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HILL

김윤정展 / KIMYUNJEONG / 金允貞 / painting   2009_1210 ▶︎ 2009_1216

김윤정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94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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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210_목요일_05: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30am~07:00pm

갤러리M Gallery M 서울 중구 저동 2가 48-27번지 금풍빌딩 1층 Tel. +82.2.2277.2438 www.gallery-m.kr

추상화된 삶 속의 공모된 침묵 ● 『Silent Hill』이라는 부제로 열리는 김윤정의 작품들에는 아파트 숲으로 대변되는 현대적 주거 공간과 주변지역의 산책로 등 인공적 환경이 많이 등장한다. 이 아파트 숲이 거의 자연발생에 가까운 불규칙적인 주거지를 '합리적인' 계획에 따라 구획한 것이듯, 시원하게 뻗은 산책로나 자전거 도로에 적절한 녹지까지 갖춘 공간은 자연스러운 풍경과 거리가 있다. 정치가나 도시계획가의 이상적인 관념에 의해 도시환경은 그 장소에 꼭 어울릴만한 주체들 또한 창조하는데, 김윤정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익명의, 그리고 무언의 인간들이 그들이다. 어두침침하고 구불구불하고 몸과 몸이 부딪히는 재래식 터전과 구별되는,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시공간 속의 그들은 한 작품에 적나라하게 나타나듯, 외계인같이 보이기도 한다. 널찍하게 조성된 이 인공낙원 속 인물들은 모두 외따로 존재한다. 한 화면 속에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있어도, 그들을 이어주는 심리적 연결선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접촉하지 않고 함께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각자의 생각이나 행동에 몰두한다. 그러면서도 비슷한 모양새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이 보인다. 마치 대중 개인주의처럼 말이다. 그것은 개인주의를 고무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하게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쾌적하기 그지없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윤정의 작품에는 건축 조감도의 장면, 가령 자연과 건축이 적절한 비율로 잘 조성된 널찍한 공간에 띄엄띄엄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할 법한 유토피아적인 분위기가 삭제되어 있다.

김윤정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30cm_2009

그렇다고 이런 장면이 비인간적이라는 식의 비판적인 태도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작가는 자신 주변에 펼쳐진 그 황량한 장면을 그대로 직시하며, 자신을 찔러왔던 가장 결정적인 순간들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이를 변형시켜 그림으로 떠낸다. 장소는 전형적인 서울의 한 지역이다. 인공폭포와 하천을 끼고 있는, 시민공원, 생태공원 등으로 이름 붙여진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장소들 속의 사람들은 침묵에 잠겨 있는데, 침묵은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말을 하는지 안하는지와 무관하게, 공간 자체를 누르고 있는 침묵을 반향 한다. 『Silent Hill』이라는 전시부제는 일상적인 주거지나 근린자연을 가리키기에는 적절치가 않아 보인다. 그것은 마치 고래의 유적지나 오지의 자연처럼 신비로운 침묵에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 전시부제는 자기도 몸 담그고 살고 있는 시공간이 갑자기 낯설어진 느낌으로 다가오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작가는 통영 출신으로, 도시로 이주한 후 이 곳이 고향에 비해 매우 시끄럽고 빨리 돌아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도시적 번잡함과 분주함 한가운데서 정적과 침묵을 발견한다. 그것은 이 전시의 작품에서 어둠 속에 잠긴 야경에 전형적으로 드러나지만, 작년에 발표한 작품을 보면, 파티 장소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면에서도 각자의 침묵 속에 빠져있는 군상들이 발견된다. 군중 속의 고독이랄까, 현대인간 본연의 모습이 이번 전시에서도 지속된다. 그들은 무엇인가 상실한 존재들이다. ● 어둠 속에서 포옹하는 두 사람을 그린 작품은 인간관계의 추상성을 잘 보여준다. 타인과의 가장 친밀한 순간이기도 한 이 장면은 얼굴이 보이는 여자는 물론이고, 등을 보이는 사람도 종잇장 같이 창백하고 비실체적이다. 어둠 안에서 드러나는 인체의 실루엣은 상대를 껴안은 팔을 잘라 버린다. 그 둘은 영원히 포옹할 수 없을 듯하다. 아크릴로 그려진 그림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호출한 듯한 펜화들은 그 표현의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마치 수집된 표본들처럼 맥락이 제거되어 있다. A4 사이즈 크기의 판화지 70장에 그린 펜화 속 등장인물들이나 사물들은 특별한 배치 기준, 요컨대 기승전결 식의 서사적 라인이 없이 그리드 형식으로 배열된다. 그리드 같은 냉랭한 배열 방식은 임의성과 우연성을 질서화 하는 방식의 하나로, 역사적이고 미학적인 근대성에 그 흔적을 깊이 남긴다. 한 장면에 포커스가 맞춰진 사진처럼 대개 한 장에 하나의 대상이 고착되어 있다. 사진은 물론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인 순간 멈춤 동작 특유의 불확실성이 두드러진다. 화분이나 잡초로 대변될 수 있는 빈약한 자연, 의자나 목마 같이 얼마 전까지 사람의 손때가 묻었을 법한 물건이 새로운 상품에 밀려 방치된 모습도 발견된다. 그것들은 아크릴로 그려진 그림 속에서 뛰쳐나오거나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아크릴 회화와 펜화는 호환적이다. 이러한 호환성은 표본이 아닌 장면들에도 관철되는 삶의 추상성, 요컨대 구체적인 맥락의 사라짐을 반증한다. 맥락의 사라짐이라기보다는, 좀 더 추상화된 새로운 맥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면들은 그것을 내가 살아갈 만한 충만한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심리적인 거리감이 발견된다.

