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화원기행도 朝鮮畵員紀行圖

The Journey of Joseon period's Art   이선진展 / LEESUNJIN / 李先眞 / painting.sculpture   2009_0506 ▶︎ 2009_0520

이선진_기행도 Journey-Lover in the moonlight_실크에 수묵채색, 메탈, 혼합재료_38×42×4cm_2009

초대일시_2009_050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갤러리 소나무_GALLERY SONAMOU 서울 종로구 가회동 1-42호 북촌 e-믿음치과 Tel. +82.2.3675.3396~7 www.dentaltrust.co.kr

경계 위의 그림, 원전에 대한 개입과 간섭 ● 한국의 근대미술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중 강력하고도 설득력 있는 견해로는 영.정조 시대인 겸제 정선의 진경산수와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가 제작된 시기를 들 수 있다. 중국 화풍의 영향을 받은 관념산수 일색이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출현한 진경산수와, 그때까지만 해도 미처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보통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를 근대적 자의식의 소산으로 본 것이다. 진경산수가 우리의 산수에다가 우리의 정서를 담아 우리의 방법으로 그려낸 것이라면, 풍속화는 세속적인 삶의 정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란 점에서 국내 최초의 사실주의 미학을 정초한 것이다. 김홍도가 서민 계급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신윤복은 사대부 계급에 주목한 점이 다르다. 각각 서민계급의 해학적인 삶과, 노동을 면제받은 사대부계급의 소위 한량질을 통해 당대적인 삶의 습속을 재현한 것이다. ● 결국 영.정조 시대는 우리의 근대이며 르네상스에 해당하는 만큼 현대적 삶의 전범이 되고 있으며, 보기에 따라서는 그 영향관계가 과거형이나 완결형이기보다는 현재진행형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왕조와 왕조 이후의 인식론적 단절이 놓여 있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현상일 뿐 실제로는 서로 중첩되고 삼투된다는 것이다(그 경우는 서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선진_기행도 Journey-The dano festival_실크에 수묵채색, 메탈, 혼합재료_38×42×4cm_2009

이선진은 신윤복의 원화를 차용한다. 한국화를 전공한 이력과 함께, 짧지 않은 유학생활이 오히려 자기정체성에 대한 반성적인 물음에 천착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종의 원형의식이나 회귀본능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처음에 차용은 원화에 대한 임모에서 시작된다. 일종의 그림공부인 셈이다. 그런데 작가의 작업에서 그 그림공부가 단순히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모색 이상의,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따지고 보면 그의 작업 전체가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림의 존재방식에 대한 탐색과 형식실험에 연동돼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모더니즘 서사는 미술 자체의 존재방식을 주제로 한 소위 메타적 속성으로 특징되고 있다. 그 인식론적 결과가 개념미술에 연계되고, 그 형식적 성과가 미니멀리즘에서 완성된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에서의 외연은 비록 신윤복의 원화를 차용한 것이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는 그림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기 반성적 물음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 그 과정에서 차용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차용은 결정적인 의미로 굳어진 체계, 닫힌 체계를 의심하고, 열려진 체계와 또 다른 열려진 체계간의 상호작용성이나 영향관계에 주목한다. 차용은 원전을 숙주 삼아 자기의 존재성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기생의 논리에 의해 견인된다. 즉 작가가 원전을 차용하는 데에는 원전의 의미보다는(이를테면 오마주 같은) 전적으로 자기논리(이를테면 그림의 존재방식을 되묻는)를 위한 것이다. 원전을 열려진 체계로 간주하고, 여기에 개입하고 간섭해 이를 자기화하는 것이다.

이선진_기행도 Journey-sword dance_실크에 수묵채색, 메탈, 혼합재료_38×42×4cm_2009

신윤복의 지평과 이선진의 지평, 원전의 지평과 차용된 지평, 미술사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객관적인 지평과 주관적인 지평, 과거의 습속과 현재의 해석이 서로 스며들고 삼투되고 융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융합된 지평은 신윤복에게도 이선진에게도 속하지 않거나 그 모두를 포함하는 제3의 어떤 비전(이선진의 해석과 개입이 없었더라면 결코 예시되지 않았을 비전)을 열어 놓는다. 주석과 인용, 차용과 첨삭행위를 매개로 해서 신윤복과 이선진이 만나 일견 불가능한 기획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선진이 신윤복(엄밀하게는 신윤복의 그림)으로 환원되고, 신윤복이 이선진과 더불어 상생하는 것(미술사의 무덤으로부터 유령을 되불러오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는 현재 속에 살아있고, 현재는 과거에 붙들려 있다.

