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원展 / KIMJIWON / 金智源 / painting   2009_0413 ▶︎ 2009_0516 / 일요일 휴관

김지원_맨드라미_리넨에 유채_227×182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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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413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_Gallery Bundo 대구 중구 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김지원은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유화 및 드로잉 작품을 통해 개인과 사회, 실재와 가상의 관계를 사유하면서 명성을 쌓아왔다. 또한 그는 몇 해 전부터 「맨드라미」연작을 발표하면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극찬을 이끌어내고 있다. ● 이번에 선보이는 그림은 최근에 완성한 「맨드라미」연작과 일련의 드로잉 작품들이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맨드라미는 그가 2004년 봄에 작업실 뒷마당에 직접 심어 자라난 것들이다. 화폭에 옮겨진 그 꽃들은 초록과 붉은 빛의 대비가 선명하다. 작품은 꽃과 풀이 가진 싱싱한 향이 그림을 벗어나 전시 공간을 가득 메우는 듯한 공감각적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 앞에서 우리는 삶의 기쁨, 격정, 혼란, 고독,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을 체험한다.

김지원_맨드라미_리넨에 유채_100×100cm_2008

작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맨드라미를 동물적인 특성을 가진 식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렬한 빛을 띠며 한껏 부풀어 오른 꽃과 그 속에 담긴 무수한 씨앗은 유기체가 종족번식을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어떤 것은 번창하고 또 다른 것은 허무하게 져버리는 모습은 인간 사회의 현실과 닮아있다. 때때로 열정적이며, 무심하고, 표독하며, 농염하고, 순수하기도 한 그것은 우리들의 모습이며 또 작가 본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결국 맨드라미의 그림은 작가가 바라보는 사랑과 정치, 욕망과 종교의 관점을 모두 품고 있다. ● 아울러, 이번 전시에는 발표하지 않은 드로잉 작업도 공개한다. 작가는 그의 작업을 통해 회화가 자부해 온 예술적 엄숙함을 해체한다. 비행기나 타워 크레인 같은 대상이 가진 엄청난 속도나 높이, 무게는 그 자체가 볼거리로서 회화 예술의 알레고리이다. 작가는 거기에 사람을 엉뚱하게 그려 넣으면서 상황 자체를 유희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는 이러한 뜬금없음의 이유를 우리에게 직접 설명하지는 않는다. 뜬금없기는 맨드라미 그림이 나타내는 집요함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전시는 전혀 다른 것 같은 맨드라미와 드로잉 작업을 통해, 사실은 작가가 고집스레 하나의 예술 여정을 터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 윤규홍

김지원_맨드라미_리넨에 유채_227×182cm_2008

사물의 내부에서 해독제 찾기, 혹은 사물과 사물의 내적 질서를 동시에 포용하기1. 먼 길을 돌아 온 후, 이젠 '그림 읽기'조차 분열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김지원의 그림만 해도 그렇다. 그것들에서 어떤 이는 '회화의 위기'나 '회화의 불안'을 읽고, 어떤 이는 상반되게도 '비로소 가능해진 회화'를 읽는다. 또 다른 이는 그것들이 '그리기에 대한 리비도적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모두가 자기 식으로 지드나 프로이드를 모셔오는 이러한 '다양함'으로 인해, 어떻든 분명한 한 가지 결과는 직업적인 그림읽기가 점차 신망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 하지만 늘상 그렇게 산만한 것만은 아닌데, 예컨대 그린버그 씨(氏)에 기댄다는 불문율에선 무척 흥미로운 일치를 보인다. 김지원 읽기에 관해 앞서 언급한 몇몇 예 외에도 많은 읽기들이 '회화'보다는 '회화 자체'에 주목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같은 그림읽기는 언젠가 그린버그 씨(氏)가 칸트를 받아 말한 바 있던 '자기지시적 회화'이념을 곱씹어 온 습관이 은연중 몸에 밴 탓일 것이다.

