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며든 풍경, 나에게 스며든 풍경

이현열展 / LEEHYUNYEOL / 李玄烈 / painting   2009_0916 ▶︎ 2009_0922

이현열_적벽앞에 서다 2_한지에 수묵_130×330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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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091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관훈갤러리_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내가 스며든 풍경, 나에게 스며든 풍경 ● 지금까지 이현열은 적어도 외관상 독립적인 산수화 내지는 풍경화로 부를 만한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동안 꾸준한 화첩작업과 함께, 사생에 바탕을 둔 풍경과 자신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성에 대한 이해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 자체만으로 자족적인 존재성을 갖는 풍경화의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순간도 풍경화를 그리지 않은 적이 없다.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사실 자체는 그러나 오히려 풍경화에 대한 작가의 진정성을 말해주며, 본격적인 풍경화 이전에 치열한 모색의 시기가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 여기서 작가의 그림을 산수화로 볼 것인지, 아니면 풍경화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논란과 관련하여 작가의 그림은 편의상 산수화보다는 풍경화로 보인다. 그 정도에 차이가 있겠지만 산수화는 전통적인 화법, 이를테면 준법과 묵법과 화면에 경물을 포치하는 방법을 답습하거나 재해석하는 등 전형적인 형식과 방법론에 충실한 편이다. 이에 반해 풍경화는 인문학의 소산이며, 무엇보다도 풍경과 주체와의 긴밀한 상호작용성의 소산인 점이 다르다. 물론 전통적인 산수화 역시 사의와 같은 주체의 흔적이 없지는 않다(이러한 사의의 흔적은 전문적인 화공의 그림에서보다는 사대부 계급의 문인화에서 더 현저해진다). 하지만 산수화에서 사의적인 표현이 미덕이나 경지의 층위에서 논의되는 개념이라면, 풍경화에서 풍경과 주체와의 상호작용성은 근간이며 핵심이다.

이현열_수영금지구역 1_한지에 수묵채색_55×74cm_2009

풍경화를 풍경화이게 해주는 계기가 바로 이 풍경과 주체가 상호작용하는 과정과 방법과 질의 수준에 달려있는 것이다. 해서, 내가 우울할 때 풍경은 침울해 보이고, 내가 들떠 있을 때 풍경 역시 발랄해 보인다. 혼돈스러울 때 풍경은 무슨 해체된 추상화처럼 보이고, 심리적으로 안정적일 때 풍경은 추상화된 패턴이나 체계(이를테면 그 자체 내적 질서의 메타포 같은)처럼 보인다. 일종의 감정이입상태로서,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전통적인 산수화 역시 물아일체의 경지가 없지 않다(또 다시 경지가 문제시된다). 한편으로 미덕과 경지와 근본이 하나같이 수준과 질의 개념임을 생각하면 이런 감정이입의 정도를 근거로 하여 산수화와 풍경화를 가름하는 것은 그 당위성이 약할 수도 있겠지만, 이로부터 적어도 그 상대적인 차이만큼은 인정할 수 있는 일이다. ● 한마디로 산수화든 풍경화든 그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한 개념이며(사실 따지고 보면 실경산수와 진경산수 그리고 관념산수의 경계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상호 보충적이고 보완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와중에서도 작가의 그림은 주체와 풍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성에의 인식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산수화보다는 풍경화에 가깝다.

이현열_수영금지구역 2_한지에 수묵채색_55×74cm_2009

여하튼 작가는 진작부터 풍경, 산수, 자연을 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성을 갖는 대상으로서보다는 자신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성의 계기와 그 범주 안에서 인식해왔으며, 이런 인식이 작가의 그림이 갖는 특정성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그동안 독자적인 풍경화로 부를 만한 경향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못했던 점, 그리고 그 이유로서 풍경화가 작가 자신과의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다루어져 왔던 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관계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얼핏 독자적인 풍경화로 보이는 근작에서도 여전히 실질적인 창작동인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자족적인 풍경화(혹은 객관적인 풍경화)의 이면에 사실은 그 풍경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삼투된 작가의 흔적(이를테면 기억으로 되살려낸 개인사나 대상풍경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난 상상력의 개입과 유희 같은)이 내장돼 있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풍경과 주체와의 상호관계성이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이로 인한 대상풍경의 일정한 변형이야말로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실질적인 동인 내지는 창작원리라고까지 말할 수 있게 된다.

