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9_050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아이켐_Gallery ICAM 서울 종로구 팔판동 72번지 Tel. +82.2.736.6611 www.galleryicam.com
이번이 마지막 생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사람(『숫타니파타』 중 「젊은 마가의 물음」) Gallery ICAM에서는, 2009년 5월 6일부터 24일까지 홍재연의 개인전 『깨달음의 자리』를 연다. 작가는 ICAM 이영미술관에서도 2003년의 개인전과 2008년의 신축?개관 기념전시를 통해 그 인연을 확인한 바 있다. 물리적으로 큰 공간을 장악할 수 있기 위한 실험적인 작품보다는 좀 더 대중들에게 친근한 이미지의 작품들이 이번 개인전을 구성한다. ● '깨달음'이란 지극히 동양적인, 그 중에서도 불교적인 개념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왔다. 특히 중국의 당(唐) 후기 이후, 극동 불교의 주류를 이루어 온 선종은,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정신적 자유로서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그 깨달음을 이룬 존재로서의 선사(禪師), 조사(祖師)라는 존재를 불타(물론 불타 역시 이러한 스승이다)만큼의 비중을 두고 숭앙해 왔다. 이들의 어록과 철학은 스즈키 다이세츠 등 일본의 분석적인 선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1960년대 말 서구권에서 고도 산업사회화에 따른 인간 소외 등에 대한 해법으로 받아들여지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예컨대 같은 형상을 수없이 반복한 화면 등 미니멀리즘 회화의 경우, 그 제작 과정 자체가 한 가지에 집중하는 선종의 수행법과 닮아 있기도 하다.
사실 홍재연의 초기 작품은, 겉으로는 정치성을 띠지 않으나 내면적으로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격한 심정을 표현하는 거친 질감의 화면이 주를 이루었다. '아예 빗자루를 써서 휘둘러댔'다는 비평가 김인환의 설명처럼, 그의 작품은 일정한 형상의 개입이 배제되어 있었다. 지금과 같이 형상이 개입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그 형상은 단지 불교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닐 수 있는 종교성 자체를 제시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종교성이란 먼저 언급한 바, 선종에서 전해지는 것과 같은 완벽한 정신적 자유로서의 깨달음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욕구라 할 수 있다. 홍재연의 작품은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선사의 유해를 안치한 부도를 모티프로 한다.
불교 세계관의 근본이 되는 힌두교 등 동양의 고등 종교에서는 죽음이 끝을 아님을 말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욱이 깨달은 이의 유해를 화장하고 재가 식으면서 나온 사리를 안치한 부도는 그 자체가 깨달음의 상태를 상징한다. 본래 불타의 진신사리를 말하는 탑(塔)과 부도 모두 스투파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차이다. 구분을 위해 부도를 승려의 묘탑(廟塔)으로 한정하기는 하지만, 부도를 곧 'Buddha'라 표기하는 데서 오는 의미의 확장을 고려한다면, 작가의 작품에서의 부도는 종교를 초월한 깨달음의 단계, 혹은 그것을 찾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도의 형상은 작가의 출발점일 뿐 그 자체를 표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관람객은 이 부도의 형상을 보며 골고다 언덕을 떠올릴 수도 있고, 메카를 연상할 수도 있으며 동네 성황당의 신목을 떠올릴 수도 있다. 작가는 이 부도의 이미지를 무한히 반복하거나 여백을 남기기도 함으로써, 죽음을 죽음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생명력과 집착하지 않는 정신적 자유를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열린 이미지인 것이다. 부도에 종종 보이는 창(窓)모양의 형상은 흔히 문학에서 열린 텍스트를 언급할 때의 비유인 '창이 많은 집'을 떠올릴 수도 있다. 사색적인 형상의 부도에 과감한 원색을 사용한 것이라든가, 아크릴 안료가 화폭에 묻었다가 떨어진 거친 질감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은, 부도라는 상징의 기호와 색채라는 직관 두 양면의 긴장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 갤러리 아이캠
Vol.20090511h | 홍재연展 / HONGJEAYUON / 洪在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