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일기 afternoon diary

장형근展 / JANGHYOUNGKEUN / 張亨根 / sculpture   2009_0422 ▶︎ 2009_0428

장형근_오후네시삼십분_스테인레스스틸, 아크릴_60×240×15cm_2009

초대일시_2009_042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www.artspace-hyun.co.kr

그림자 인간, 존재의 상실감과 욕망의 표상 ● 발화된 말뿐만 아니라 미처 발화되지 못한 무수한 말들이 있다. 무의식(자크 라캉)이 그렇고, 뒷모습(미셀 투르니에)이 그렇고, 침묵(막스 피카르트)이 그렇다.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하면서 정작 무의식은 너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발화된 말이 상황논리에 의존하는 것에 비해 무의식은 거침이 없다. 더 솔직하다. 아이러니 화법은 그 극단적인 경우를 보여준다. 나는 나의 말 속에 들어있지 않다거나, 나는 언제나 실제로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는 자크 라캉의 말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결국 겉말(의식의 말)보다 속말(무의식의 말)이 더 본질적이다. ● 그런가하면 작게 웅크린 몸이나 쳐진 어깨의 뒷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인다. 그 몸은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무수한 말들을 들려준다. 전면이 의식의 말이라면, 뒷모습은 몸으로 말을 한다. 그리고 진정한 소통이란 몸의 언어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침묵은 어떤가. 마임은 몸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 언어(잠재적인 언어)는 남용되고 오용된 나머지 닳고 닳은 언어(통속화된 언어)의 지나치게 얇아진 두께를 복원시켜주고, 그 세속화를 막아 구제해준다. 그 언어는 미처 의미화를 얻지 못한 잠재적인 언어이며 속말이며 독백이다.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은 독백은 쓸쓸하다. 대상이 없는데 말을 한다는 것, 자기를 대상으로 말을 한다는 것, 자기와 투명하게 직면한다는 것은 쓸쓸하고 끔찍하고 고고하다. 그림자 또한 그러하다. 일부 회화와 설치미술을 제외하면, 정통조각에서 그림자를 형상화한 예는 찾아보기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그림자 자체가 그림처럼 평면의 실루엣으로 현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을 하는 그림자 즉 어떤 의미를 암시하는 그림자는 조형예술에 있어서 아직은 미답지이며, 그렇기에 더 많은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장형근의 조각에는 흔히 볼 법한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 형상화돼 있다. 자전거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 체신부아저씨, 전기수리공, 리어카 곁에 서 있는 남루한 차림의 노숙자, 유모차를 끌고 있는 임산부 등 이들은 하나같이 보통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변해준다. 다시 말해, 특정의 인체와 더불어 그에 딸린 부수물이 계급적으로건 성분상으로건 매치가 돼 있는 것이다(그 자체 일종의 문화 계급론으로까지 확대 해석될 수 있는). 노숙자와 리어카, 임산부와 유모차. 그 대응방식이 너무 상식적이고 일반적이어서 이렇다 할 이목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공감을 자아낸다. 나와 그들이 같은 일상의 자장에 속해져 있다는 일종의 동류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장형근_해거름_철_181×120×80cm_2009
장형근_비오는날 오후다섯시_철, 스테인레스스틸_130×78×50cm_2009

이처럼 작가의 조각은 지극히 평범하고 세속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새삼스레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일상에 대한 반전이나 전복으로 볼 만한 일종의 낯설게 하기(아방가르드의 주요 전략인)가 꾀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작업은 구상조각의 전형적인 형식이 그렇듯 환조(사방에서의 관조가 가능한)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가장자리 선이 연상시키는 형태를 제외하면 온통 낯설다. 그 이유는 형태를 최소한의 실루엣 형상으로만 환원시켜놓고 있기 때문이다. 실루엣 즉 그림자는 형태의 볼륨을 제거해서 편평한 평면으로 전이시키면서, 더욱이 형태의 세부마저 지워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이렇듯 작가는 형태를 그림자로 형상화시킴으로써 일상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하게 하며 상식의 지평을 흔들어놓는다. 왜 그림자인가. 처음에 그림자는 의미론적이고 상징적인 층위에서보다는 자연현상에서 먼저 착상된 것이며, 이것이 점차 의미론적인 측면으로까지 확대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오후일기」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오후의 특정 시간대에 채집된 사람과 사물의 그림자를 의미하기도 하고(일종의 왜곡시점을 적용해 실제보다 길게 늘여지거나 압축돼 보이는 그림자에 의해 뒷받침되는), 그 그림자들로 상징되는 일상의 단면을 암시하기도 한다.

