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정경

이준규展 / LEEJUNGYU / 李浚揆 / printing   2009_0401 ▶︎ 2009_0419

이준규_window00913_메조틴트_40×60cm_2009

초대일시_2009_040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9:00pm

갤러리 쌈지_GALLERY SSAMZIE 서울 종로구 관훈동 38번지 쌈지길(아랫길 B1) Tel. +82.2.736.0900 insa.ssamziegil.com

이준규의 판화 ● 메조틴트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 초상화 제작에 널리 사용되어졌던 대표적인 판화다. 다른 판화들에 비해 사실적이고 정교한 재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진과 비교해 봐도 비록 사진만큼 정밀하지는 않지만, 사진이 흉내 낼 수 없는 부드러운 톤이 매력이다. 사진과 메조틴트의 차이는 이렇듯 톤과 질감에서 두드러진다. 사진이 흡사 피사체를 고정시켜놓은 것 같은 매끄럽고 즉물적인 피막을 가지고 있다면, 메조틴트는 낱낱의 입자가 만져질 것 같은 촉각적인 질감이 특징이다. 흔히 메조틴트의 표면질감을 벨벳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는 상당할 정도로 로커에 의한 미세요철효과에 기인한 것이다. 이렇듯 사진이 등장한 이후에도 메조틴트의 입지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으며, 나아가 오히려 사진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 장르적 특수성이 더 두드러져 보이게 된 감마저 든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특유의 톤과 질감 탓에 가능한 일이다.

이준규_window00905_메조틴트_20×30cm_2009

여하튼 메조틴트의 특징은 이렇듯 뛰어난 재현능력과 촉각적이고 부드러운 질감에 있다. 이러한 특징은 추상적인 화면보다는 구체적인 모티브를 소재로 할 때 더 잘 드러나 보인다. 한편으로 메조틴트는 소위 검은 땀의 소산으로 불릴 만큼 집요한 끈기와 장인정신이 요구되는 만큼 다른 판화에 비해 작가 층이 두터운 편은 아니다. ● 이준규는 이렇듯 메조틴트의 단일 판종에 천착하면서 일관된 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동안 다뤄온 소재들을 보면 대략 도시적 삶의 환경에 대한 관심, 주로 한강변을 모티브로 한 자연풍경, 그리고 꽃과 같은 자연소재를 거쳐 근작에서의 창문 시리즈로 이어진다. 부연하면, 도심의 왁자한 모습 대신 변두리의 정경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현대인의 소외된 초상을 부각하는 것이 확인된다. 나아가 도심의 정경을 포착할 때도 도심의 휘황한 불빛과 그 불빛을 배경으로 서성이는 군상을 대비시켜 현대인의 공허한 일상을 강조하는 편이다. 이렇듯 일상을 재현할 때 여기에 작가의 자기 반성적 사유가 덧입혀져 어떤 서정적 정조(이를테면 공허함이나 쓸쓸함과 같은)를 불러일으킨다.

이준규_window00906_메조틴트_20×30cm_2009

작가의 판화에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이 시리즈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그 배경이나 이로부터의 특유의 정조마저 사라지지는 않은데(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되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창문 시리즈 중 골목길에 접해 있는 집들을 포착해 그린 판화들이 그렇다. 모티브로 하여금 화면을 가득 채우는 식의 풀 사이즈로 잡은 구도나, 흑과 백,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가 강조되는 편인 이 일련의 판화들에서 도심의 변두리 삶의 환경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된다. 정작 사람이 그려져 있지 않음에도 삶의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이를테면 골목 안쪽 어둠 속에서 꼬마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거나, 창문 뒤편 방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이 판화들은 작가가 일종의 부재의 미학에 대한 공감을 터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부재의 힘은 존재의 그것보다 더 강하다. 부재에 의해 암시력이 배가되고, 이때의 암시력은 관객들이 저마다의 심미적 계기를 발휘해 채워 넣어야 할 몫으로 돌려지기 때문이다(동양화의 여백 역시 이런 심미적 계기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작가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같은 사사로운 경험과 이로부터의 정조를 덧붙이는데, 이로 인해 부재와 암시는 더 강화된다. 이 판화들은 말하자면 정작 빛(존재)보다는 오히려 어둠(부재) 속에 숨어 있을 그 무엇(이를테면 유년시절의 기억이나 상실된 욕망과 같은) 때문에 비로소 특유의 정조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 빛보다는 어둠이 더 많은 것을 담아내며, 말보다는 침묵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법이다.

