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적 자연성 A Metaphorical Nature

강혁展 / KANGHYUK / 康赫 / video.installation.photography   2009_1203 ▶︎ 2009_1209

강혁_바람나무와 애드벌룬(wind tree and ad-balloon)_사진_ 84×119cm_2009 어느 가을 날 ND필터를 이용해 바람나무와 애드벌룬을 약 20분 가량 담아냈다. 자연성에 대한 주제를 살리며 바람나무 작업의 연장선상에 애드벌룬이라는 인공물을 함께 배치한다.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동영상과 사진은 많은 차이가 있다. 읽히는 방식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로가 갖고 있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진다. 요점은 집약의 미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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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 인스타그램_https://www.instagram.com/Kang_hyuk_portfolio/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인천아트플랫폼 INCHEON ART PLATFORM 인천시 중구 해안동1가 10-1번지 Tel. +82.(0)32.760.1000 www.inartplatform.kr

경계를 넘어서, 자연과 직면하고 존재를 열다 ● 은유적 경계(2005), 경계 속의 시간(2007), 은유적 자연성(2009). 작가 강혁이 그동안 자신의 작업에 부친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을 보면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논리를 가늠하고 재구성할 수가 있다. ● 은유적 경계와 관련하여 작가는 무엇보다도 경계를 인식하고 있는데(경계와 탈경계의 인식은 근대와 후기근대를 가름하는 핵심논리이기도 한데, 근대의식이 경계를 강조한다면, 후기근대의식은 그 경계의 해체를 지향한다), 이때의 경계는 경계 자체로서보다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이다. 말하자면 문명과 자연을 가름하는 경계에 대한 비유적 표현인 것이며, 종래에는 문명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서로 합치되고 봉합되는 어떤 지경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 또한 경계 속의 시간과 관련해서는 특히 작가의 미디어를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영상과 영상설치 그리고 사진을 매개로 해서 자신의 작업을 풀어내고 있는데, 영상매체의 키워드는 시간성의 기록과 서사의 함축적 표현인 것이며, 사진매체의 핵심은 존재성의 기록과 서사의 함축적 구현인 것이다. 그 현상하는 개별양상은 다를 수 있으나, 그 밑바닥에는 서사적 형식 속에 시간성과 존재성을 담아낸다는 공통분모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근작인 은유적 자연성이란 주제에서 작가는 전작에서 시도된 문명과 자연과의 대비로부터 자연의 본성을, 자연성을 추수한다. 여기서 자연은 말하자면 감각적이고 질료적인 자연으로서보다는 그 감각적이고 질료적인 자연을 가능하게 해주는 계기로서의 자연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에 의하면 피직스보다는 나투라에 가깝고, 스피노자의 논법을 빌리자면 소산적 자연보다는 능산적 자연에 기울어진다. 우리식으로 옮기자면 기에 가깝다. 모든 감각적이고 질료적인 사물현상의 작동원리라고나 할까. ●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대략 경계에 대한 인식론(경계를 강화하기보다는 허무는데 복무하는), 시간(성)의 기록, 그리고 자연(성)의 표상형식에 의해 견인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각 계기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강혁_사진을 찍다 혹은 보다 (taking a photo or seeing)_사진_21×29cm×6_2009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 현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 중심적 사고, 좁게는 인간의 시지각적 특성에 근거한 관점이다. 빛을 모으는 수정체가 없다면 도대체 보여 진다는 것들의 형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수많은 빛의 입자 혹은 파동이 반사, 흡수, 혹은 투과를 해대며 튀어 다니는 카오스의 형상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는 의미와 아주 밀접한 사진을 찍는다는 것에 대한 물음에서 이번 작업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수정체에 해당하는 랜즈를 때어내고 필름에 해당되는 디지털카메라의 CCD에 들어오는 빛을 시간차를 두고 단속시킨다. 어떠한 구체적인 형상이 초점면에 새겨지지 않았을 뿐 나는 분명히 여러 상황을 대하며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색다른 관점이 집약된 한 장의 사진을 얻는다.

