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락展 / YOONBYUNGROCK / 尹秉洛 / painting   2009_0508 ▶ 2009_0530

윤병락_Green apple_캔버스에 유채_223×221cm_2009

초대일시_2009_050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리안갤러리_LEEAHN GALLERY 경남 창원시 상남동 78-2번지 현대증권빌딩 4층 Tel. +82.55.287.2203 www.leeahngallery.com

사과, 풍요로부터 욕망으로 ● 사과그림으로 현대미술사에 이름을 등재한 사람이 세잔이다. 세잔이 그린 사과는 보통의 사과그림과의 뚜렷한 차이로 인해 모더니즘 서사를 연 미술사적 사건이다. 그의 사과는 아카데미즘에서처럼 재현적이지도, 바니타스 정물화에서처럼 상징적이지도 않다. 구조적이다. 변화무상한 세계의 표면현상에 천착한 인상파에 대한 안티테제로부터 시작된 그 사과그림은 변하지 않는 사과의 본질과 구조를 그린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자와 존재 혹은 존재 자체를 구별한 것처럼 사과와 사과 자체는 다르다. 사과는 사과로 알려진 지식이며 이념이며 이름이며 합리며 상식이며 편견이며 관성이다. 사물과 세계와 대상의 표면에 이념이라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 휘장을 찢고 보면 마침내 사과 자체가 보인다. 사과가 아닌 사과 자체를 직면하기 위해 일종의 현상학적 에포케를 수행한 것이다. 이미 알려진 사실의 프리즘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생전 처음으로 사과를 보듯 사과를 보면 사과는 당연히 낯선 구조와 생경한 형태로만 오롯해진다. 이렇게 세잔은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리고 구조주의와 아방가르드의 소격효과 혹은 소외효과를 선취한다. ● 그림이란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지워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낯설고 생경한 세계 자체와 맞닥트리는 사건이다. 세잔의 그림은 이처럼 사과 자체와, 세계 자체와 맞닥트리게 해준다. 세잔의 사과는 이를 그린 자에게나 보는 자에게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는 대상이 아니다. 금욕적일 만큼 무표정하고 무미건조하고 중성적인 인식론적 대상이다. 정물이란 말 속엔 죽음이 들어있다. 죽은 사물을 죽은 사물답게 그리는 것, 죽음을 고정시키는 것, 잠정적으로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 사물을 사물이 처음으로 유래한 죽음과 침묵 속으로 되돌려놓는 것, 모든 의미가 지워진 상태에서 새로운 의미가 시작되게 하는 것을 세잔의 사과는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윤병락_가을향기_한지에 유채_82×169.5cm_2009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를 일이나 윤병락은 사과작가로 알려져 있다. 윤병락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일종의 레테르인 셈이다. 레테르 즉 상표는 이중적이다. 작가의 컬러를 뚜렷하게 부각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부각된 강도만큼 선입견의 틀 또한 공고하게 한다. 결국 그 틀을 깨는 것이 과제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그 틀을 깨는 방법은 세잔처럼 예사롭지 않은 사과, 하나의 세계와 등가를 이루는 사과를 그리면 된다. 그런데, 그 일이 쉬운 일인가. 감히 세잔에 비유할 수야 없겠지만, 당연하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로 고심해왔고, 그 흔적 또한 확인된다. ● 윤병락의 사과그림은 즉물성, 현존성, 사물성을 견지하고 있다. 회화가 한갓 일루전이기를 포기하고, 혹은 일루전을 넘어서 현실을 넘보고 현실과 겨루는 것이다. 그 겨룸은 말할 것도 없이 우선, 닮은꼴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닮은꼴이 여전히 정형화된 사각의 프레임 속에서의 닮은꼴이라면, 더욱이 현실과 그림을 격리시키는 제도적 장치인 벽 위에 걸리는 것이라면 현실과 그림의 구분은 여전히 공고할 수밖에 없다. 벽 위에 걸린 그림을 여전히 일루전으로, 즉 현실세계와 연장된 창으로 경험하기에는 시각이 그 관습(그림을 벽 위에 거는)에 지나치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해서, 찾아낸 묘안이 부감법이다. 적어도 시각 현상으로 볼 때, 위에서 내려다보고 그린 그림을 벽에다 걸면 마치 사과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다분히 그림을 효율적으로 그리기 위한 방편으로서 착안된 것이지만, 여하튼 그 이면에는 시각의 관성을 흔들어놓는 위반이 있다. 그리고 사물을 꽉 차게 그리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가 않은데, 그 경우에 사물은 그림으로서보다는 현실의 연장처럼 보인다. 또한 작가의 그림은 대개 실물보다 큰 사이즈로 그려져 있는데, 그렇게 확대된 사이즈가 아니라면, 그 실체가 손에 만져질 것 같은 핍진성이나 더욱이 그림자마저 가세해 영락없는 실물성을 감지케 한다.

