囍-happy

서희화展 / SEOHEEHWA / 徐希和 / mixed media   2009_1113 ▶︎ 2009_1121 / 일요일 휴관

서희화_囍-자화상_플라스틱에 아크릴채색_116×91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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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113_금요일_06:00pm

포아트갤러리 초대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포아트갤러리_4ART GALLERY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3786번지 포아트빌딩 2층 Tel. +82.31.754.3155 www.4art.co.kr

제작된 의미로 열어 보이는 세계, 아직 채 열리지 않은 의미 ● 서희화의 작품은 두 가지 '재료의 속성'과 하나의 사물-작품이 가진 특징으로 먼저 분별이 된다. 두 가지 재료의 속성이란 여러 기물들의 조합을 통해 얻어지는 사물들이 변모되어 얻어진 새롭게 의미하는 것이 그 하나다. 또 다른 측면에서 그녀의 작품이 가지는 재료의 속성은 새롭게 얻어진 의미와 하등의 상관관계가 없는 것들의 조합을 알아차렸을 때 얻어지는 가벼운 놀라움이다. 새롭게 드러나는 사물들의 조합된 의미와 가벼운 놀라움이 왜 그녀 작품의 재료적 속성이 되는가? 재료가 가지는 속성이란 사실, 의미라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사물답게 이루고 있는 재료에 대한 이해로부터 드러난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물은 사물을 이루고 있는 재료 때문에 하나의 사용 가능성에 대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 체계가 거부되거나 기만될 때 우리는 그 재료의 속성 변화에 대해 묻게 된다.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재료의 변모일 뿐이다. 그러나 이 변모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정말이지 사물 안에 간직되고 있던 사용 가능의 의미였을 뿐이다. 우리는 아무도 사물의 재료 그 자체만을 문제 삼거나 의미부여하지 않았음에도 그 변화가 이끄는 사실관계의 왜곡에서부터 의미를 따지게 된다. 그녀의 작품-사물이 가진 특징은 이러한 재료 변모에서 비롯된다. 어떤, 버려진, 플라스틱 쪼가리가, 인형이 이렇게 저렇게 조합되고 채색되면서 원래의 기물적 속성은 사라지고 엉뚱하고 기발한 하나의 새로운 사물이 드러난다. 그녀의 작업 방식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 그러하다. 우리는 그런 결과물에 대해 그것이 무엇을 닮았는지 찾기보다 그 공정의 먼 거리를 뒤쫓으면서 지금 눈앞에 자리하고 있는 작품을 잃어버린 사물의 속성과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사물의 특징 사이에 개입된 무엇을 찾아내게 된다. 도상 해석이라면 굳이 찾아낼 이유가 없다. 그녀의 작품은 최종적으로 어떤 도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의 특징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드러내고 있다.

서희화_囍-산수화_전선에 아크릴_162×130cm_2009

사실 서희화의 작품을 폐기된 어떤 사물들이 조합을 통해 특정한 도상, 민화적 요소라든지 전승된 무늬로 재현된 것으로서 한정하여 문제 삼는다면 감상자로서 우리는 편하다. 작가도 이와 같은 맥락만을 제시한다면 작품은 오히려 더 수월하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이유로 인해 이렇게 편한 감상을 우리는 포기해야만 한다. 아마도 작가로서 그녀는 이 점에 대해 동의하거나 아니면 무감각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도 새롭게 이해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의미가 새롭게 제안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제작된 의미'라고 이 글에서는 정리하여 제시한다. 왜냐하면 작품 제작의 최종 목표로서 의도한 바가 아닐지라도 그녀의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사물들의 의미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사물의 의미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완전히 새로운 사물들의 의미라고 한 것은 일상에서 사용되었던 사물들이 저 마다 하나의 의미로서 다루어 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물 사용의 용도가 폐기됨으로써 새롭게 의미 부여된 사물로 작가에게 모아졌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누군가가 이런 저런 의미를 가지고 사용했을 법한 사물들이 그 사용 가능성이 사라지자 버렸던 물건이 폐기됨으로 의미를 가진 채 작가에게 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완전히 새로운 사물의 의미로 전개된다는 것은 폐기라는 의미로부터 작가는'페기 됨'을 전혀 의식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신이 의도하는바 어떤 사물의 부분으로서 조합될 요소로만 분류 파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이다. 그것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일단 작가의 의도가 하나의 무늬 또는 연상되는 사물로서 드러나는데 성공하고 있다. 연꽃처럼, 모란꽃처럼, 웃는 얼굴처럼 하여간에'무엇처럼' 변모하는데 성공한다. 작가는'~처럼'까지는 책임 있게 자신의 작업 과정을 진행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작가의 권력 밖에서 온전하게 드러난다. 그것을 새로운 사물의 의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물들이 폐기된 바 그 원인이 설명되지 않은 채, 사물의 사용 가능성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그 사물의 고유한 기능적 측면이 다루어지지 않은 채 저마다 하나의 무늬를 이루고 있는 한 부분으로서 기능을 부여받고 잘 버티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의 무늬로 완성된 작품은 오히려 눈에 먼저 보이는 그 무늬 이상의 의미로서 잘 버티어 내고 있다. 다만 작가는 친절하지 않게 그'~ 이상의 의미'를'~처럼'보다 설명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이 부분을 새롭게 이해한다면, 자신의 작품에서 이 부분을 강조한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작품 앞에 서 있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의미를 제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제작한 의미를 온전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도 미쳐 그녀의 제작된 의미에 다가서지 못한다. 작가와 우리는 못-하는가, 안-하는가?

