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스펙트럼, 가시와 비가시의 사이

김범석展 / KIMBEOMSEOK / 金範錫 / painting   2009_1209 ▶︎ 2009_1215

김범석_쏟아지다_한지에 먹, 호분, 아크릴채색_143×132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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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209_수요일_05:00pm

후원_경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_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풍경의 스펙트럼, 가시와 비가시의 사이 ● 김범석은 자신의 작업실이 소재해 있는 여주 일대의 풍경을 그린다. 그 풍경은 자연풍경이기도 하고, 인간이 사는 동네를 그린 인공적인 풍경이기도 하고, 자연풍경과 인공풍경이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 삼투되는 경계 위의 풍경이기도 하다. 소재와 그 소재가 떠올려주는 정서적 환기를 따라 그림을 보면, 비 내리는 풍경, 이데올로기적 풍경, 그림자 풍경으로 갈래진다. 때로는 소재로부터, 때로는 그림이 떠올려주는 정서로부터 끄집어내진 이 풍경의 다양한 지점들은 따로 고립돼 있으면서도 서로 혼재해 있다. 이 풍경들은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인데, 현장사생을 통해 사물과 대상의 즉물적 현실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그 현실 속에 작가 자신의 관념과 정서,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묻어 들어가, 주관이 객관을 간섭하고, 지우고, 변형시키고,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 이런 상호작용성, 말하자면 자연풍경과 인공풍경, 객관적 풍경과 주관적 풍경의 상호간 경계 허물기는 전통적 화법과는 다른, 작가만의 독특한 방법론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해지고 더 잘 드러나 보이게 되는데, 먹과 호분을 중첩시키고, 투명한 화면과 불투명 화면을 중층화하는 과정을 통해서이다. 점층적으로 부가된 호분 자국은 화면에 희미한 막을 형성시켜, 칠흑 같이 검은 먹 속에서조차 투명성을 담보하던, 전통적인 먹그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나아가 먹선의 질감이나 색감마저 흑백의 목탄그림을 보는 것 같고, 망점이 흐려져 토너가루가 만져질 것 같은, 확대된 복사 이미지를 보는 것도 같다. 아마도 관념적이기보다는 즉물적인 동시대의 풍경을, 정경을 그려내는데 더 적합한 방법일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호분과 먹선이, 자연과 인공이, 그리고 주관과 객관이 상호 침투하고, 스며들고, 간섭하는,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특유의 화면을 그려내고 있다.

김범석_낮12시_한지에 먹, 호분_172×137cm_2009

비 내리는 풍경. 화면 속에 비가 내린다. 그러나 정작 화면 속 풍경을 온통 뒤덮을 기세로 내리는 비는 실제 비가 아니다. 작가는 먹선과 호분을 중첩시켜 서로 침투하고, 스며들고, 뒤덮게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데, 먹선으로 그린 풍경 위를 호분으로 중첩시켜나가는 과정에서 화면 아래쪽으로 흘러내려 맺힌 호분자국이다. 보통 회화적 효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호분자국을 남기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작가의 일부 그림에서 호분 자국은 아예 드러내놓고 흘러내리고 있어서, 작가가 단순한 회화적 효과 이상을 겨냥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보통 호분과 먹선은 풍경이나 정경의 틀 안에서 상호작용하기 마련인데, 작가의 경우에 호분 자국은 먹선으로 그린 풍경을 뒤덮고, 나아가 아예 풍경 자체를 해체시킬 기세다. 풍경 위에 비정형의 스크래치가 마구 뒤덮고 있다고나 할까.

김범석_힐사이드파크_한지에 먹, 호분_172×137cm_2009

그러면서도 호분 자국은 결코 화면을 완전히 덮어 가리지는 않는다. 이로써 호분 자국에 겹쳐 보이는 풍경이, 호분이 만들어준 희미한 막 뒤쪽으로 보이는 풍경이 졸지에 이면풍경이 된다. 이면풍경과 표면풍경이 서로에게 경계를 열어 합치되는 어떤 경지를 열어 놓는다고나 할까. 여기서 표면풍경은 말할 것도 없이 풍경의 감각적 지평 곧 실제의 풍경이다. 그렇다면 이면풍경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것은 작가의 주관적인 풍경이고, 심상풍경이며, 내면풍경이고, 파토스(내적 에너지)다. 비가시적인 내적 에너지가 감각적 풍경의 표면을 뚫고 가시적인 표층 위로 나와진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와(감각적 풍경) 존재 자체(풍경 자체)를 구별하면서, 존재자의 휘장을 찢고 존재 자체에 이르기를 주문한 적이 있는데, 작가의 그림은 마치 감각적 풍경이 자신을 열어 풍경 자체를 드러내 보인 것 같다. 그렇다면, 화면 속에 내리는 비는, 사실, 작가의 마음속에 내리는 비(파토스의, 내적 에너지의 외화)에 다름 아니다. 작가의 이 그림들은 풍경 속에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풍경이 어떻게 자기화 될 수 있는지, 내가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풍경이 내속에 들어올 수 있는지를 예시해준다.