윤병락_녹색 위의 붉은 사과_한지에 유채_111×244cm_2009

이러한 모색의 계기들이 결부되어져서 즉물성, 현존성, 사물성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세이프트캔버스 즉 변형캔버스다. 변형캔버스란 용어가 대략 정형의 사각형 프레임이 아닌 비정형 캔버스를 의미하지만, 사실 그 엄밀한 용법으로는 사물의 가장자리 선과 일치하는 프레임을 말한다. 해서, 사물의 형태와 프레임의 형태가 일치하고, 재현된 이미지가 속해져 있는 자장과 현실의 자장과의 경계가 서로 연장되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프랭크 스텔라의 띠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림과 프레임이 일치하는 그의 띠 그림은 마치 실제의 액자 틀이 중첩된 것 같은, 실물의 액자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스텔라 쪽에서 보면 내심 착각 정도가 아니라 사물 자체인 그림, 사물과 최소한의 구별도 없는 그림, 마침내 사물이 된 그림을 겨냥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림(일루전)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사물(현실) 자체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를 지시하기 위해 고안된 말이 리터털 오브제, 즉 문자 그대로의 오브제란 말이다. 루치오 폰타나가 캔버스를 칼로 찢어 허구의 공간과 현실의 자장을 연장시킨 것이나, 쉬포르쉬르파스 작가들이 캔버스 천을 프레임으로부터 떼어내 바닥에 깔거나 벽에 못을 쳐 거는 행위도 알고 보면 이런 리터럴 오브제 개념에 아우러진다. 그림이 현실이 되게 하고 픽션과 실제의 경계를 허무는 일에 복무하는 것이다.

윤병락_National Geographic_한지에 유채_120×231.5cm_2009

작가의 그림에서 세이프트캔버스는 사과가 가득 담겨진 나무상자와 그 상자 밖으로 비죽 나와진 신문이나 사과 위에 놓여진 책자와 프레임이 일치하는 경우로 나타난다. 해서, 영락없이 실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는 사과상자 대신 책, 특히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배경화면으로서 도입해 그 위에 사과를 배치한다. 엄밀하게 말해 작가의 작업에서 배경화면이란 말은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그 말이 한정된 화면 내에서의 조형적인 요소나 장치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회화의 용법으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처음의 계기와 상관없이 작가가 지나쳐온 과정을 보면, 조형적인 층위에서보다는 일루전을 매개로 한 픽션과 실제, 허구와 현실과의 관계를 다루는 층위에 속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형 캔버스의 특수성이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경우로는 잡지를 표지로서보다는 펼쳤을 때 생기는 자연스런 굴곡을 다룰 때이다. 때로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바닥에 깔아놓거나 벽에 비스듬하게 세움으로써 즉물성, 현존성, 사물성을 강조한다. 조각처럼 공간을 확장시키는가 하면, 현실의 자장에 속해져 있는 사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현실감)을 강화한다. ● 작가는 말하자면 세이프트캔버스를 매개로 해서 캔버스를 사물(일종의 유사오브제)로 전이시키는 한편, 더불어 일종의 시뮬라크라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모더니스트적인 면모와 포스트모더니스트적인 특질을 유기적으로 종합한다고나 할까. ● 이와 함께 작가의 작업에서의 사과가 갖는 의미가 일정하게 변화되고 있는 것이 감지된다. 전작에서의 사과가 풍요를 상징했다면, 근작에서의 사과는 욕망을 상징한다. 이런 다른 독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과와 함께 도입된 요소들, 이를테면 신문이나 시사 잡지 그리고 근작에서의 내셔널지오그래픽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진작부터 이 부수장치들로 하여금 사과의 사회학적 의미를 지지하게 했는데(이를테면 탐스런 사과가 무색한 척박한 농촌의 현실이나, 뇌물로 의심받는 사과상자 같은), 만델라나 김연아 같은 특정 인물의 근황을 테마로 한 페이지를 통해 현실성, 현장성, 시사성을 견지해온 것이다. 이처럼 부분적으로 도입되어졌던 시사적 요소들에 비해보면, 근작에서의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보다 본격적으로 드러내놓고 차용된 감이 없지 않다. ● 주지하다시피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자연과 생태와 환경에 그 초점을 맞춘 전문적이면서 대중적인 잡지다. 그 생리 상 문명의 폐해를 경고하는 축에 속한다. 이를테면 환경오염으로 인해 얼음이 다 녹아내려 생존을 위협받는 북극곰이나,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복제돼지를 통해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고발하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잡지의 내용이 인간의 욕망을 겨냥하고 있는데, 정작 그 위에 얹혀진 사과가 여전히 풍요를 상징할 수 있을까. 욕망과 풍요가 부닥치고 상충하는 일종의 아이러니 화법을 통해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윤병락_Polar bear_한지에 유채_139×112cm_2009

욕망과 욕구는 다르다. 똑같이 결핍의식에 연동돼 있지만, 욕망이 존재론적 결핍으로서 해소될 수 없는 것이라면, 욕구는 생리적 결핍으로서 해결될 수 있다. 문명을 향한 욕망, 자본주의가 약속한 욕망은 다른 욕망이나 더 큰 욕망을 불러오기 위한 계기로서 작용할 뿐 오히려 허기의식(상대적인 박탈감)만을 부풀려 줄 뿐이다. 그 지극한 결핍의식의 원조는 단연 창세기의 사과로 소급된다. 사과는 원래 지식(엄밀하게는 지혜)의 열매로 알려져 있다. 지식을 집어 삼킨다는 것은 곧 자연으로부터 문명으로의 방향전환을 상징한다. 태곳적 인류가 자연에 대해 품고 있었던 범신론과 물활론,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주술과 마술, 피를 통한 재생, 경외감과 숭고의 감정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원죄의식이란 이처럼 신을 저버리고 자연을 등진 것에서 온다. 내셔널지오그래픽과 사과가 의미론적으로 부닥치고 상충하는 작가의 근작은 자연의 의미를 곱씹게 하고, 욕망의 드라이브를 재고하게 만든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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