이준규_window00904_메조틴트_40×30cm_2009

한강변을 모티브로 한 자연풍경 역시 특유의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그 풍경은 텅 비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데, 흡사 여백 자체가 되려는 풍경, 암시 자체를 지향하는 풍경, 부재를 향해 퇴행하고 있는 풍경, 최소한의 흔적과 자취로만 남겨진 풍경, 마침내는 사라지고 말 풍경 같다. 풍경이 사라진 그 빈 자리에는 아마도 정조(정조 자체로 환원된 풍경의 흔적)만이 오롯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그 아스라한 풍경이 비록 현실적인 모티브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 그리고 꽃과 같은 자연소재를 다루고 있는 판화들은 일종의 꽃 초상화(보다 큰 범주인 사물 초상화에 아우러지는)를 보여준다. 모티브가 되는 꽃 한 두 송이를 제외한 화면 전체가 텅 비워져 있어서 모티브를 부각하고, 시선을 모티브에 집중시킨다. 전통적으로 초상화는 이처럼 맥락으로부터 떼 내어진 초상 자체의 사물성을, 대상성을 즉물적으로 강조하는 식이 아닌가. 해서, 이런 초상화의 작화방식은 불가피하게 초상 자체를 추상화시킨다(이렇게 초상은 불멸성을 획득한다). 어떤 사람, 바로 그 사람이라는 구체적 지시성에도 불구하고 그 맥락이 지워지는 것과 함께 그의 구체적 존재성마저 사라져버린다(그리고 추상화된 존재성을 덧입는다). ● 마찬가지로, 그려진 꽃 저마다의 이름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어떤 꽃, 바로 그 꽃(김춘수의 시에서와 같은 나와 의미로 맺어진 꽃)이라는 구체적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가 않는다. 말하자면 그저 꽃으로 분류되고 호명될 뿐인(이를테면 백과사전 속 삽화처럼), 꽃이 아닌 꽃의 개념(꽃의 추상)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이준규_window00903_메조틴트_40×30cm_2009

작가의 다른 판화들이 특유의 정조가 강하게 작용한다면, 이 일련의 꽃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개념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런가하면, 이때의 개념적 성향은 이중적인데, 말하자면 철저하게 개념적이지는 않다. 그림에서의 텅 빈 배경화면 자체를 올려다 본 하늘로 볼 수도 있고, 동양화에서의 여백으로 볼 수도 있고, 관객이 저마다의 심미적 계기를 작동시켜 완성해야 할 암시적인 공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처럼 철저하지 못한 개념적 성향은 이때(개념적인 작업)에조차 작가의 정조가 강하게 작용하는 탓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이중적 성격으로 인해 꽃 시리즈는 독특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 그런가하면 근작에서의 창문 시리즈는 도시적 삶의 환경을 모티브로 한 전작에서의 계기를 이어받고 변주한 것이다. 엄밀하게는 삶의 환경에 대한 관심이 (자연)풍경을 경유해, 재차 도시적 정경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온 것이다. 해서, 근작에서는 삶의 질에 대한 자기 반성적 사유(골목길 연작에서 강조된 것과 같은)보다는 상대적으로 모티브가 놓여진 정경(장소)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두드러져 보인다. 풍경(자연의 재현)과 정경(도시의 전망)과 경관(순수한 시선 혹은 객관적 시선 혹은 무관심적 시선)이 의미연관을 이루고 있는 것인 만큼 빌라와 아파트 같은 도시적 모티브를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층에는 풍경의 전형적인 문법이 오버랩 돼 있다.

이준규_window00901_메조틴트_20×30cm_2009

이처럼 도시의 정경과 자연풍경이 중첩된 경우로는 화면의 아랫부분에 건물의 옥상이나 지붕을 배치한, 그리고 화면의 대부분을 하늘로 비워 논 일련의 판화들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말하자면 화면의 아랫부분에 치우친 건물의 구획선은 사실상 전통적인 풍경화에서의 지평선이나 수평선 그리고 공지선에 해당하며, 따라서 마치 현실과 비현실을 가름하는 경계 위에 속해져 있는 것 같은 아득하고 숭고하고 초월적인 심미적 정조를 자아낸다. 그런가하면 원래 자연에 속해져 있던 이 정조가 향수로 축소되고 변질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건물의 전면을 클로즈업해 그린 화면 아래쪽에 잔디 혹은 풀을 배치한 판화들이다. 그것들(잔디 혹은 풀)은 자연으로부터 도시에 이식된 것들이기에 그 만큼 더 애틋하고, 더 절실하고, 더 사랑스럽다. 그것들은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을 상기시키고, 시뮬라크르나 기약 없는 유토피아로 남겨진 풍경을 환기시켜준다. ■ 고충환

이준규_window00902_메조틴트_20×30cm_2009

창문 이미지로 이어지는 작업의 시작은 블랙과 화이트의 면 분할로부터 시작된다. 블랙과 화이트의 경계선에서 작업이 시작 되어지는 공간에 대한 사색과 여러 이미지들의 제자리 찾기 등 작업기법에 대한 연관성에 중점을 두고 화면이 구성되어진다. 사람들의 삶의 주변 공간들,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는 회색 건축물과 회색의 벽 사이사이를 차지하고 있는 창문들 하나하나는 나의 삶과 함께 숨쉬고 이어져가는 삶의 기억들과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중요한 공간으로 대표되리라 생각한다.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물 위의 커다란 공간들 그 속에 표현되지 않은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 화면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회색의 벽들은 창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지되어 있는 듯한 건물의 모습들을 나만의 표현 방식으로 하나하나 무언가 연결 지어가고 있다. 때로는 표현 되고 때로는 표현되어지지 않은 주변 사물들에 대해 다시 한번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나타나 회색의 벽을 메우고 넓은 하늘을 채워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한 공간들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또 다른 중요한 정신으로 작업의 연속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며, 삶의 경계선에서 다시 시작될 작업 하나하나를 이어나갈 힘을 새롭게 얻어온다. 항상 무언가를 찾아 다니며 빈 공간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들을 찾아 다닐 수 있는 시간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이준규

Vol.20090403h | 이준규展 / LEEJUNGYU / 李浚揆 / pr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