이현열_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_한지에 수묵채색_90×232cm_2009

그렇다고 그 변형이 대상풍경의 본성을 해체하면서까지 진행되지는 않는데, 이처럼 가급적 대상풍경의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면서 그 틈새로 주체의 흔적을 밀어 넣는 것에서 작가의 그림은 개성적 표현을 얻는다. ● 처음에 작가는 그 관계를 일상과의 맥락 속에서 풀어냈다. 이를테면 옷이나 플라스틱 물통 그리고 종이 컵이나 비닐 팩과 같은 일상적인 경물 속에다 풍경화를 그려 넣고, 종래에는 아예 일상으로부터 오브제들을 직접 차용해 그 표면에 풍경을 덧그리기에 이른다. 이 소재나 오브제들은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계기들이며, 작가는 이처럼 자신의 주체가 투사된 일상 속에다 풍경을 밀어 넣은 것이다. 여기서 일상은 단순한 풍경을 위한 배경화면 이상의 풍경화에 대한 작가의 관념, 이를테면 일종의 이상화된 풍경을 반영하고 있다. 즉 작가에게 풍경은 주체와 별개일 수가 없으며, 풍경화에 대한 이 관념, 이 이상이 주체와 동일시되고 있는(최소한 주체에 연장돼 있는) 일상과 풍경이 상호 간섭하고 삼투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주체의 흔적은 현저해진다(풍경보다 사물이, 일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 그리고 근작에서 그 관계는 역전되는데, 일상과의 관계맥락보다는 풍경 자체가 전면화하면서 주체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더 은밀하게 그리고 암시적으로 투사된 나머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간과하기가 쉽다. 어느 정도 풍경을 대상화하던 것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풍경 속으로 들어가 풍경의 일부로써 동화되어졌다고나 할까.

이현열_주천강변_한지에 수묵채색_80×116cm_2009

한국의 지수를 사람으로 치자면 노년에 해당하는 것인 만큼 그 지형은 온화하고 섬세하다. 장대하지는 않지만, 크고 작은 골짜기들 속에 주름과 결이 풍부한 절벽과 그 야트막한 절벽을 끼고 도는 강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숨겨놓고 있다. 위로 치솟기보다는 옆으로 퍼지면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세나, 점차 엷어지고 중첩되면서 가없이 멀어질 것만 같은 산세 그대로를 작가는 옮겨놓고 있다. 현장 사생과 화첩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그 그림들은 먹그림 고유의 특질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먹물의 농담에 변화를 주기보다는 먹선을 다변화해 그 먹선의 종류에 따라서 다양한 경물이 생겨나고 먹선이 중첩되면서 음영이 드리워진다. 채색을 절제하는 것 역시 이런 먹그림의 특질을 강조하는데, 채색을 쓸 때조차 가급적 그 이면에 먹선의 골기가 그대로 드러나게 해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준다. 먹선으로 표현된 풍경이 빈 화면으로 표현된 강과 대비되면서, 그림 속에 평면을 들여놓고 있다. 가없이 흐르는 그 물길을 따라 흐르다 보면 어느새 저마다의 마음자리에 가 닿을 것만 같다. 평면과 강이, 여백과 마음자리가 서로 삼투되는 어떤 경계가 암시된다고나 할까(이로부터 없음과 있음이 삼투된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현열_두 개의 터널_한지에 수묵채색_80×116cm_2009

임진강 하류에 있는 화석정이란 정자에서 바라보거나, 강원도 정선 도로 옆에서 절벽같이 둘러쳐진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며 그린 그 풍경은 특정 지역을 그린 풍경이면서, 어디에서든 흔하게 볼 법한 어슷비슷한 풍경으로서, 그 만큼 친근함을 자아내는 풍경들이다. 특수성(장소특정성)을 통해 보편성(보편적인 풍경의 질감과 품세)을 보거나 보여준다고나 할까. ● 이처럼 실경을 그린 풍경 속에다 작가는 상상력을 개입시켜놓고 있다. 이를테면 실제로는 없는 샛길을 그려 넣거나 그 샛길에 대응하는 터널 입구를 그려 넣는다. 이런 샛길이나 터널은 노란색 바탕에 검은 색 줄무늬가 그려진 도로 가장자리 표지석과 함께 인공 구조물에 해당하며, 자연풍경과의 대비나 조화를 강조할 요량으로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일정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한데, 이를테면 샛길이 삶의 메타포를, 그리고 터널이 이편과 저편을 가름하면서 연이어주는 인연의 계기를 암시한다. 이런 상상력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된 경우로는 절벽을 끼고 흐르는 강 속 경물들에서 그 예를 접할 수 있다. 강물 속에 있을 법한 물고기들과 함께, 실제로는 없는 악어, 기린, 거북이, 그리고 심지어 작가의 분신인 팬더곰이 하나가 돼 흐르고 있다. 내가 흐르고, 네가 흐르고, 세상이 통째로 흘러가고 있다. 그 강은 현실의 강이며, 상상의 강이며, 유년의 강이며, 망각의 강이며, 시간의 강이다. 그리고 그 강 옆 절벽에는 설핏 하수구 관도 보인다. 세상과 연결된 관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풍경, 산수, 자연은 세상과 연결돼 있고, 나와 연동돼 있고, 존재와 내통하고 있다. 외관상 흔들릴 수 없는 실경 속에다 작가는 이처럼 자기를 삼투시키고, 세상을 삼투시키고, 존재를 삼투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 속에서 현실(현실 속 풍경)과 이상(이상화된 풍경)은 이렇게 만나지고 있다. ■ 고충환

Vol.20090920h | 이현열展 / LEEHYUNYEOL / 李玄烈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