이선진_기행도 Journey-a visitor_실크에 수묵채색, 메탈, 혼합재료_38×42×4cm_2009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원전에 개입하고 간섭하는가. 작가는 신윤복의 원화들, 이를테면 미인도, 쌍검검무, 월하정인, 단오풍정, 청금상련, 주유청강, 청루소일, 춘의만원, 월야정인, 월야밀회, 이부탐춘 등 보통의 풍속화와 함께 주로 사대부 계급이 부녀자를 희롱하는 은근한 그림들을 차용하는데 있어서 그 그림들을 원화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크게 배경화면과 주로 인물로 나타난 모티브들을 분리해 그린 연후에 재차 이를 중첩시킨다. 그러니까 견 위에 모티브를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모티브들을 가위로 오려낸 연후에, 먼저 그려둔 배경화면의 앞뒷면에 적당히 배치해 중첩시키는 것이다. 얼핏 콜라주 기법이 연상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자세히 보면 모티브와 모티브 사이에 간격이 설정돼 있다. 모티브와 모티브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서로 다른 층위에 속해져 있는 것이다.

이선진_기행도 Journey-with lotus flower_실크에 수묵채색, 메탈, 혼합재료_38×42×4cm_2009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일까. 작가는 배경화면 뒤쪽에 놓여질 이미지를 고정시켜 이를 에폭시로 굳힌 후, 배경화면을 중첩시켜 재차 에폭시로 굳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배경화면의 전면에 위치할 이미지들을 배열한 후 이를 다시 에폭시로 굳히는 식으로써 사실은 분절된 이미지들이 상당한 두께와 무게를 갖는 투명 에폭시 속에 갇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마치 입체그림에서처럼 여러 다른 층위에 속한 이미지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중첩돼 보인다. 그 차이가 미미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감각적으로 어필되는, 일종의 입체적인 그림이 가능해진다. ● 이는 전통적인 한국화뿐만 아니라 서양화의 원근법과도 다른, 평면적인(동양적인) 그림과 원근적인(서양적인) 그림과의 사이에 위치할 법한 기묘한 그림이다. 더욱이 이 평면 이미지들을 가두고 있는 틀 즉 에폭시의 층은 그대로 투명한 공기의 층처럼 보이며, 그 속의 그림들은 공기 속을 부유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이미지를 투과하는 견의 성질이 더해져서 마치 물을 머금은 먹그림 같은 투명한 성질이 강화돼 보인다. 이로써 먹그림의 주요 과제 중 하나인 습윤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선진_기행도 Journey-a river breeze_실크에 수묵채색, 메탈, 혼합재료_38×42×4cm_2009_부분

작가는 여기에다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접목시킨다. 주지하다시피 한국화의 전통적인 화법은 밑그림 그리고 엷은 채색에서 짙은 채색 순으로 진행되는데, 작가는 그 과정을 낱낱이 분절시켜서 그린다. 그러니까 한 인물을 각각 먹그림과 엷은 채색 그리고 짙은 채색으로 따로 분절시켜 그린 연후에 이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중첩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중첩된 세부 이미지는 배경화면의 전면과 후면에 중첩시킨 그림의 전체 이미지와 어우러져서 그림을 더 복잡하고 미묘하게 이끌어간다. 그림이 제작되는 과정을 그대로 답습해 그린 이른 바 그림공부가 궁극적으론 그림 자체의 정체성을 변질시키는 적극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세 개의 층위가 포개진 인물의 밑그림은 인물의 그림자처럼 보이는가 하면, 현실과 비현실을 중개하는 그 실체가 애매한 잠재적인 어떤 존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이를테면 유령 같은). 이런 식의 그림자 역시 입체적인 그림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한국화뿐만 아니라 서양화에도 없는 것이다.

이선진_기행도 Journey-a spring day_실크에 수묵채색, 메탈, 혼합재료_38×42×4cm_2009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이선진의 그림에는 전통적인 한국화와 서양화의 방법론이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어긋나는 일종의 기묘한 짜임이 조성된다.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랄 수 있는 그 짜임은 서양화와 한국화가 만나는 접점에 대한(한국화를 전공한 이력과 서양 유학이라는 이질적인 경험이 부닥치는 접점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해석이 빗어낸 결과인 듯 보인다. ● 이렇듯 작가는 이질적인 층간을 넘나든다. 작가 자신이 직접 타임머신을 타고 신윤복의 원본 속으로 침투해, 사대부들의 풍류마당을 지켜보기도 하고, 남정네들이 부녀자들을 희롱하는 은밀한 현장을 훔쳐보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관음증적 주체로서 나타난다. 어쩌면 미술사는 훔쳐보기의 역사, 관음증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흔히 그림을 발가벗는 행위에다 비유하듯(자신의 분신 운운하는 것 역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을 관상하는 행위는 곧 화가의 은밀한 곳(때로는 지나치게 주관적인가 하면 치명적일 만큼 솔직한)을 넘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 이렇게 이선진의 그림 「조선화원기행도」는 조선시대 화원의 생생한 현장 속으로 또는 그 그림 속에 묘사된 당대의 저작거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 여로에 우리는 작가와 더불어 관음증적 주체로 초대받는다. 그리고 풍속화로 나타난 그림의 표면을 넘어 모든 작가들의 속내(예술가의 에토스와 파토스)와 직면케 한다. ■ 고충환

Vol.20090506c | 이선진展 / LEESUNJIN / 李先眞 / painting.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