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 and Distant_먼 옛날

신지현展 / SHINJIHYUN / 申智賢 / painting   2009_1218 ▶ 2010_0108 / 토,일,공휴일 휴관

신지현_Quenchless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09

초대일시_2009_1218_금요일_05:3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 토,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A 전시장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여성으로서의 아이, 아이로서의 여성 ● 신지현의 모든 그림에는 앳된 여자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귀엽고 예쁘기는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전형적인 상, 요컨대 동화 속 장면의 순진무구한 주인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엄청난 양육의 노고가 투여되어야 하는 현실적인 대상으로서의 아이들도 아니다. 그들은 현실과 허구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다. 그들은 창백한 피부 색, 인종을 특정할 수 없는 외모, 정확히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동공을 가진다. 그러나 명확히 범주화되지 않는 이 경계 위의 존재들이 여성의 성을 가진 것만은 분명하다. 신지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호한 초상들에서 여성과 아이는 동어 반복적이다. 여기에서 여성은 아이이고, 아이는 곧 여성이다. 여성성 자체가 어떤 실체화를 벗어나는 범주라고 주장하는 자크 라캉의 심리학이나 페미니즘 일단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 여성/아이는 남성/어른처럼 명확히 말해지거나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이제 20대 후반의 여성 화가에게 '먼 옛날'(전시부제)을 기억하게 하는 자화상 같은 이미지이다. 자신과 비슷한 초상이 아니더라도, 캔버스 중앙을 차지하는 형태는 대체로 인간을 떠오르게 하며, 그 인간은 십중팔구 자아나 자아의 변주인 것이다.

신지현_Divest_캔버스에 유채_145.5×112.2cm_2009
신지현_Birthday Mood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9

작가는 그들의 초상에 애써 현실의 흔적들을 지운다. 초상 속의 아이들이 반쯤은 허구에 잠긴 모습으로 또 다른 현실을 살고 있다. 회색이 섞인 듯한 탁한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아이는 이차원 상에만 존재하는 듯이 외곽선만 뚜렷하고 세부가 생략되어 있으며, 거의 텅 빈 배경에 최소한의 몸짓만을 취한다. 6살에서 10살 정도 사이의 아이들은 생물학적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사회의 상징적 언어를 습득하기 시작하는 때로,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육체적인 변모 못지않게, 심리적인 격변을 겪어야 하는 시기이다. 처음부터 완전하게 태어나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아 나갈 수 동물과 달리, 인간은 오랜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나중에는 언어에 의지해야만 한다. 어머니와 언어가 바로 타자이다. 자아와 주체를 확립하기 위해 타자라는 필수적이지만, 완전히 합일될 수 없는 구조로 인해 불안감이 야기된다. 아이는 이러한 불안을 통합에의 가상을 보여주는 거울, 즉 라깡이 이론화한 상상계를 통해 해소한다. 공식화된 사회의 영역이라 할 수 없는 상상계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퇴행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자아를 사회의 상징적 질서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 없는 이행적 주체들에게는 나름의 해방구가 된다. ● 더구나 여자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상징적 질서에는 가부장적 질서가 아로새겨져 있다. 가부장적 질서는 아이를 성인과 단절된 추상적 세계로 고립시키고, 어른이 된 여성은 아이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사랑과 보호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언제든지 억압으로 변화될 수 있다. 신지현의 작품 속 아이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세계라는, 추상화 된 유년기를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기 보다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감을 살짝 비춘다. 때로는 무심한 표정으로 완전히 자신의 상상 세계에 빠져 있다. 활발한 몸짓보다는 미세한 얼굴 표정이 강조되어 있으며, 창백한 색조와 얇은 공간감은 그들의 예민함을 조형적 언어로 전달한다. 심리적, 육체적 성장은 그자체로 불안한 과정의 연속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미묘한 감정표현이 드러난 아이들에게서 발견한다. 그것은 작가 뿐 아니라, 누구라도 겪었을 과정이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 대부분 잃어버린 감정들이다. 감수성 예민한 소수만이 그 때를 다시금 상상해 볼 수 있으며, 자신의 내면 속에서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신지현_Inlay_캔버스에 유채_72.7×100cm_2009
신지현_Pat_캔버스에 유채_130.3×89.4cm_2009

