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세상을 보다

안준섭展 / AHNJUNSEOP / 安準燮 / painting   2009_0410 ▶︎ 2009_0430

안준섭_흐름-삶1_캔버스에 유채_181.8×227.3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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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9:00am~06:30pm

송은갤러리_SONGEUN GALLERY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527.6282 www.songeun.or.kr

나는 안준섭의 자연을 다시 본다 ● 예술을 현실과의 관계에서 사유하는 것은 진부하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흥미진진한 일이다. 우선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가 쓴 『반 고흐,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의 다음 구절 속으로 들어가보자. "나의 믿음으로는 […] 반 고흐는 예술가란 삶의 가장 저속한 것들 속에서 신화를 연역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본다 […] 그렇다. 현실이란 모든 역사, 모든 우화, 모든 신성(神性), 모든 초현실보다 지독하게 우월하지 아니한가. 현실을 해석할 줄 아는 처분을 지닌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덧붙인다. "심지어 외부의 자연, 즉 날씨의 모습, 춘추분의 조수와 폭풍우의 모습까지도 반 고흐가 이 땅을 지나간 뒤로는 이제 더 이상 똑 같은 중력을 지닐 수 없게 되었다."

안준섭_흐름-삶2_캔버스에 유채_181.8×227.3cm_2009
안준섭_흐름-삶5_캔버스에 유채_37.3×70cm_2009

안준섭은 작가노트에서 아르토의 구절을 떠올리는 말을 한다. "나는 거친 땅에서 나와 내 주변의 삶을 느낀다. 모든 것을 상실하는 절망으로, 때론 아픈 희망으로 다가오는 그 격한 감정은 나를 다시 근원에 대한 물음으로 이끌게 한다." 일견 두 사람의 말은 비슷해 보이지 않으나, 함의는 공유되고 있다. 바로 훌륭한 예술 작품은 모든 면에서 부조리한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그것의 강렬한 전환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예술과 현실의 관계는 표현과 재료라는 주객 관계로 치환될 수 없다. 안준섭이 작업실 주변의 땅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업한 「흐름-삶5」(2009)에서 받는 첫 인상은 실재 땅에서 받는 첫 인상과는 전혀 다르다. 아직 싹이 움트지 않은 텃밭, 바로 옆 석회질의 투박함으로 덥힌 산책길을 걷다 보면 이 곳에서 돋아날 새순을 머리 속으로 그리거나 가벼운 산책을 하고 싶을 것이다. 이 때 땅은 내 욕망을 투사하는 수동적 장이 된다. 그러나 캔버스로 옮겨진 안준섭의 땅은 그와 반대로 나를 그의 땅 앞에 서게 하여, 나를 전혀 다른 나,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도록 이끈다.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의 말처럼 안준섭의 땅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놀라운 연금술의 장이다.

안준섭_흐름-삶3_캔버스에 유채_91.2×227.3cm_2009
안준섭_흐름-삶11_캔버스에 유채_각 27.3×22cm_2009

그런데 세계(현실)의 전환을 행하는 작가에게는 거대한 모순 하나가 똬리를 틀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안준섭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 즉 현실에 끝없이 좌절하고, 매번 결별을 시도하면서도 정작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나기는커녕, 어떻게 보자면 작가는 자신이 욕망하는 세계를 충분히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는 자신의 땅에서 귀양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발자크(Honore de Balzac)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은 이 모순을 설명해주는 훌륭한 알레고리다. 화가는 오랫동안 캔버스에 덧칠에 덧칠을 거듭하며 비밀 작품을 그려왔는데 정작 그 작품이 드러났을 때에는 뒤범벅된 선들 사이에서 발 하나만 달랑 보일 뿐이었다.

안준섭_흐름-삶10_캔버스에 유채_91.5×91.5cm_2009
안준섭_흐름-삶10_캔버스에 유채_91.5×91.5cm_2009

이 모순은 비단 안준섭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중엽 이래로 수많은 화가와 시인이 불편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예술적 도피를 감행했다. 이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는 "시인이 사회에 대해 파업 중인 이런 시대에 시인의 태도는 자기에게 제공될 수 있는 모든 타락한 수단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그들을 과격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말라르메는 인간 그 누구라도 현실 내부에 있고, 그 현실이 어렵고 비극적일수록 선택은 더욱 절박한 것이 된다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불가능의 가능성이라는 인간 실존의 징표는 안준섭의 붓자국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서는 성실하게 '나'라는 배역을 맡을 수 없는 작가의 분노와 서글픔이 수천, 수만 개의 붓자국으로 전이되어 캔버스를 집어삼키고 있다. ● 우리는 그러나 안준섭이 '나'라는 배역을 연출하는 하는 사람이지 이 배역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그 자신과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 바꿔 말해 나는 나인 것과 계속 이화(異化)되는 중이다. 나의 육체, 나의 정신, 나의 조건이라는 현실은 숙명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이 안준섭이 말한 '아픈 희망'의 핵심이자, 앙드레 말로가 『침묵의 소리』에서 인간 자유의 증명이 예술작품 그 자체라고 말한 이유이다. "예술은 반운명(anti-desitine)이다." ● (『반 고흐,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에서 인용한 아르토의 문구는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의 제목으로 개작되어 출간된 한국어 번역판에서 가져왔다. 아울러 이 비평문의 제목은 한글 번역서의 제목에서 차용했음을 미리 밝혀 둔다.) ■ 박대정

Vol.20090412d | 안준섭展 / AHNJUNSEOP / 安準燮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