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선展 / KIMJUNGSUN / 金廷宣 / painting   2009_0911 ▶︎ 2009_0924

김정선_오래전 그 소녀 When she was a little girl_리넨에 유채_162×130cm_200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1221e | 김정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9_091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6:30pm / 일요일_10:00am~05:00pm

이화익 갤러리_LEEHWAIK GALLERY 서울 종로구 송현동 1-1번지 Tel. +82.2.730.7818 www.leehwaikgallery.com

김정선의 2009년도 ● 나는 김정선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하면서 제목을 '검은 태양(black sun)'이라고 붙이고 싶었다. "밤은 낮의 어머니(night is the mother of day)"라고 노래했던 18세기 스웨덴의 시인 에릭 요한 스타그넬리우스(Eric Johan Stagnelius) 시구가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2009년의 김정선의 작품은 확실히 낮의 어머니로서의 검은 태양이자 푸근하면서도 울적한 밤의 빛이다. 단단하면서도 투박한, 그러나 절대 빛을 상쇄시키지 않는 흑요석(obsidian)의 빛깔이 나로 하여금 현재로부터 먼 과거로 유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의 가르침이 뇌리를 스친다. ● 우리는 지금을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너무도 생생하여 그 총체적인 색채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분명한 현재의 컬러를 마치 피부로 스치듯 너무나 잘 느끼지만 현재의 의미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반대로 우리는 시간이 지나버린 과거의 의미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과거에 대한 감각은 총체적인 채색이 아니라 아른거리는 잿빛의 모노톤일 수밖에 없다.

김정선_여름이 지나다 Passing Summer_리넨에 유채_130×194cm_2009

시대의 내부자(insider of time)와 시대의 외부자(outsider of time)라는 말이 있다. 시대의 내부자는 어떤 시대에 동참하여 생생한 생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부여 받지만, 그 시대의 의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울적한 우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시대의 외부자, 즉 시대의 아웃사이더는 이미 지나간 시대를 반추하며 객관적 의미를 파악하는 행운을 얻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생생함을 상실해버린 불운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시대의 의미를 안다면 그 시대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 "슬픔 속에 행복이, 행복 속에 슬픔이(in hilaritate tristis, in tristitia hilraris)"라는 르네상스의 천재 브루노(Giordano Bruno)의 경구를 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간이라는 오묘한 섭리로 해석한다. 김정선이 해석하는 세계와 시간이라는 지점 역시 바로 브루노의 경구와 맞닿아있다. 김정선은 과거를 밤의 이미지로 채색한다.

김정선_깃털 꽂은 소녀 Girl with Feathers_리넨에 유채_162×97cm_2009

2005년도의 「생일 잔치」에서도 2008년의 「어린 시절」에서도 늘 불안함이 드리워져 있다. 김정선이 묘사한 그림의 시대는 분명 김정선이 살았던 시대의 자신이거나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천진한 놀이 속에 빠지는 장면이나 생일의 축복이 공기를 가득 채우는 장면, 백일 사진의 기념 속에서도 자신을 둘러싼 스토리임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울적한 마력이 느껴진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김정선이 그린 세계와 공감할 것이다. ● 2009년의 김정선의 회화는 이전의 회화보다 단조롭고 우회적이되 훨씬 효과적이다. 김정선은 2005년도 이래로 정서를 유발시키는 구체적 소재에만 채색을 가하는 특징이 있었다. 가령 2005년도의「핑크 케이크」가 가장 적절한 사례라 할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이 모인 어수선한 공기 속에서 모두의 주위를 환기시키는 케이크만이 구체적인 채색을 지닌다.「포근한 물방울 무늬의 옷」을 입은 이는 분명 김정선의 어머니이거나 김정선을 아주 아껴준 분이었을 것이다. 그분의 푸근한 느낌과 체취는 물방울 옷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봉제 토끼 인형」이나 「새 구두 신은 자매」 「무지개」 역시 김정선이 가슴 깊이 묻어둔 소중한 추억이자, 삶을 견디게 해주는 원리일 것이다.