김윤정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30cm_2009

장면과 등장인물의 익명성을 강조하기라도 하듯이, 모두 「무제」로 붙여진 제목은 사막 같은 현실을 표현한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완벽한 구색을 갖춘 두 명이 관객을 향해 걸어온다. 마치 쌍둥이처럼 체격도, 복장도 비슷하고 데칼코마니 이미지처럼 좌우 대칭이다. 그들의 몸에서 떨어진 짧은 그림자는 시간대를 알려준다. 그 시간에 빨간 운동복을 입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남편을 출근시키고 집안일을 끝낸 후, 오후에 잡아놓은 쇼핑 스케줄 사이에 잠시 짬을 내 운동 하는 주부 일 것이다. 어떤 시공간에 배치된 인물에서 그 사람의 삶의 단면이 가차 없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현대성이다. 저 멀리 보이는 철제 탑이나 교량 같은 인공구조물은 강한 자연광 탓인지 희끄무레하게 보인다. 그것은 그림 바탕 면과 거의 밀착된 평면성을 가진다. 전경에 지푸라기 더미 같은 식물이 더해지면서 완전히 사막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외계인처럼 중무장한 그들은 사막을 통과하는 중이다. 김윤정의 작품은 가감 없는 현실자체가 환상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대 파국 이후 지상에 남겨진 존재가 취할법한 그들의 자태는 잡균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듯이, 환경 그리고 바로 옆 인간과 단절되어 있다.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올 정해진 여정에 매우 충실한 그 모습은, 이 외계적 장면을 당면한 일상의 현실로 갑자기 다가오게 한다. ● 뻥 뚫린, 그리고 텅 빈 공간 속에 배치된 인간들에게 보이는 수동성은 대낮의 장면을 그린 또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수영장인지 구기용 운동장인 모호한 푸른 바탕으로 널찍하게 조성된 곳을 바라보는 이들은 각자 고립되어 있다. 무채색으로 칠해진 길, 하얗게 탈색된 식물과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인지 간판인지 알 수 없는 구조는 맥 빠진 풍경 그자체이다. 한낮의 환한 빛에도 불구하고 칙칙하기 그지없다. 사람들도 거의 실루엣만으로 형태화되어 있고 단색조로 칠해져 실체감이 부족하다. 환경과 인간 모두에서 발견되는 이 실체감 없음이 바로 이 장면들의 현실성이다. 작가는 인간이 꾸며놓은 과정에서 이상하게 변해버린 자연과 환경,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에 주목한다. 인공성은 야경에서도 두드러진다. 두개의 나무를 그린 작품은 마치 하나는 실체, 다른 하나는 그림자 같이 보이는데, 그것은 인공조명에 의해 그 실체감이 좌우되는 대상의 면모를 드러낸다. 불타오르는 듯한 식물의 외곽선과 식물에서 죽죽 흘러내린 물감은 어두운 밤의 정조와 뒤섞여 강렬함을 자아낸다. 인공조명이 부족한 껌껌한 장면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작가에 의하면 그곳은 자연 생태를 위해 조경하지 않고 방치한 부분으로, 운동코스 안에 속해 있다. 밤 산책로에서는 인간이고 자연이고 할 것 없이 유령 같은 형색이다. 간접광선으로 사물들이 흐릿하게 보이는 와중에 사람 위로 그어진 야광 색 물감 두 줄이 발광하는데, 마치 빠져나가는 혼령처럼 으스스하다.