장형근_모레글피_철_180×120×80cm2009

그런데 그 그림자(실루엣 형상)는 또 다른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림자로 축약된 형상이 자연현상이 만들어준 본래의 그림자를 밟고 있다. 이로부터 그림자의 그림자라는 어떤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마치 누워있는 그림자와 서 있는 그림자가 서로 대비되거나 대면하는 것 같다. 적어도 의식적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쳐다보는 경우는 드문데, 작가는 이로써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하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비록 색채와 두께에 일정한 차이를 두어 그림자와 이를 대면하는 또 다른 그림자를 구분해놓고는 있지만, 그 경계가 그렇게 투명한 것은 아니다. 볼륨을 박탈당한 채 평면으로 환원된 형태나, 이와 마찬가지로 한갓 실루엣으로 축약된 사람들이 개체성을 상실한 채 익명적 주체로 거듭나는가 하면, 그림자의 그림자가 아이러니를 발생시키고 있다. ● 이 일련의 형상들이 마치 허깨비 같다. 실제로 이따금씩 자신을 허깨비(그림자)처럼 느낄 때가 있는데,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공허한 틈새를 파고든다. 오후의 강렬한 햇살로 늘어질 때, 의식의 강도가 느슨해질 때, 최소한의 존재감마저도 느낄 수 없을 때 일상은 온통 비현실적이 되고, 허깨비가 되고, 그림자로 둔갑한다. 이렇게 그림자 인간들의 얇은 두께는 존재론적 상실감을 암시하며, 그들이 연기해 보이는 일상은 밋밋하고 윤기가 없다. 그 정경이 세팅된 연극무대를 보는 것 같고, 일종의 서사구조(공허한 일상을 주제로 한)에 의해 지지되는 상황조각을 연상케 한다. 그 상황이 특별할 것도 주목을 끌 만한 것도 없는 평범한 것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쉽게 공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무엇보다도 일상 자체와 대면하게 해준다. 일상과 일상 자체는 다르다. 그림자는 일상 자체의 층위에 속하며, 일상을 낯설게 하기 위해 동원된 극적 장치이다. 이로써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그림자 인간은 존재감(볼륨)을 상실한 현대인의 공허한 초상처럼 읽힌다.

장형근_아침내_철_166×120×80cm_2009

이외에 장형근의 조각은 정통적인 방법 그대로 제작한 온전한 형태의 환조 형상을 띠기도 한다. 각각 소녀와 중년 남성으로서 그들 뒤편으로는 각자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모델과 그림자가 일치하지가 않는다. 다소곳하게 서 있는 소녀가 한눈에도 섹시해 보이는 포즈의 그림자와 대응하는가 하면, 다소간 지쳐 보이는 몰골의 남자는 정작 카리스마 넘치는 포즈의 그림자와 매치돼 있다. 여기서 그림자는 현실 그대로의 반영물이 아니라 욕망이 투사된 것이다. 현실의 자장에 속해져 있는 모델과 정반대의 그림자를 대비시켜 현실과 욕망간의 차이를 표현하고, 현실과 이상간의 괴리감을 극화한 것이다. ● 이로써 장형근은 그림자로 환원된 인간군상을 통해 현대인의 공허한 초상을 그려내며, 실체와 허상이 전도된 현실인식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자에 욕망을 투사하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속한 그림자가 자기로부터 분리될 수도 있고, 나아가 자기와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거나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형식적으론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조각, 매스를 결여한 조각, 회화적인 조각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 고충환