김정선_나무와 미끄럼틀 Slide and trees_리넨에 유채_162×130cm_2009

그런데 2009년의 회화에는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소재가 소녀시절에만 국한되어버린다. 「이용수 할머니」나 일반 명사의 어머니를 지칭하는듯한 「젊은 그녀」에서나 「젊은 시절의 이해인 수녀님」 연작에는 채색이 극구 자제된다. 푸른 꿈의 통로를 다 통과한 이들에게는 근중의 무게감만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꿈의 통로 속 머무는 「소녀」 연작에는 화사함, 행복함, 기쁨, 미소 머금게 하는 귀여움을 선사한다. 이렇듯 김정선은 시절과 시대가 내포하는 미묘한 기적을 아주 기발한 장치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김정선의 이러한 소재와 회화 방법 속에는 시간과 시절, 나이, 그리고 이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물리적 한계 속에서 늘 편재하는 존재(invisible-but-being ubiquitous)에 대한 메타포를 구현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의 곁에서 편재하는 이 존재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김정선_미완성 소녀 Unfinished portrait of a girl_리넨에 유채_80.5×65.5cm_2009

다만 우회적으로 간파된 작가의 은유 속에 동화되는 길밖에 없다. 김정선의 뮤즈는 울적함 속에서도 늘 거듭 피어나는 기쁨과 너무 기쁜 감정 속에서도 은연 중 다가오는 피로한 슬픔에 자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이 바로 이 작가의 존재 이유이며, 여러 사람들이 김정선의 회화에 기대를 거는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개인전을 준비하며 겪었을 김정선의 노고와 고민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아니 보다 진전된 시적 간결함으로 보다 많은 네러티브를 품는 그의 예술적 태도를 생각한다면, 그의 다음 행보가 너무나도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정선_브로치를 단 소녀 Girl with brooch_리넨에 유채_162×130cm_2009

분명히 화사한 한낮의 생기는 없지만 이 생기를 부여하는 것은 밤이라는 어머니이며, 이 어머니는 끝없이 혼자 껴안는 울적한 우울로부터 생생한 내일의 태양을 약속하기에 '검은 태양'인 것이다.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의 노래는 따라서 김정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너의 여신을 열렬히 환영해 맞으라. 현자이자 신성한 너의 여신을 맞으라. 가장 신성한 울적한 우울을 온몸으로 맞이하라(But hail thou Goddess, sage and holy, Hail divinest Melancholy.)

김정선_뿔 달린 소녀 Girl with red horns_리넨에 유채_100×80.5cm_2009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다니엘 비른바움(Daniel Birnbaum)은 그의 저서『족제비가 알을 삼키듯이(As a Weasel Sucks Eggs)』에서 르네상스 이래로 서양문화를 양분해왔던 큰 지류를 두 갈래로 카니발리즘(canivalism)과 멜랑콜리(melancholy)라고 나누어 규정했다. 이 두 갈래가 우리 시대의 미술로 접어들면서 전자는 화려한 겉모습의 센세이션(sensation)이 되며 후자는 시대의 고민을 담는 시(poetic)가 된다고 했다. 야만과 카니발리즘, 족제비는 서로 동의어이듯 그 화려한 모피와 재빠른 유동성을 자랑한다. 우울과 멜랑콜리아, 알은 서로 동의어이다. 껍질에 쌓여 고요한 시적 명찰에 잠기며 자기의 성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족제비가 알을 삼켜도 또 다른 알이 태어난다. 야만이 시를 침범해도 결코 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알은 부활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센세이션이 시를 침범해도 시는 거듭 태어난다. 김정선은 확실히 족제비보다는 알이 되기를 선택한 작가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한 시적 회화의 거듭된 발전 양태를 줄곧 기대할 것이다. ■ 강무성

Vol.20090917h | 김정선展 / KIMJUNGSUN / 金廷宣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