김지원_맨드라미_리넨에 유채_227×182cm_2008

하지만, 굳이 회화 자체여야만 했을까? 즉, 여전히 김지원의 그림들이 회화 자체라는 메타-네러티브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일일까? 회화 자체의 내러티브가 회화의 내러티브들을 끝장 내온 역사를 환기한다면, 오히려 얘깃거리들이 차고 넘치는 김지원의 회화야말로 회화 자체의 내러티브를 저해하는 요인들로 가득 한 퇴행의 산물쯤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김지원의 세계에서는 미술사적 내러티브를 전망적으로 거론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소문자로 시작되는 작고 예민하며 마음을 끄는 이야기들에 주목하는 것이 더 의미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지원은 바닥에 털석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내리는 자신을 드로잉한 다음, 얼굴 옆에 '나약함, 나약한'이라고 적고 있다. 작가의 고단한 삶의 윤곽이 선명하게 설정된다. 그 대각선방향으로 아래쪽에 배치된 또 다른 드로잉엔 밥통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누렁이 한 마리와 '욕심을 극도로 죽이는 법' 이란 문구가 눈에 띤다. 그뿐인가. 그는 자신의 그림 안에서 거인국의 이방인처럼 주눅들어 있고, 그림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기 일쑤다. 반면 하찮아 보이는 정물들은 거대하게 클로즈업되곤 했다. 나는 그가 그림의 구석, 혹은 구석을 그린 그림에 깊이 애착해오는 것을 이와 같은 자전적 맥락에서 지켜보아왔다. 또 김지원은 하필이면 왜 그토록 '막힌 벽'과 오갈 데 없는 시선의 교착을 그려야 했을까? ● 김지원은 그림 안에서나 밖에서 끊임없이 억눌리고, 갇히고, 왜소해지고, 추방되고 소외된다. 이 정도면 회화의 불안 이상으로 김지원의 불안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회화의 콤플렉스가 아니라, 회화하는 주체의 그것을 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에서 김지원 회화를 훨씬 더 내밀하게 읽는 것이 가능해지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가 단지 '여전히 건재한 회화'를 입증하기 위해 그 많은 고백들을 동원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 김지원의 회화들은 회화 자체를 담론화하는 거대 내러티브의 종말 '이후'의 사건이다.

김지원_맨드라미_리넨에 유채_73×61cm_2006

2. 지난 3,4 년 이래 김지원은 마치 맨드라미 화가 같다. 한 여름 흐드러지게 피었던 때부터 처연히 속살을 드러낸 겨울 초입에 이르기까지, 김지원은 맨드라미가 가득한 정원 밖으로 나올 줄을 모른다. 그리고 마치 한 해의 유일한 수확인 것처럼, 여름을 난 그의 아틀리에는 온통 맨드라미를 그린 캔버스들로 가득하다. 그의 관념만큼이나 신체도 맨드라미들로 덮여있다. 맨드라미의 진한 레드핑크 빛을 사랑하고, 그것의 꿈틀거리는 생(生)에 경탄한다. 작가는 맨드라미에 깊이 빠져있다. 회화는 이런 감정들을 추스르고 하나로 엮는, 작가에겐 유일하게 가능한 해결책이다. ● 김지원에게 맨드라미는 시선의 욕망에 부응하는 관상용이 아니다. 작가는 맨드라미가 꽃잎을 내는 방식, 그 꽃잎의 격한 구불거림에서 느꺼운 동물의 신체를 느낀다. 그리고 그토록 활기차게 살고 처절하게 죽어가는, 생의 그 고유한 방식에 감탄한다. 여름 내내 이글거리다 이내 무너지듯 녹아내리는 색과 형태의 그 격렬한 소멸과정이야말로 그럭저럭 한 생을 살다가 가는 우리의 것들보다 훨씬 더 극적이라는 게 김지원의 관점이다. 그는 맨드라미를 막힌 담과 파손되고 버려진 인형 위에서도 건재한 것으로 그림으로써,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경의를 표한다. ● 맨드라미를 그토록 살아있게 하는 어떤 내재하는 질서, 일테면 '생(生)의 의지'같은, 아니면 '생의 도약이 극적으로 입증되는 순간들', 바로 이것이 김지원이 포착하고 싶어하는 바다. 이로 인해 김지원이 그린 맨드라미는 색과 형태의 성실한 재현인 동시에 그 이상인 것이 된다. 그의 터치들은 맨드라미의 육감적인 꽃잎에 충실하면서도 그 자체로 춤추듯 활력이 넘치고 변화무쌍하다. 맨드라미를 둘러싼 또 다른 풀들의 단속적이고 예리하며 임의로 교차하는 숱한 터치들은 맑은 날 정원의 한갓진 일과의 묘사이기도 하고, 부산스럽고 충만한 생의 징후들에 대한 예민한 포착이기도 하다. 그것들의 색 또한 재현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다. 따라서 작가의 그림들은 분명 맨드라미 정원의 재현이면서, 또한 생의 극적인 입증들의 상징적 수집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김지원의 회화는 재현적 묘사와 내적 표출의 포착 사이의 섬세한 갈등에 의해 조율되고 있다.