김범석_철탑 위 까마귀_한지에 먹, 호분, 채색_172×137cm_2009

이데올로기적 풍경.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일이며, 따라서 자연 속엔 이데올로기가 없다. 작가의 일부 그림들은 이처럼 사람 사는 동네 곧 인공풍경 속에 스며든 이데올로기의 지점들을, 그 계기들을 보여준다. 이데올로기는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관계로부터 파생되며, 제도가 개별주체를 호명하는 방식에서 파생된다(루이 알튀세). 그 지점, 그 계기, 그 징후는 우선적으로 초등학교 교정을 지키고 서 있는 동상들에서 발견된다.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독서하는 소녀상이 착한 어린이 이데올로기를, 건물 창문 밖으로 삐죽 내밀어진 태극기가 국가 이데올로기를, 하늘을 찌를 기세로 우뚝 서 있는 대중목욕탕 굴뚝이 남근 이데올로기를 주지시킨다.

김범석_휴일_한지에 먹, 채색_60×40cm_2009

이데올로기는 문화적 사실 곧 인공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로 가장할 때 발생한다(롤랑 바르트는 이를 신화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 위해선 자연적 사실처럼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이처럼 자연적 사실을 가장한 것인 만큼, 이데올로기는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여하튼, 목욕탕 굴뚝에는 코리아라고 한글로 써져 있기조차 하다. 대중목욕탕의 이름치곤 좀 그렇다(중앙탕이라는 이름의 목욕탕도 있는데, 그 이름은 중앙당처럼 들린다). 나는 오늘도 코리아목욕탕에서, 세속에서 묻혀온 때를 세척하면서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이데올로기를, 남근 지상주의를 되새긴다? 나는 이 이데올로기를 되새김질함으로써 세척되고 정화된다? 나아가 자연마저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자연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웬 이데올로기? 작가는, 무슨 오토메이션 체제의 공장처럼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나무들이 줄지어 정렬해 있는 나무농장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의 기획을, 욕망을 본다. 작가의 그림 중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며 서 있는 송전탑과, 그 송전탑을 지나가는 전선 위에 앉아있는 까마귀 떼를 그린 그림이 있는데, 심지어는 이 그림마저도 예사롭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징후 내지는 전조 내지는 징조를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징조?

김범석_오후 3시_한지에 먹, 호분_172×137cm_2009

그림자 풍경. 그림자는 실재에 딸린, 실재의 부수물이다. 실재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그런데, 때로 그림자가 실재보다 그 존재감을 더 강하게 주장하고, 드러내고, 환기시킬 때가 있다. 감각적 사실로선 미처 드러내지 못하는 비감각적 성질을 드러내 보이고, 가시적 사실로선 미처 붙잡을 수 없는 비가시적인 성질을 암시할 때가 있다. 실재와 그림자의 존재감이 전도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도현상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동양에선 그림 속에 그림자를 그려 넣지 않았다. 음영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기왕에 호분을 끌어들여 불투명화면을 실현한 데 이어(이는 사물에 밀도감과 함께, 사실적이고 견고한 형태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림자를 끌어들여 사실감과 실재감을 더하고, 나아가 그림자를 심리적인 기제로까지 전용한다. 먹과 호분을 주 재료로 하여 그려진 작가의 그림은 흑백 모노톤의 화면이 대비되는 것인 만큼, 검은 평면으로 그려진 그림자가 다른 사물을 묘사한 부분보다 더 강조되고, 더 두드러져 보인다. 이를테면 그림에서 그림자는 호분으로 표현된 밝은 부분과 대비되면서 사물을 더 뚜렷하게 부각하고, 그렇게 음영이 대비되는 특정 시간대(아마도 정오 쯤?)를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김범석_중앙탕_한지에 먹, 목탄, 채색_60×40cm_2009

나아가 그림자는 일종의 심리적이고 비가시적인 사실마저 표상하고 암시하는데, 나무보다 더 큰 키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어떤 알 수 없는 분위기를(자연의 비의?) 자아내고, 동상보다 더 짙은 어둠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그림자가 순진무구한 동상의 이면에 가려진 이데올로기를 암시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림 속에 그려진 경물을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정적 속에 감싸이게 한다. 이처럼 음영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정적에 감싸인 풍경이 떠올려주는 어떤 정서적 환기로 치자면, 특히 한적한 교외에 저 홀로 서 있는 모텔과, 언덕 위의 산장, 그리고 부감으로 그린, 카트를 밀며 텅 빈 도로를 건너가는 사람을 그린 그림이 그렇다(이 그림들은, 곧잘, 한적한 교외의 정경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를 떠올리게 한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평범하게 보이는 풍경이 언제, 어떻게 비범한 풍경으로 전이되는지를 예시해주고, 비범한 풍경은 평범한 풍경 속에 들어 있었음을 주지시킨다. ■ 고충환

Vol.20091215e | 김범석展 / KIMBEOMSEOK / 金範錫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