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니까 실종된 것은 7인의 프랑스 군이자 동시에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나의 실종이다. 아니 작가라는 정체성의 실종 상태가 이번 프로젝트의 동기이다. 그러니까 실종된 프랑스 군을 찾겠다는 프로젝트의 수사학은 출발하자마자 이상한 길을 따라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가상적(假想的)이다. 한편의 예술적, 제의적 농담이다.

나현_finding missing 7 french soliers, cite-1
나현_실종프로젝트_설치_2009

2. 씨테섬의 다리 ● 나는 그의 작업을 보며 한국영화 「바람난 가족」을 떠올렸다. 이 영화의 진지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변호사가 한국전쟁 중 학살당한 산골의 어느 마을에서 발견된 희생자들의 유골과 희생자 가족들, 동네 주민들과의 생뚱한 에피소드가 삽입되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바람난 연애기와 어떠한 연결고리도 찾기 어려운 이 무거운 한국의 현대사가 남겨놓은 미제의 과제들, 중력들. 굳이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주인공들의 정신없는 바람기와 연애행위와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남과 북이라는 민족의 작위적 해체 과정,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의 해체과정의 메타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은유의 논리는 말이 되나 실제 영화상에서 갑작스럽고 불편하다. ● 나현의 이번 프로젝트 또한 엉뚱하게도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프랑스 군을 추적하는 과정과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연결한다. 나현에게 예술가의 정체성은 죽음의 이미지를 건너가는 것과 연결된다. 예술의 개별(자기)성은 죽음의 이미지와 관계하는데, 나현에게는 '실종'이 그 대역이다. '실종'은 사람과 죽음의 딱 중간에 걸쳐있다. 그리고는 시간을 따라서 천천히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죽음을 둘러싼 이미지들은 그 나름의 계보를 따라 흐르며, 그 이미지는 수많은 이미지들 가운데 가장 심층에 자리한 그리하여 명부冥府의 이미지로 수렴하다. 자기를 감히 규정하고 바라보기 위한 시도는 '죽음'을 건너가는 것이다.

나현_증언_단채널 영상

한편으로는 파리의 세느강 중간에 위치한 씨테(Cite)섬의 7개의 다리를 7명의 실종자로 전치시킨다는 발상은 정말 4차원적이었다. 씨테섬은 일종의 미학적 애매성의 자리(site)와 같다. 세느강의 남과 북의 중간에 자리한 씨테섬은 언제나 양가성(애매모호성),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가치 사이에 놓여있는 작가라는 위치의 딜레마를 비유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다는 걸까? 그런 가상의 은유를 통해 작가의 정체성도 실종된 프랑스 군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 ● 나현에게 실종이 삶과 죽음의 사이에 있다는 메타포의 관성은 곧 다리로 향하게 한다. 씨테섬의 7개의 다리, 이 우연한 7이란 숫자의 발견은 전통적인 환원의 오류라고 할 수 있는 메타포의 비약이다. 그리고 이러한 철저하게 개인적인 우연과 논리의 은유들이 나현의 이번 프로젝트를 낯설게 만든다. 이러한 낯설음이 아마도 이번 프로젝트의 자기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그것은 아주 엄숙한 농담으로 변모한다. ● 프랑스 군 실종자 찾기와 죽음의 이미지가 그 농담의 배후에 있다. 농담은 한편의 유사역사가 되고 그렇게 정체성의 죽음, 예술의 죽음. 나현에게 예술은 유사다큐멘터리로 흐른다. 요즘 회자되는 팩션(Faction)이기도 하다. '실종'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애매하게 머뭇거리듯 사실(Fact)과 가상(Fiction)의 사이에서 이상한 병치의 애매함이 나현의 프로젝트를 관통한다.