영상작업과 영상설치작업 ● 작가는 「비, 바람, 넝쿨 그리고 자연율」에서 또 다른 작가인 강하진과의 공동작업을 시도한다. 자연을 소재로 한 자신의 영상작업을 추상회화로 그려진 캔버스(자연율) 위에다가 투사한 것이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말하자면 자연의 감각적 현상보다는 그 이면의 자연의 본성을 각각 영상작업으로(강혁) 그리고 추상회화의 논법으로(강하진) 구현한 것으로 보고, 이를 중첩시켜 그 의미(자연성)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 강하진은 작가 강혁의 부친이기도 하다. 이렇듯 부친과의 협업을 실현한 것은 작가의 경우에 그다지 낯설지가 않은데, 여러 형식으로 자신의 작업에 가족서사를 끌어들이고 녹여내는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존재론적 연대를 실현한 것이다. ● 그리고 이 작업에서 주목할 점으론 캔버스가 스크린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작가는 여타의 오브제를 끌어들여 스크린을 대체하는데, 이를테면 녹 쓴 철판이나 일종의 공산품 쓰레기랄 수 있는 폐철, 석고기둥이나 바닥에 흩뿌려진 소금(여기서 소금은 문명의 상처를 치유하는 주술적인 의미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종이포장박스(침묵 2) 위에다 영상을 투사한다. 오브제를 스크린 삼아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함으로써 일종의 중의적 의미(이를테면 실제와 영상이 부닥치고, 버려진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향수와 자연이 서로 스며드는 것과 같은)를 겨냥한 것이다. ● 그리고 작가는 자연을 소재로 한 일련의 영상작업들, 이를테면 「비, 바람, 나무」, 「연못과 아이」(빛과 물은 모두 파동을 공유한다) 같은 작품에서 자연의 본성에 대한 형식실험을 꾀하다가, 「바람, 호수」, 「흐름」과 같은 작품에 이르면 자연의 본성은 마침내 새로운 국면을 드러낸다. 자연의 모호한 실체(경계?)에 대한 천착은 결국 자연의 감각적 질료와 관련한 일체의 선입견을 지우고 교정하는 과정으로서 현상하고, 마침내 그 질료가 순수해지는(순수한 질료) 어떤 지점을 오롯이 드러낸 것이다. 자연의 감각적 현상은 빛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인데, 그 빛이 가져다준 일체의 정보를 지우고, 순수한 음영으로만 치환해놓은 화면이 마치 무색 엠보싱 화면을 보는 것 같은 의외의 지점을 드러낸다. 감각정보를 최소화함으로써 암시력을 강조했다고나 할까. 실제로 이 작업에서는 수면에 이는 파동이나, 빗방울이 듣는 바닥,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와 수런거리는 숲과 같은, 자연의 감각적 현상을 넘어 자연이 그 이면에 품고 있을 비의적인 생명력이 강력한 호소력으로써 다가온다.

강혁_나무 빛 그림자 (tree light shadow)_단체널영상, 리어스크린, 프로젝터_00:04:54_2009 일상이 즐비하게 널려있는 아파트 담벼락에 늦여름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멀리서 오는 조금은 덜 선명한 일렁이는 빛방울이 근경의 잎새들이 만든 세밀한 그림자들의 움직임과 함께 하고 있었다. 카오스와도 같은 수많은 세상의 움직임들이 어떤 절대적 질서를 연상시키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다. 카오스 자체가 절대적 질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특정한 신이 주는 질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서 신이기도 한 부분과 전체가 하나인 자연성에 대한 경외이다.