김윤정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94cm_2009

김윤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공간은 근대적 도시계획과 재개발의 산물로, 자가용으로 가능해진 수평적 확장과 그에 상응하는 수직적 확장이라는 구조를 가진다. 이 공간의 침묵은 추상적인 시공간의 구획의 산물이다. 주거지 안팎의 공간들은 마치 고속도로처럼 빨리 통과하기 위한 곳이지 사색이나 대화를 위해 머무는 곳이 아니다. 산책로에서 조차 한가한 어슬렁거림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천 주변에 조성된 길을 따라 완전 복장을 갖춘 채 빠른 도보나 자전거로 이동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여가 시간마저도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경직된 모습이다. 과도한 업무나 공부, 노동을 벗어나 있는 사이길 조차도 고속도로처럼 뻥 뚫어놓고 단위시간 당 빼야할 체지방으로 계량화되는 공간에서 여가의 본래적인 모습은 발견될 수 없다. 산책로의 인간들은 모두 갈 길 바쁜 이들처럼 앞만 바라보며 각자의 여정을 서두른다. 그들에게 심리적이거나 육체적인 교류는 보이지 않으며, 각자의 목표를 향한 집중만이 발견된다. 김윤정의 작품은 길 위의 사람이라고 비유되는 인생, 그것에 대한 음울한 풍자이다. 그들이 통과하는 길은 한강에서 몇 미터 따위 등의 정보가 가득한 의 추상적이고 부호화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속에서 보내는 시간 역시 합리적으로 계측된다. 이러한 현대적인 삶의 무대를 채우는 것은 균질적인 삶을 향한 기호들이며, 이 기호는 사회적 권력이 작동하는 규범의 표시이다. 근린 자연시설을 끼고 있는 대단지 주거공간은 소비의 장소로 지정된다. 한가한 시간대의 산책로나 운동코스는 물론, 쇼핑몰이나 백화점 등 대규모 소비시설에 있어도 각자의 취향과 욕망에 몰두하는 침묵하는 개인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현대적 삶의 특징이다. ● 자본주의 사회는 시간과 공간이 고도로 압축된 역사적 단계를 의미한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가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서 지적하듯이, 시공간의 압축의 결과는 주체와 객체의 가속화이고, 이러한 경향은 모든 것의 실체를 비워낸다. 비실체화는 만물의 코드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망각한 채, 빠른 속도로 주파하기 위해서 배열된 시간과 공간은 무의미와 단조로움을 낳는다. 그것이 김윤정의 작품에 나타난 침묵의 실체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기호화와 그 기호들의 회전시간의 가속화를 묘사하는 저자들은 가속의 결과로 생겨나는 즉시적인 시간과 그에 의해 발생되는 무장소성을 강조한다. 가속화된 시간 주기를 통해 쏟아지는 소비품과 정보는 즉각적인 폐기와 망각을 유도한다. 그것은 인간적이거나 자연적인 리듬과 완전히 분리된 추상적인 시공간을 낳는다. 대단지 아파트촌으로 대변되는 주거공간이나 도시 계획가들에 의해 조성된 근린자연 시설은 사실적이면서도 도면같은 비현실성이 존재한다. 김윤정의 작품은 재현성이 있으면서도 평면적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항시적인 소음에 잠겨있기에 소음을 소음으로서 인지할 수 없는 상태, 예컨대 너무 시끄러워 차라리 조용한 것 같은 상황과 유사하다. 자극이 너무 쇄도하면 무기력하게 되고, 정보가 너무 많으면 무의미도 많아진다. 바로 옆 사람이나 이웃과는 전혀 교류하지 않으면서, 통신기기에 하루 종일 매달려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에도 마찬가지의 역설적 상황이 발견된다.