김지원_무제_종이에 펜, 과슈_60×45cm_2007

노년의 램브란트가 그랬고, 에공 쉴러나 코코슈카도 그랬다. 물론 김지원의 것이 그것들보다 훨씬 가볍고 경쾌하긴 하지만, 반 고흐와 뭉크도 이 계열에 동반할 수 있다. 이 사랑스러운 화가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마주했던 것들이 무엇이건-사물이건 관념이건, 사건이건 추상이건- 그것들에 지독하게 충실했으며, 결국 그것들의 어느 한 부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충실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1650년경부터 램브란트는 모델의 외양을 거의 무시하는 수준에 도달했고, 1917년경의 코코슈카는 대상을 오로지 내적 에너지의 단위들인 붓터치들로 분해하기에 이르렀다. 또 그렇게 쉴러도 모델의 내면에 깊이 박힌 우울을 불안스럽게 흔들리는 터치들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이 화가들이 동일하게 깨달은 것은 어떤 대상이건 그것엔 관찰자를 걸어 넘어뜨리는 독(毒)이 있다는 사실이다. ● 언젠가 코코슈카는 자아의 해독을 위해 보다 내면의 심상에 몰입할 것을 권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사물의 해독을 위해 사물의 내면에서 백신을 찾아내는 것 같은 어떤 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지원이 그린 맨드라미에서도 이같은 행간이 읽혀진다. 그것들 역시 맨드라미로부터 출발했지만, 결국 여름 내내 맨드라미를 타오르게 했던 그 기적적인 생의 의지에 더 방점이 찍힌, 그같은 맨드라미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원_무제_종이에 펜, 과슈_45×50cm_2008

3. 하여 김지원의 맨드라미는 보여지는 그대로의 맨드라미인 동시에 결코 그렇게 보여지지 않았던 맨드라미이기도 한 것이다. 사물의 양면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는 그림을 대하는 김지원의 근원적인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사실 작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는 것/그리는 것에 가려지는 것들', '그려진 것/그려진 것에 가려진 것'을 동시에 포용해 왔고, 그것은 때로 '자신이 그리는 것'과 '그리는 자신'을 통시적으로 인식하려는 시도로 확장되었다. 이때 그림은 사물과 사물의 내적질서를 동시에 수용하는 창고인 동시에, 그 사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주체가 드러나는 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캔버스는 사이의 공간, 간주관(間主觀)적 인식의 장으로 설정된다. 즉, 대상과 인식된 대상, 그리고 인식하는 주체가 한 데 뒤섞이는 일종의 교차로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의 「그림의 시작-구석에서」 연작을 보자. 그림 안에는 또 다른 그림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인식된 것과 인식되고 있는 것 사이의 간공간(間空間)을 암시한다. 이 인식된 것과 인식되는 것 사이에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자신 역시 그러나 이번엔 그림에 의해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다층적인 인식공간 안에서 그림과 주체, 객관과 주관은 상호간섭적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그리는 동시에 그려지고, 그림은 인식되는 동시에 인식한다. 나는 작가가 구석을 선호해왔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일 것으로 이해한다. 구석이야말로 두 개의 벽과 바닥이 상호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 결국 하나의 세계와 그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간주관(間主觀)을 보다 통합적인 하나의 전망 안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 맨드라미와 그것의 내적 속성과 그 둘 사이를 오가는 인식을 하나의 공간에 함축시키는 것, 이것야말로 김지원의 회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미학적 사유일 것이다. ■ 심상용

Vol.20090413a | 김지원展 / KIMJIWON / 金智源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