한편으로, 이렇듯 감각정보를 최소화함으로써 오히려 암시력을 강조한다는 것은 표현의 경제학과 관련한 핵심논리일 수 있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작업이 「시냇물 2」인데, 모니터를 가급적 벽 가까이 붙여 영상과 음향을 숨기면서 드러내는 방식이다. 원래 빛은 어둠 속에서 더 두드러져 보이고, 작은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리고, 희박한 존재가 더 강력하게 어필되는 법이다. 일종의 역설이 작용하는 것인데,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예술을 예술이게 해주는 결정적 계기랄 수 있다(작가는 이미 전작에서 영상을 숨긴 채 초소형 거울에 비친 반영상을 통해 이러한 역설을 문법적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 ● 작가의 영상작업에는 이렇듯 자연의 이미지와 함께, 이따금씩은 「디지털 레인보우 2」와 같은 도심의 이미지를 소재로 한 경우도 있다. 도심을 지나치는 자동차 불빛 등 비 오는 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야경을 포착한 것을 반전시킨 이미지로써, 자연을 상징하는 빗방울과 문명을 상징하는 인공적인 불빛이 하나로 어우러진, 추상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이미지 효과를 연출해내고 있다. 그 현란한 이미지 효과가 일종의 디지털 페인팅이나 디지털 드로잉, 혹은 움직이는 드로잉으로 부를 만한 형식적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이렇듯 도심의 야경을 서정적이면서도 경쾌하게 해석해내고 있는 이 작업에서 작가는 흡사 핀을 맞추듯 불빛의 움직임을 음율(음악)에 맞춰놓고 있는데, 이로부터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가 서로 통하는 일종의 공감각을 실현하고 있기도 하다. ● 그런가하면, 본격적인 영상설치작업으로 범주화할 만한 작업 「치유 2009」에서 작가는 외관상 서로 상반돼 보이는 두개의 이미지를, 자연과 초상 이미지를 대비시킨다. 자연과 문명을, 자연과 도시를 대비시키던 것에서 나아가, 아마도 자연과 문명, 자연과 도시를 매개시키는 주체인 인간을 등장시켜 서사의 경계를 확장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초상 이미지를 작가는 자화상이라고 명명하는데, 사실은 작가의 일가 중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 자신을 대리하게 한 것으로서, 가족의 존재론적 연대가 또 다른 형식을 덧입고 현상한 경우라 하겠다(그 경우는 작가의 또 다른 작업 「자화상 2」에서도 확인된다). 내 속엔 아버지라는 타자가 들어와 있고(아버지의 그림 위에 영상을 투사한 공동작업), 나아가 작은 아버지라는 또 다른 타자가 내 인격의 일정 부분을 형성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업에서의 치유는 아마도 자연과 문명, 자연과 도시, 자연과 인간, 나와 가족 등 외관상 서로 상반돼 보이는 이질적인 두 지층간의 존재론적 연대감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강혁_디지털 레인보우 2 (digital rainbow 2)_2채널영상, 프로젝터_00:26:27_2009 "물과 빛이라는 매질(媒質)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자연의 매질(媒質)들이 만나서 부서지는 어떤 지점에 대한 경험은 무지개를 발견하는 즐거움에 견줄만 하다."