나현_실종missing_2008

3. 물과 흔적의 은유 ● 현대미술이 다루지 않는, 도대체 현대미술의 시선을 벗어난 문제들도 벗어날 곳도 어디에도 없다. 주위는 예술이란 이름을 걸고 개인들로, 세계들로 가득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에 대한 불안으로 수선스럽기도 하다. 여기저기서 예술은 죽었다거나 위기에 놓여있다는 진단을 내린다. ● 사실 예술은 죽음과 매우 가깝다. 예술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죽음과 제의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 임무에 대한 인수인계도 없이 60년간 실종된 프랑스 군인에 대한 나현의 주제설정과 수색의 과정은 남한과 북한의 수많은 실종 군인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있다는 무거운 현실의 중력을 비스듬히 벗어난다. 그의 말대로 3차원의 일상을 벗어난 4차원적인 사건으로 처리하는 과정과 같다. 그의 프로젝트는 더 이상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의 세계를 벗어나 감수성을 보여주면서 의사체험 만으로 구성된 한국전쟁이라는 그리고 실종이라는 상상의 구성체를 통해 다가간다. 동시에 타자로서의 프랑스 군, 또한 부재하는 실종자로서의 프랑스군을 규정하는 과정은 그 타자에 대립하는 '나'라는 자아의 상을 만들어 고정화시키는 효과를 초래한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향하는 과정으로서 선택된다. ●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실종은, 하루하루 전쟁과 죽음의 이미지 넘치는 시대의 실종은 더욱 비극적이다. 한국 전쟁의 경험은 현대식민주의자들이 자의적으로 그은 38선이라는 경계선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자의적 경계선에 타의에 의해 던져진 '우리'의 경험은 그러기에 비극적이다. '실종'은 죽음의 다른 말이다. 존재의 망각 또는 부재의 메타포이다. 죽음과 이웃한 실종, 아주 오래된 실종, 죽음을 향해가는 아주 더딘 과정을 사건으로서의 실종, 이미지로서의 실종으로 다룬다. 나현의 프로젝트는 한국전쟁을 가상이나 간접경험을 통해서만 내재화한 세대가 가질 수 있는 시선視線을 보여준다. 즉, 전후세대의 가상현실과 체험으로서의 전쟁과 죽음과 실종의 문제는 근대 교양소설의 내러티브를 따르듯 자아 성장의 과정인 셈이다.

나현_물위에 그림그리기_단채널 영상_2008

실종자(사자死者)는 누구인가? 구체적이며 특정한 표상에 집중한다. 전쟁, 죽음, 실종, 사자 등의 경험을 매개로 그들에 대한 상상想像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실종을 다루며, 종국에는 죽음에 가까이 가면서, 죽음에 인접한 예술이 반드시 진지한 형식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많은 작품들, 작가들, 현상들은 희로애락의 모든 것들을 그릇으로 삼아 죽음을 다루고 담아내온다. ● 나현이 방법적으로 채택한 물에 그림기라는 퍼포먼스는 세례의 과정과 함께 미국의 작가 톰 울프(Tom Wolfe)가 전한 일화를 떠올린다. 그 일화에서 가상의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이 먹는 맥주를 손에 적셔 가장 위대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 액체가 증발하면서 위대한 예술가가 만들어낸 위대한 예술은 사라져 간다. 위대한 예술은 액체를 매개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연출한다. 그러나 그 이상적 예술가와 그의 위대한 예술의 탄생과 소멸은 어느 누구도 지켜보지 못한다. ● 나현의 행위는 예술적 행위와 제의적 행위가 상호 삼투한다. 그의 작업은 전쟁의 문명과 전쟁의 기억을 다루는 제의적이고, 감각적이기 보다는 개념적이며, 역사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나현의 작업과정에 제시하는 드로잉과 그 흔적으로서의 오브제는 사실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참조(index) 이상의 의미는 아니다. 이번 전시에 연출되는 모든 것들은 어떤 기록이거나 기록과 관련된 증거물이나 참조들의 집합, 나현이 생각하는 미술로서의 텍스트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나현이 말하는 미술을 공유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주위에서 흔히 발견하는 신문기사이거나 역사 기술 또는 한편의 이야기의 전치(轉置)이다. ■ 김노암

Vol.20090104d | 나현展 / NAHYUN / 羅賢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