애어른 같은 존재가 가지는 이러한 미묘한 불안감은 명확하게 개념화되기 힘들며, 어떤 형상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신지현의 작품은 어떤 한 시기의 아이들을 주목하면서, 인간이 자아와 주체를 확립하기 위해 치르는 심리적 드라마를 표현하려 한다. 대부분 한 화면에 한명 씩 그려진 아이들은 마치 관객들을 응시하는 듯하다. 이러한 착각은 관객이 그림들(=아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라캉의 논리가 예시하듯, 이미지 구조에 의해 우리는 보여 지는 것이다. 우리의 시각은 이미지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보고, 보이는 관계에서 어떤 기대와 상상이 가로지른다. 일견, 명확한 대상이 알아볼 수 있는 그림들을 내놓은 작가가 '나의 작업은 결국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얇은 얼굴 표면 뒤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는 심리적 드라마에 주목하라는 요구일 것이다. 특히 거울은 이러한 심리극이 벌어지는 주요한 무대가 된다. 거울보고 머리 빗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 작품에서, 아이는 이미 여자처럼 자신을 보고 싶은 모습으로 본다. 거울상의 이미지는 아이 두 명이 등장하는 그림들에서 두드러진다. ● 너무 닮아서 마치 반사상처럼 보이는 이들은 분신이나 쌍둥이, 다른 자아 같은 면모가 있다.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는 두 소녀를 그린 작품은 마치 한 아이가 거울을 보고 맛을 음미하는 듯하다. 자다가 깬 아이 둘을 겹쳐 누운 모습으로 그린 작품은 약간 보이는 붉은 색 배경 때문인지 섹슈얼한 분위기도 풍긴다. 두 아이의 반사상 같은 모습은 자기애적인 면모를 가진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선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본래 자기애적인 것임을 예시한다. 시선이 주파될 수 없을 정도로 밀착한 두 아이는 대상화를 야기하는 시선의 공격성에 대해, 접촉이 내포하는 평화스러움을 대조하는 듯하다. 소녀가 다른 한 아이의 눈을 가리는 작품은 비슷한 외모로 인해 마치 한 개체가 상반된 행동을 하는 듯 보인다. 이 분신 같은 존재들이 보여주는 것은 가려진 현실이다. 두 명이 등장하는 작품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닮아 있어 그들은 하나이면서 여럿으로 보인다. 그들은 거울의 방 속에서 무한 반사되는 분열적 존재를 떠오르게 한다. 복제를 통해서만 실재를 인식하게 하는 거울의 역설적 성격은 이상과 환상의 영역으로 아이를 인도한다.

신지현_stillness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9

그것은 절단된 신체를 통합된 가상으로 보여주는 거울의 마술인 것이다. 이 가상의 세계는 기만이고 소외이지만, 매혹이자 위안이다. 그것은 분열된 현실을 통일시켜주는 행복한 가상이다. 그러나 이 거울은 쉽게 깨질 수 있다. 거울이 연출하는 통일성은 진실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기에, 거울의 심리학에는 소외와 불안이 잠재해 있다. 이러한 구조에 의하면 자아의 상상적 통일성이 커질수록 소외도 증가되기 때문이다. 신지현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의 미묘한 표정에서 인간 존재에 내재적인 결여와 틈새를 감지할 수 있다. 한 화면에 한명씩 배치된 그 밖의 작품들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립된 상황이 연상된다. 그들은 혼자 놀곤 하며, 의자나 욕조 속에 깊이 파묻혀 환상에 잠기기도 한다.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환상phantasy은 주체가 주인공이 되어 소망의 충족을 재현하는 상상적 장면이다. 그러나 환상의 본질은 불가능성이다. 불가능하지만 주체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환상이다. 그들도 세상 속 존재라 상처를 받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공격적 자세를 취하기도 하는데, 뿔이 있는 초상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뿔은 아이의 머리 위에 비스듬하게 얹혀있거나 균열이 가득한 취약한 모습이다. 왕관 같은 뿔은 나르시시즘과 공격성이 한 몸의 두 얼굴이라는 것도 알려준다. ● 아이들은 또한 성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성적 대상으로서의 아이들, 즉 아동 포르노나 성폭력이 횡행하는 추악한 현실--이러한 현실은 이원적으로 결정화된 성적 구조의 파괴적 면모를 보여 준다--에 대한 반영이기보다는, 성장이나 성장에의 거부라는 심리적 드라마에서 성이 가지는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옷 벗는 순간의 아이가 포착된 작품은 스스로는 눈 감은 채 보여 지는 여성이 겹쳐진다. 감은 두 눈은 자신을 직시하기 보다는, 보여 지는 자기를 상상한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스스로 채득함과 더불어 사회의 규범은 내면화되고, 이 또한 여자 아이로서는 직시하고 싶지 않은 갈등의 씨앗이 된다. 아기 인형을 거꾸로 들고 있는 아이의 멀뚱한 모습을 그린 작품은 어머니라는 타자의 육체를 통해 세상에 나오고, 아버지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사회에 속하게 되는 인간 존재들의 운명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불완전한 탄생은 고난이지만, 헤쳐 나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고난이다. 불완전함은 열린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신지현의 작품은 이 고난의 여정 중에 있는 안개 같은 주인공들, 즉 여성이자 아이의 상상적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 이선영

Vol.20091218g | 신지현展 / SHINJIHYUN / 申智賢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