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봄_정희우展   2009_1211 ▶︎ 2010_0110 / 1월 1~2일 휴관

김봄_서울성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4×130cm_2009 정희우_강남대로_장지에 수묵채색_180×500×150cm_2009_부분

초대일시_2009_121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1월 1~2일 휴관

꽃+인큐베이터_Ccot + Incubator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번지 B1 Tel. +82.2.6414.8840 www.velvet.or.kr

풍경화 이상으로; 비평적 담론의 추가된 차원 ● 김봄의 새로운 풍경화에 대한 추가된 차원들이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문화적, 역사적 비평 담론의 수준으로 이끄는 영감을 준다. 예를 들면, 「동대문운동장」 이나 「덕수궁」과 같은 이 전시회에서의 그녀의 새로운 작품들을 고찰해 보자. 아이코닉한 도형들과 상징들을 주의 깊게 보면, 그것들이 과거로 쭉 뻗은, 아마도 이삼백년 전의 전통 공식 의상들에 장식된 도형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봄의 지도 같은 풍경을 협력하여 우아하게 만드는, 역사적 과거들로부터 전승된 작은 그룹의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인공물들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 지도제작상-하지만 동시에 사료편찬에 뜻을 두는-의 포부이상의 것이 있다. 다른 작품들에 있어서, 그녀의 최근 작품들은 신태그마틱한 구성적 특징들뿐만 아니라 패러디그마틱한 구성성분들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에 있어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의 풍경-그것의 거의 추상적으로 암호화된 간결함에도 불구하고-의 신타그마틱; 야콥슨의 '언어의 토대'로부터 기호학적 용어를 빌려온 프라그마틱은 그 특별한 풍경 모티프-보이지는 않지만, 최소한 암호화된 상태로 그녀의 비전하에 있는 바로 그 섬-의 일시적 (통시적이고 역사적인) 층들을 포함한다.

김봄_동대문운동장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30×194cm_2009
김봄_山下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94×260cm_2009
김봄_광장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150cm_2009
김봄_덕수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150cm_2009

그녀는 그녀의 캔버스에 너무 많은 것을 채우고 있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 역사적 과거의 층들, 화석으로 고정화된 시대의 파편들의 침전물들; 그것은 수백년 전의 과거로부터 전승된 아이콘 같은 도형들이나 암호들의 집합으로 어떤 시사성을 인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정말로 효과적일까? 그것은, 그녀의 작품들의 개개 관람객이나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그것은 표면적인 부분에 의해 눈에 드러나 보이지만, 시각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관자에게 별도의 해석을 요구하는 암호의 체계 (기호 맥락)이다. 그녀는 확실히 전에는 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화면 위에서 의도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의 설득력 여부를 떠나서, 김봄은 많은 잠재력을 가진 매우 유망한 젊은 화가이다. 그녀의 생각과 매력은 그녀의 나이조차 초월한다. 그녀의 지도와도 같은 캔버스(문자로써의)에 다양한 역사적 시기의 아이콘을 채운다면, 지질적 토사의 각 층이 참신하게 종합되기 위해 노출되어 시종 일관된 이야기를 하듯이, 다른 시기의 모든 도상적인 이미지가 그녀의 역사적인 지도식 세계도표에 공존할 것이다. (그녀의 공간과 일시적 세계는 이렇게 결합된다) ■ 홍가이

정희우_강남대로_장지에 수묵채색_180×500×150cm_2009
정희우_강남대로_장지에 수묵채색_180×500×150cm_2009_부분

풍경화로서의 지도 그리기: 새로운 시각 기호학을 향하여 ● 정희우는 길게 뻗은 강남대로를 운전해서, 또는 걸어서 거리 양쪽의 각각의 건물은 정면에서 보고, 도로는 높은 빌딩 위에서 내려다 보고 그렸다. 극도의 세부묘사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데 이런 작업은 망원렌즈가 부착된 디지털카메라로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쉬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을 탐험가로 생각하고 새로운 수로를 항해하고, 물가의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지도로 기록하는 것이다. [현대 문명사회의 도로를 고대 중국 음양오행의 풍수 체계의 수로로 해석하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그녀는 지도 만드는 과정을 거쳤지만 이 작품은 정확히 말하자면 지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작가가 에너지와 정열과 야심을 갖고 만들어낸 이 작품은 정확히 무엇일까? ●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작가는 풍경화의 서양적 개념도, 동양적 개념도 거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풍경화가는 자신이 선택한 소재 앞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서, 소재의 가상 그리드를 캔버스의 작은 그리드로 옮기는 설계적인 기하학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그린다. 컨스터블의 『Wivenhoe Park』와 세잔의 『Mt. Saint Victoire』 가 서양 풍경화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화가는 인간이라는 주체로서, 그곳에 있는 풍경을 객체로서, 자신의 시야에 펼쳐진 것들을 최대한 캔버스에 재현하는데, 이것을 '지각적' 전통의 회화라고 할 수 있겠다.

정희우_강남대로_장지에 수묵채색_180×500×150cm_2009_부분
정희우_강남대로_장지에 수묵채색_180×500×150cm_2009_부분

하지만 정희우의 작품은 전통수묵산수화의 본보기라고 할 수도 없다. 서양전통풍경화와 동양 (동북아시아)의 수묵 풍경화의 가장 극명하게 다른 점 중 하나는 주체(화가)와 객체(풍경의 소재)의 관계인데 서양의 풍경화에서는 소재가 하나의 관점에서 그려지고 화가는 자신의 소재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소재를 보며 그린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화가는 풍경화에 일종의 "객관성"을 부여한다. 서양식 풍경화에는 주된 사람의 한가지의 시선으로 풍경이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동양화에서는 그 풍경을 보고 있는 그 사람이 그려져 있다. 그 사람이 풍경 속으로 살짝 들어가 한가롭게 장연의 풍경을 노니는 듯 그의 다양한 시선이 그려진다. 정희우의 그림에도 사람들이 있다. 걸어가는 사람, 오토바이나 스쿠터를 타고 가는 사람, 유모차를 밀고 번잡한 길을 건너가는 사람들이 있다. 높은 곳에서 보고 그려서 그들은 작고 미미해 보인다. 그들은 산수화에서 노닐며 다양한 시점들을 대변하는 주체는 분명 아니다. 정희우의 강남대로 시리즈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리에 빽빽이 차있는 차들이나 높은 콘크리트 건물들처럼 단순히 소재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정희우의 작품은 전통 동양수묵산수화의 철학에서 급격히 벗어난다. 그녀의 작품에는 건물의 정면과, 온갖 기하학적 형태, 끊임없는 차의 행렬과 보잘것없이 대상화된 인간들로 넘쳐난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자동차의 행렬,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자동차 사이를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건너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이 위험성덕분에 비인격화된 인간들의 움직임이 이 이질적인 공간에서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 홍가이

Vol.20091217e | 김봄_정희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