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am I, Who you are

양소정展 / YANGSOJEONG / 梁小汀 / painting   2009_0416 ▶︎ 2009_0516 / 일요일 휴관

양소정_The Time I want to go back to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오일스틱_162.2×130cm_2008

초대일시_2009_0416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로프트-H_GALLERY loft-H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51-87번지 크레오 빌딩 1F~B1 Tel. +82.2.567.6070

심연 속에서 길어낸 우호적이고 잔혹한 이미지 ● 나, 자아, 주체, 에고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를 나는 어떻게 거머쥘 수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 경험하고 실감할 수 있는가. 나는 나인가. 그런데 그 나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몸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몸일 수는 없다. 몸은 존재가 거하는 집이며, 따라서 진정한 나란 존재며 관념이 아닌가(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 혹은 존재 자체를 구별한다). 그런데 그 관념은 나 자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나의 관념이란 사실은 타자로부터 건너온 것, 이를테면 관습과 환경의 부산물이다. 해서, 나는 타자다. 나는 타자와의 긴밀한 상호작용의, 상호영향사의 부산물이다. 상식과 합리, 선입견과 편견, 이념과 신념이 타자의 외연을 형성한다면, 억압된 욕망과 무의식, 몽상과 환상, 그리고 존재론적 상처가 그 내연에 포진한다. ● 그런가하면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에다가 비유한다. 몸 역시 존재의 집이다. 언어와 몸의 이런 상동성에 근거해 유추해 보건데 그 언어는 사실은 몸의 언어며 무의식의 언어다. 몸은 곧 존재의 집이며 동시에 언어의 집이기도 한 것이다. 몸은 표정으로써 말을 하는데, 그 발화형식은 보통 언어의 발화형식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대개는 잠재돼 있거나 억압돼 있어서 바깥으로 잘 드러나 보이지가 않는다. 해서, 자크 라캉은 나는 나의 말 속에 들어 있지 않으며, 언제나 실제로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고 했다. 의식과 함께 무의식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의식적인 나와 무의식적인 나로 분리된다. 의식적인 나와 무의식적인 나는 서로 부합하기도 하고 상충하기도 한다.

양소정_C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오일스틱_145.5×97cm_2008

양소정의 그림은 이런 존재론적 자의식에서 시작된다. 나는 누구인가를 캐묻고 추적해가는 그 과정에서 나는 무의식적이고 잠재의식적인 층위에 은폐되어져 있는 존재임이 드러나고, 그 존재는 꿈과 판타지가 열어 보이는 어떤 의외의 비전과 더불어 암시되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완전한 기억이 복원해낸 온갖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불완전한 조합임이 밝혀진다. 이를 통해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한 전형을 예시해준다. ● 양소정의 모든 그림에는 검은 평면의 실루엣 형상이 등장한다. 판화의 스텐실 기법을 도입해 찍어낸 이 이미지는 텅 빈 배경화면과 함께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평면성을 강화해준다. 유기체처럼 흐르는 그 형상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응집돼 있다가, 이후 근작으로 오면서는 점차 그 흐르는 강도가 강해져서 분절되고 해체되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 실루엣은 무엇인가. 작가의 무의식이다. 실루엣이 온통 검은 것은 무의식이 비록 작가 자신에게 속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다(자기소외?). 그 언어는 침묵 속에 잠겨져 있다. 미처 발화되지 못한, 언어화되지 못한 말의 씨알들이 잠겨진 늪 같고 꿈같고 잠 같다. 의식의 지향호(작가의 관념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 쟁여져 있는 일종의 의식의 창고 같은)이며 기억의 섬이기도 한 그 실루엣 속으로 작가는 빠져든다. 작가는 그 경험을 "무한 속으로 빠져 든다"고 한다. 이렇게 실루엣 속으로 팔이 잠긴다. 심지어 작가는 무슨 방이나 되는 양 신발까지 가지런히 벗어 놓은 채 실루엣 속으로 잠수한다.

양소정_B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오일스틱_130.3×193.9cm_2008

무한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의 인식구조는 유한한 세계에 맞춰져 있다(관성?). 해서, 무한 속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인식구조가 지각변동과 함께 변환되는 것을 의미하며, 유한한 세계질서가 해체되고 재구조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가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이 우연하게 만나지고, 전에 없던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다. 사물의 전치를 통해 예기치 못한 새로운 비전이 열리고, 새로운 세계가 개시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매트리스 위의 분절된 신체와 무슨 고대 석상을 본 떠 만든 것 같은 잉크병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수술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대의 우연한 만남과 같은 초현실주의의 비전이 열리는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의 그림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은 온갖 형태의 이질적인 사물들 간의 우연한 조합이나 새로운 관계형성 그리고 그것이 열어 보이는 예기치 못한 비전은 다 이런 사물의 전치가 다변화된 것이다.