이와 함께 작가는 이 작업에서 철판이나 보드로 세로로 긴 사각기둥을 만든 다음, 그 안쪽의 사방 벽면에 거울을 설치하고 빔을 장착한다. 거울을 통해 반영된 상(자연과 초상 이미지)이 무한정 증식되게 한 것이다. 똑같은 형상이 반복 재생산되는, 마치 만화경과도 같은 이 이미지들의 연쇄가 원본과 복제, 모본과 사본과의 불투명한 경계에 연유한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크라 이론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즉 이 이미지들의 연쇄 가운데 진정한 자연은 무엇이며, 진정한 나의 실체는 누구인가. 자연은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그 진정한 의미가 지연되고, 나의 진정한 실체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다. 이 작업의 이면에는 자연성 곧 자연의 궁극적 실체에 대한, 더불어 나의 진정한 실체에 대한 작가의 심각한 자기반성이 놓여있다. ● 이외에도 작가는 「나무, 빛, 그림자」에서 서사의 영토에 그림자를 끌어들이는가 하면(말을 하는 그림자, 의미의 주체로서의 그림자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비와 개」에서는 어둠(개로 표상되는)이 그 속에 품고 있는 야성(혹은 야생)과의 우연한 맞닥트림을 통해 존재론적 불안의식과 경외감이 뒤섞인 이율배반적 감정을 드러낸다(두려움은 친숙한 것에서 온다. 내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친숙한 기호가 불현듯 그 틈새를 열어 이질적인 기호를 뱉어낼 때 두려움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사실 나는 그 기호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며, 그것에 대한 나의 앎은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강혁_침묵 2(silence 2)_포장박스를 이용한 영상설치_가변크기_2009 저 멀리 고원 너머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은빛 물고기때 처럼 눞고 있는 나무 무리를 본 적이 있는가 ? 바람에 부데끼는 나뭇잎 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에서 바람과 나무의 조우가 주는 섬세하지만 가볍지 않은 영겁의 은유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 문명의 이기를 위해 소용의 단말적 가치를 위해 취해진 종이 포장박스 위로 조용히 그 초 여름 내 가슴 위에서 두근거리던 기억을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뉘였다. 바람의 흔들림이... 소리없는 외침이 더욱 더 진한 생명의 아름다움이... "세계를 직면한다는 것. 인식의 시점을 이곳에 두고... 그 곳에 작은 흔들림이 있다. 적어도 시작은 그러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세계이다."

사진작업 ● 강혁은 근작에서 영상작업들과 함께 사진작업을 병행한다. 그 메커니즘은 사뭇 다르지만, 사실 영상작업과 사진작업은 상당한 친족성이 있다고 봐야한다. 움직이는 화면이란 결국 움직이지 않는 화면들의 연쇄인 것이며, 움직이는 화면은 그 속에 움직이지 않는 화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작가는 「사진을 찍다 혹은 보다」에서 특이한 사진 찍기를 제안한다. 즉 인간의 눈에서 빛을 모아주는 수정체에 해당하는 렌즈를 제거한 상태에서 찍은 사진으로써, 피사체의 대략적인 윤곽만을 겨우 암시할 뿐인, 부드러운 음영과 질감과 색감이 감지되는 이미지가 흡사 미니멀리즘 추상회화를 연상시킨다. 실제를 전혀 조작함이 없이, 실제에 내포된 추상성을, 친숙한 기호에 내포된 이질적인 계기를 오롯이 드러낸 것이다. 작가의 이 사진은 추상과 구상, 추상과 형상, 실제와 추상간의 경계와 구분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한다. ● 그리고 「부분과 전체」로 명명된 또 다른 작업에서 작가는 일종의 합성사진을 시도한다. 약 500여명에 달하는 여학생들의 명함판 사진을 찍고 이를 포토샵으로 낱낱이 합성한 것이다. 부연하면, 40여명(아마도 한 반의 학생에 해당하는 수치인)의 초상사진을 합성해 10여장의 초상사진을 만들고(아마도 전체 학급의 숫자에 해당하는), 재차 10여장의 초상사진을 합성해 최종적으로 단 한 장의 초상사진을 만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사진을 합성하면 많이 겹쳐 보이는 부분이 중첩돼 하나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추출된다. 실제로도 10여장의 사진들이 서로 어슷비슷해 보인다. 그 자체를, 전체로 수렴되는 부분의 관성 (전체와 부분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이 모든 계통학과 계보학의 관성임을 넘어 생물학의 관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까? 아마도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강혁_비 바람 나무 (rain wind tree)_단채널영상, 모니터_00:02:19_2009 비가 내리던 날 나의 바람나무가 눕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간명한 방법으로 서로를 부데끼고 있었다. 색다른 방법으로 교차편집을 하고 있다. 어디선가 우산을 들고 나타난 아이가 이번 작업을 완성하고 있다.