김윤정_characters drawings_종이에 펜_각 28×21cm_2009

추상화된 생산과 소비의 주기로 구획되어 있는 인간에게, 침묵은 대화 보다 더 잘 어울리는 방식이다. 대중으로 대표되는 현대인은 그 자신도 인정한 현대적 삶의 풍요와 질서에 동화되어 있다. 수직 수평으로 뻗어나가는 인공화 된 환경은 그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스트의 이상과 달리, 그리드로 구획된 삶에서 생기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중매체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재잘거림을 제외한다면, '그곳'에는 질서 유지와 프라이버시라는 명목으로 강요된 침묵만이 가득하다. 이 공모된 침묵을 깨는 것은 달갑지 않은 사건사고일 뿐이다. 공모된 침묵을 깨는 사건사고는 곧장 처리될 것이다. 우리는 잘 정리된 근대적 삶의 환경에 인간적인 삶의 온기가 사라진 역사적 유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차드 세넷은 육체와 건축의 관계를 다룬 문화사를 서술한 저서 『살과 돌』에서 혁명기에 구시대의 질서를 일소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광장을 내며 구 시가지를 정비하여 시야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한 순수한 부피의 공간을 창조했던 18세기의 혁명가들의 기대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서술한 바 있다. 『살과 돌』은 근대의 혁명가들이 순수한 부피가 공간, 어떠한 장애도 없고 한계도 없는 부피, 모든 것이 숨김없는 투명한 공간에서의 자유에 대한 혁명적 상상력을 규정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자유로운 공간에서 일어난 것은 군중의 활기 있는 움직임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비어있는 부피는 파악하기 어려운 권력 작동을 위한 적절한 공간으로, 그 안에서 군중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군중은 집단적으로 훔쳐보는 이가 되었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공간, 순수한 부피 속에서 혼돈과 무관심이 군림했다. 저항을 극복하고 장애물을 제거하고 공허한 빈 판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자유, 순수하고 투명한 부피처럼 여겨지는 자유는 육체를 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혁명기 유럽의 도시에서 발견되는 이 역설적 상황이 현대의 시공간에도 적용된다. 추상적으로 구획된 도시의 시공간은 머물기보다 통과하기 위한 곳이며, 현대 사회의 지형을 항해해 나가는 것에는 최소한의 육체적 노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들끼리의 접촉도 적다. 근대의 도시환경은 수동적 육체를 낳았던 것이다. 인공적으로 펼쳐지는 스펙터클과 권력의 진정한 형태인 소외감의 유지는 상보적이다. 김윤정의 『Silent Hill』에는 주변 환경과 수동적인 관계를 맺는 익명의 인간들이 등장한다. 환경과의 관계는 인간들 간의 관계에도 계속된다. 근대 도시의 탁 트인 시야는 인간을 침묵하게 하고, 수동화 된 대중의 침묵은 추상적 그리드의 확장을 야기한다. 도시는 개인으로 분리시키는 움직임을 통해 지금의 형태에 이르렀다. 세넷이 지적하듯이, 타자와의 접촉이나 공동운명의 거부는 근대화라는 이 모든 움직임에 필수적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물질주의와 관련이 깊다. 그러나 물질의 생산과 소비주기의 매개체에 불과한 존재로 축소된 인간들은 개인성마저 비워낸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생산하려는 기획에서 인간성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근대의 철학적 역사적 미학적 주체는 현대의 소비적 개인으로 축소되었고, 김윤정의 작품에 잘 드러나듯이 비인간화된 삶의 무대에서 인간들 역시 진열되거나 방치된 물건들처럼 함구하게 되었다.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우회로를 천천히 걸어가는 삶을 택한 화가의 눈에 현대의 편리한 삶을 지탱해주는 불편한 진실들이 드러나려 한다. ■ 이선영

Vol.20091211h | 김윤정展 / KIMYUNJEONG / 金允貞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