양소정_Ca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오일스틱_162.2×130cm_2008

사물의 이런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결합과 함께 무한한 세계가 열어 보이는 또 다른 비전으로는 변태를 들 수 있다. 스탠드 갓이 꽃잎으로 변태되고, 새장의 창살이 뼈로 변형되는가 하면, 화분 같기도 하고 목둘레 장식 같기도 하고 아이스크림 캡 같기도 한 온갖 이질적인 형태들이 그 경계를 허물어 삼투된다. 사물간의 새로운 관계나 하나의 사물로부터 다른 사물로의 자유로운 이행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을 떠올리게 하며, 연상 작용에 바탕을 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서사를 불러일으킨다. ● 그런가하면 매트리스 사이로 흘러넘치는 무슨 심연 같기도 한 무의식은 그 비전이 다름 아닌 잠이나 꿈과 연동된 것임을 말해준다. 잠은 인간의 의식이 이완되는 순간이며, 그 느슨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꿈은 비록 불완전한 기억으로 인해 그대로를 복원하거나 재생할 수는 없지만(일종의 심리적인 검열 장치가 복원과 재생을 방해하기도 한다), 현실보다 더 생생한 비전으로써 그 자체 자족적인 또 다른 한 현실을 열어 놓는다(시뮬라시옹의 원전 격에 해당하는 장자몽 즉 나비와 장자가 서로 헷갈리는 경험은 이런 비전과 무관하지가 않다).

양소정_Lost contro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오일스틱_130.3×193.9cm_2009

검은 실루엣 형상과 함께, 명상에 잠긴 듯 눈이 감겨진 두상(오일스틱에 의한 표면질감이 붓으로 그린 다른 이미지들과 대비되는)이나 새장 역시 무의식을 암시한다. 여기서 감긴 눈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 외부가 아닌, 내면의 무의식을 향한다. 그 머리는 무슨 생각의 나무나 되는 것처럼 그 아래로는 뿌리를 드리우고, 위쪽으로는 생각의 다발들을 풀어낸다. 그림에 보이는 형상들은 말하자면 그 머리로부터 뿜어져 나온 여러 이질적인 생각의 편린들인 것이다. 그 생각의 조각들이 때로는 식물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고, 더러는 분절된 신체나 뼈 그리고 장기와 같은 신체 이미지를 닮았다. 이와 함께 일종의 나무가 변형된 사슴 뿔 형상이 주체의 이상을 암시한다. 나아가 이런 유기적 이미지가 스탠드나 유리장식 등 각종 레디메이드와 같은 무기적 형상과 결합하며, 상호 변태되고 이행한다. 그리고 새장은 자기정체성과 연동된 대표적인 메타포로서, 특히 무의식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즉 새장은 외부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면서, 동시에 가두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와 동떨어져 자기 속에 안주하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고립과 격리와 소외만큼은 피하고 싶은 마음을 표상한 것이다.

양소정_can't do anyth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오일스틱_116.8×80.3cm_2009

그런가하면 근작에선 일종의 잠재적인 폭력성이 감지된다. 조각들로 분절된 신체나 단면을 드러내며 잘려진 다리들, 그리고 모르긴 해도 그 신체를 잘랐을 칼들, 무슨 짐승의 이빨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유기적 형상이 내면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암시해준다. 무의식은 잠처럼 달콤하기도 하고, 꿈처럼 다른 세계에 빠져들게도 하지만, 때론 이처럼 잔혹한 본성과 맞닥트리게도 한다. 그러나 이런 본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림 자체는 결코 살벌하지가 않다. 파스텔 색조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색감과 질감이 이 본성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양소정이 그린 이 일련의 그림들은 흡사 작가 자신의 꿈을 보는 것 같다. 그 꿈이 더러는 악몽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 이면의 색이 비쳐 보일 듯 투명하고 맑은 색감으로 부드럽게 감싼다(작가는 이 색감을 위해 엷은 물감을 여러 번에 걸쳐 수차례 덧바른다). 이로써 기꺼이 꿈과 무의식, 심연과 무한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 고충환

Vol.20090419f | 양소정展 / YANGSOJEONG / 梁小汀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