장형근_반전-시점_철_275×280×120cm_2008
장형근_어제모레_철_175×130×95cm_2009

사람들은 저마다의 바쁜 일상 속에서 살아간다. 쳇바퀴 돌아가듯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일상에 갇혀 살며 주변의 어떤 다른 이들에게 조금의 여유를 선사하지 못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많은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일과를 위해 살아가고 쉼 없이 숨 쉬고 있다. 나의 작품에서 보듯 우리가 쉽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님, 항상 가장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이야기를 실제도 아닌 또한 허상자체도 아닌 새로운 왜곡된 시점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작품에 소재는 우연히 전신주의 그림자를 보는 것에서 출발되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물인 전신주는 자신의 역할을 하기위해 그 위치에 항시 서 있다. 우리는 전신주의 기능적인 역할을 알고 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환경이라는 생각 때문에 새로운 시각과 감정으로 보이기는 힘들다. 전신주의 그림자를 보면서 조형적 의미의 재미도 있었지만 일상에 파묻혀 있는 그림자가 실체와 그림자의 역할을 역전시킨다면 일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의 의미로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을 모태로 나의 작업은 시작이 되었다. 우선적인 모형작업으로 오후 4시 경에 늘어진 자전거의 그림자 형태를 가지고 점층적인 효과를 표현하기위해 그림자를 붙이고 덧붙이는 과정을 통해 시점에서 산란적인 효과를 주고 형태에서 입체감을 주었다. 그래서 아크릴판에 스테인리스 스틸로 작업을 한 자전거, 「오후 네 시 삼십분」이라는 작업을 시초로 나머지 작업들이 펼쳐지게 되었다. 제목과 똑같이 사진으로 그림자의 실물을 찍은 시각이 우연히 오후 4시 30분이었다. 「오후 네 시 삼십분」에서는 사물만이 나타나지만 그 후의 작업에서는 인체와 사물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인체구상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인체의 사실적 표현과 형태적 외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고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의 인체구상작업은 연극적 효과를 이용하여 작업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형상과 오브제, 형상의 중첩 등을 이용하여 극적인 효과를 이용한 테마가 있는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인체와 사물로 연관된 지금의 작업들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자전거와 뚱뚱한 남자, 우체부와 오토바이, 리어카와 노숙자, 유모차와 임산부, 전신주와 전기수리공 등들에서 보는 거와 같이 인체와 사물의 등장으로 작품 하나하나의 이야깃거리를 가지게 표현하였다. 여기서 이야깃거리는 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관객들로 하여금 관객 스스로의 이야기를 연상하며 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가 볼 수 있는 시각은 한정되어있고 관객들의 시각은 항시 열려있다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만드는 사람이지 판단과 느낌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림자를 통해 그림자와 실제의 역전으로 실제와 허상을 반전시키고 형상에 두께를 없애고, 외곽의 중첩을 통해 그림자의 허상을 보이게 하였다. 그림자의 형태적 왜곡은 허상이란 이미지를 없애고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림자의 외곽이미지는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께를 주는 일이 허상에서 실제로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작품들의 의미는 매일 보고 지나치는 풍경을 다시금 그림자의 형태를 빌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연민, 동정, 동경 등의 여러 감정을 끄집어내어 우리의 일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의 의미이다. 나에게 감정에 변화, 동경이라는 말은 참으로 멀게만 느껴질 때도 있다. 학부시절 작업은 현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보이겠지만 반대로 자유에 대한 열망, 동경 이런 것도 포함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림자 작업도 일상에 보인 시각적 의미가 클 수 있겠지만 감전의 변화를 우선시 하고 싶다. 내가 느낀 것도 있지만 그들 관객입장에서도 다른 감정으로 느끼지 않을까 한다. ● 작업과정에서는 실루엣의 왜곡, 레이저 커팅과 두께를 줄 수 있는 방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두께를 얇은 판재를 이용하여 붙여 쌓아올린다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얇은 판재를 자르고 휘고, 쌓아올리는 과정을 통해 그림자의 허상을 실제와 가깝게 만드는 과정에서 재단하고 굴곡을 맞추고 다시 붙이고 갈아내고 하는 작업들은 시간과 꼭 다투어 경쟁하는 듯 하다. 이런 일련의 힘든 과정들이 허상에 감정을 넣고 허상에게 실제에 탈을 쓰게 하는 과정이다. ● 다른 소품작업에서는 실제와 허상의 관계를 사실적인 인체는 괴로움, 고독, 외로움 등의 사회적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뒤에 보이는 그림자 즉, 허상은 인체의 외형적 느낌과는 다르게 활기차고 당당한 내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 되었다. 실제의 사람은 10대 소녀와 40~50대 중년 남성이다. 그들의 사회 속 모습과 내면의 다른 모습이 그림자가 되어 생각하고 바라고 동경하는 그림자로 내면을 왜곡된 그림자 속에 표현하고 싶었다. 이런 작업들의 중심축은 나의 얘기가 아닌 보는 이로 하여금 판단되어지는 감정의 변화들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회상을 할 수도 있고 마음의 연민, 따뜻함, 동정, 동경 등의 심경을 느낄 수 있다면 관객들과 한걸음 더 다가가 소통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 나에게 소통은 재미만을 주는 소통, 참여를 하는 소통 이런 것들이 아닌 감정을 자아낼 수 있는 소통이다. 나를 중간적 매개체로 작품과 관객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나 자신은 방대한 감정들을 하나하나의 감정으로 정리하여 보여주는 매개체로의 일을 할 뿐이다. 전시제목에서 「오후 일기」는 나로 하여금 써지는 일기가 아닌 오후의 일상들이 쓰는 일기이다. 즉, 오후라는 시간 속에 수많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기인 것이다. ● 나는 구상조각가가 되고 싶다. 지금의 모습은 단순히 표현에 있어 금속이라는 재료를 쓰게 되었지만 금속조각가가 아닌 구상조각가로 보이고 싶다. 구상은 보인 인체를 탐구하고 다시 곱씹어 보며 붙이고 자르고 정리하는 하나의 과정들이 이번 작업엔 흙이 아닌 금속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 장형근

Vol.20090422b | 장형근展 / JANGHYOUNGKEUN / 張亨根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