서희화_囍-happy_핸드폰케이스에 아크릴채색_가변크기_2009
서희화_囍-어해도Ⅰ_플라스틱에 아크릴채색_가변크기_2006
서희화_囍-문자도-신_플라스틱에 아크릴채색_가변크기_2007

서희화는 하고 있다. 하고 있는데 충분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의미를 새롭게 전달하려고 하는데 우리에게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단순하게 이런 저런 전통 문양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품 또한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그녀가 제시하는'기쁠 희'로서 囍(쌍'희'는 기쁠 희를 쌍으로 다룸으로써 기쁨이 두 배 세 배되기를 바라는 옛 한자문화권의 오랜 전승된 이미지상징이다.)가 전시장 벽면에 제시된다고 해서 우리가 기쁨을 가지게 될 까? 모란꽃 작품이 원래 모란꽃 도상이 가지는 그런 기복사상에 기준하여 오늘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구나 전시장에서 그렇게 기복되어지는 것을 축원이나 하겠는가? 작가는 무모하지 않다. 작품은 작가의 설계에 의해 면모를 드러낸다. 囍를 하나의 예로 다루어 보자. 폐기된-폐기되기 전에 무수히 많은 의미로 다루어졌을-손전화의 장식을 목적으로 하는 "핸드폰 케이스"들은 작가의 囍라는 설계 안에서 조합되면서 囍라는 작품을 위해 가공되어진다. 그래서 설계의도가 囍를 잘 드러내도록 그 사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그 사물들은 囍를 위해서 가공될 때 작가가 부여하는 다양한 "핸드폰 케이스 이상의 것"으로 다루어지면서 이모티콘 이라든지 기호와 부호로 촘촘히 장식된다. 작가는 여기까지 자신의 작품을 과정으로써 제압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낸 새로운 의미를 그저 囍 안으로 감추고 만다. 아마도 작가의 성격이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과감하게,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추측하지 않는 범위에서, 작품만을 보자면 작가는 작품을 통해 감상자를 그 이상을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하지 않고 기다리는 편이다. 기다리는 것은 옳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아쉽다. 만일 囍가 더 도발적으로 설치된다면, 그래서 작품이 공간에서 차지하는 공간 장악력으로 감상자가 그 사이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유도된다면 그녀가 제안하는 새로운'제작된 의미'는 명료하게 전달될 것이다. 설치만의 문제인가? 규모의 문제인가? 그렇다. 여기서 사족처럼 부연설명하자면 사물은 두 가지의 규모를 가진다. 하나는 그 외형을 결정하는 사물 외형의 한계치로서 규모를 가진다. 다른 하나는 사물이 사물답게-사용 가능성이라든지, 사물이 무엇을 의미한다든지 할 경우에 적절함으로 유지되는 단 하나의 규모가 있게 된다. 아직 이 문제를 그녀는 해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기다리지만 우리는 가지 못한다. 그녀의'제작된 의미'를 향해서 그렇다.

서희화_囍-화조도Ⅰ_플라스틱에 아크릴채색_116×91cm_2009
서희화_囍-화조도Ⅱ_플라스틱에 아크릴채색_116×91cm_2009

서희화는 작품으로 어떤 의미를 제작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우문이다. 작가의 작품은 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세계를 지속적으로 열어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때, 그 세계를 다양하게 되묻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희화의'제작된 의미'를 추적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간명하게 무엇으로 있는지 탐색하지 못한다. 최소한 그녀는 폐기됨으로 남겨져 자신에게 넘겨진 것들로부터 폐기됨을 걷어내고 새롭게 그것을 보게 한다. 이 점은 정크아트와 팝계열의 가벼운 사물에 리-터치와 다른 방식으로 그녀가 사물에 개입하는 방식이다. 방법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작가로서 세계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통하자고 열어 놓고 기다리는 그 곳이다. 우리는 그 곳을 방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녀의 작품을 문양으로만 파악한다면 아직 우리는 그녀가 열어둔 그 곳을 방문할 준비가 부족한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작품이 가져야 할 적절한 규모를 결정해 주지 않는다면 그녀 또한 자신이 열어 놓은 그곳을 열어 놓고 닫아버리는 것이 된다. **마지막 사족 : 의미는 뜻이다. 뜻은 사물 안에 담긴 것이 아니라 사물에 그러한 것으로서'~처럼' 또는'~만큼'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으로 담아내어 놓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 이해하는 그 차원에 머무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의미를 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은 항상 누군가에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서희화는 이 부분을 깊이 사고하고 있으며 아직 머뭇거리거나 완전히 자신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 이섭

Vol.20091113c | 서희화展 / SEOHEEHWA / 徐希和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