500명의 개별성이 사라져버리고 일종의 공통초상, 표준초상이 나와진 이 사진작업의 이면에는 차이를 내포한 반복에의 인식과 함께 후기근대의 자의식 내지는 주체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즉 내 속에 네가 들어와 있고, 네 속엔 내가 들어가 있다. 너는 나에게 호명되고, 나는 너에 의해 정의된다. 나는 이질적인 타자들(너)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나는 곧 너이며, 주체는 곧 타자다. ● 이와 함께 작가는 또 다른 사진작업 「바람나무와 애드벌룬」에서 일종의 장 노출사진을 제안한다. 주지하다시피 일정시간 카메라의 조리개를 열어 놓은 채 사진을 찍으면 그 시간동안 피사체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주로 크고 작은 움직임의 궤적으로 나타난)을 한 장의 고정된 화면 속에 낱낱이 축적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축적의 양상이 합성사진과는 사뭇 다르다. 적어도 메커니즘의 속성상 축적된 상들은 합성사진 속에 낱낱이 포개지지만, 노출사진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노출시간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움직이는 상이 겹쳐보이다가도, 정작 그 시간이 더 길어지면 모든 움직이는 상들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전통적인 사진의 미덕으로 알려진 현존성에 연유한 흔들릴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신념과는 정반대의 지점인 부재가 불현듯 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재는 말 그대로의 부재는 아니다. 그 이면에 존재(혹은 존재의 흔적)를 함축하고 있는 부재며, 존재를 증명하는 부재다. ● 이렇게 멀리 보이는 숲은 바람이 만들어준 미세한 움직임으로 그 세부가 뭉개져 보이고, 이보다 그 움직임이 더 큰 하늘에 떠있던 애드벌룬은 아예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없다. 제목이 아니라면, 애드벌룬의 존재는 사진 속 어디에서도 확인해볼 길이 없다. 만약 애드벌룬이 희망과 이상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희망과 이상은 이 사진에서처럼 부재하는 것으로만 존재하는 어떤 것, 부재를 통해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닐까. ● 작가는 같은 방법으로 「아들과 아내」를 사진으로 찍는다. 노출된 시간만큼 행복이 흐릿해졌다가, 마침내는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불안감이 스며있다. 또 다시 가족을 매개로 본 존재론적 연대감을 확인시켜준다.

강혁_흐름(flow)_철판을 이용한 영상설치_91×120cm_2009 그간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많은 자연현상-충돌 혹은 경계의 현장-들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러한 매질간의 만남은 파동을 일으키고 그것은 빛의 산란을 수반한다. 그렇게 여러 형태와 아름다운 색들이 부서지고 흐르지만 이번만큼은 그 빛이 말하는 세계를 차단하고 매질의 흐름만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렇듯 내 작품 속의 자연은 부분이며 전체이다.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며 그것이 곧 전체이기도 한 세계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혹은 존재 자체)를 구별한다. 그리고 존재자(사물의 감각현상)의 피막을 찢고 존재(존재의 본질)에 이르기를 주문한다. 그러나 정작 이를 실행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존재자는 개념으로 코팅돼 있기 때문이다. 그 개념의 코팅을 걷어내고 존재 자체, 현상 자체와 직면하는 일이 현상학적 에포케다. 세계 자체와 직면하는 일이 시작(존재론적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며, 그러므로 시작이 이미 세계이다. 불투명한 경계에 대한 인식이나, 시간(성)의 기록을 매개로 해서 자연의 본질에, 존재의 궁극에 도달하려는 작가의 기획은 결국 이런 세계 자체와 직면하는 일과 깊게 연동돼 있다. ■ 고충환

Vol.20091203a | 강혁展 / KANGHYUK / 康赫 / video.installation.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