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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권展 / HANYEONGGWON / 韓泳權 / installation   2009_1214 ▶︎ 2009_1227 / 월요일 휴관

한영권_Re-mind_Print on polyvinyl chloride tile_가변설치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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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214_월요일_05:00pm

주최_문화체육관광부_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_기획재정부복권위원회_갤러리 빔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빔_GALLERY BIIM 서울 종로구 화동 39번지 Tel. +82.2.723.8574 www.biim.net

누군가가 특정 대상을 바라보며 그 대상에 대해 인식하려할 때, 처음 대면한 낯선 대상이라면 그전에 경험한 그와 비슷했던 것과 비교하며, 익숙한 대상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경험 속에 누적된 그 대상에 관한 흔적에 견주어 비교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다수의 관심거리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대상에 관해 진술했던 다양한 경험과 그들의 자취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는 것은 관찰 대상이 내 비췬 다양한 모습들을 경험한 여러 관찰자의 궤적을 끌어다 놓고, 그 위를 밟아 가는 것이다. ● 대상을 인식하며 그 궤적들을 밟아 나아갈 때, 내가 그었던 대상에 대한 궤적과 새로이 눈에 띈 궤적, 그리고 여러 경험자들의 자취가 남겨진 궤적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대상에 대한 스펙트럼은 아주 넓고 안정되나 무채색의 흰색을 이루기도 하고, 또 다른 대상에 대한 궤적은, 아주 좁고 불안정하나 선명한 고채도의 색상으로 된 궤적을 따라 관찰 대상에게 다가간다. ● 특정 대상에 관한 인식의 궤적이 넓은 일반적 인식이라고 해서 만족될 것도 아니며, 그 궤적이 좁고 희소한 인식이라고 해서 만족될 것도 아니기에, 그 궤적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어느 때는 길고 부드러운 호흡으로 또 어느 때는 짧고 거친 호흡으로 여행을 할 것이다. 불규칙한 나선형으로 대상의 중심축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배경 쪽으로 벗어나기도 하며, 다양한 경계의 궤적들을 따라 대상의 주위를 맴돈다. ● 선회의 주기가 짧은 혜성처럼 떠도는 궤적들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떠날 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충격(trauma)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철학, 사유하게 되는 계기인 이러한 정신적인 충격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모든 만남이 충격적으로 강한 인상을 주어, 그것들에 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충격이란, 만남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 만남은 인식 주체와 대상의 만남 뿐 아니라, 인식 주체에게 관찰 대상이 된 대상간의 만남도 흥미로운 경우가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대상, 사물들의 만남, 이러한 은밀한 접촉은 오랜 기간 굵고 넓으며 흰색의 스펙트럼으로 분류된 체계를 은근히 비웃으며, 보이지 않는 대상의 주위를 가늘고 좁은 고채도의 스펙트럼의 궤적을 그리며 빙글 빙글 돈다. ● 그의 작업은 대부분 두 가지의 이미지가 만나는 것이 특징이다. 두 가지 이미지의 만남은 일정한 연관성으로 만나게 된다. 그 두 가지 이미지의 연관성은 형태적인 성질이 유사하거나(자동차 윈도우 브러시+합죽선), 세부적인 구조의 성질이 유사하기도 하고(플라타너스 잎맥 +손등의 혈관), 전체적인 구조의 성질이 유사하기도 하고(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의 균열 +지도) 표면 구조가 유사하기도 하며(식물 잎사귀의 피부 + 문신/타투) 때로는 개념적 특성이 유사하기도 하고(계란 프라이 +유방), 또는 기호적 특성이 유사하기도(남성기 + 가위) 하다. ● 이중 몇 가지 작업을 살펴보자. 형태적인 유사성을 근간으로 한 만남인 자동차 윈도우 브러시와 합죽선은, 윈도우 브러시의 동선 영역에 부채꼴의 형태가 그려지는데, 이러한 부채꼴의 이미지에 넌지시 글자 몇 자와 어설픈 낙관을 그려 넣는다. 문인화의 권위에 슬며시 끼어드는 장난 같은 작업이다. 더운 여름날 해를 가리기도하고 바람을 일으켜 몸을 시원하게 하는 부채가, 선비의 얼굴 앞을 왔다 같다 하듯이, 빗물에 흐려진 창 앞의 풍경을 시원하게 트여주는 윈도우 브러시가 슥슥 거리며 얼굴 앞을 왔다 갔다 한다. 사실 문인화란 것이 사대부들의 한가함을 당시의 기호 체계를 통해서 다소 고급스럽게 농하는 수단이었음을 감안하면, 장난과 파한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가? ● 전체적인 구조의 유사성으로 만나게 된 작업이 시멘트 콘크리트의 균열 사진을 지도처럼 만든 작업이다. 지표면의 일부인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 표면의 균열이 얼핏 위성 촬영된 사진과 닮아있다. 하지만 포장도로의 균열은 지표면의 아주 조그마한 부분이고, 항공 촬영된 지도는 지표면의 거대한 면적으로, 하나는 클로즈업 사진인 반면, 다른 하나는 이와 정반대의 와이드 사진이다, 하지만, 마치 코흐의 눈송이 도형의 구조처럼, 클로즈업한 이미지와 와이드이미지가 서로 닮아 있다. 동일한 패턴의 반복적 구조 중 과감히 중간 단계를 생략한 '게으른 코흐의 눈송이 도형'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개념적 유사성을 가진 만남인 계란 프라이와 유방은, 색상 면으로는 계란 프라이처럼 보이나, 형태적으로는 유방을 닮아있다. 그래서 멀리서 전체적으로는 보면 계란 프라이로 보이나, 가까이 다가가면 계란의 노른자 부위가 유방의 형태이다. 계란과 여성을 연관 시키면 언뜻 여성의 성기가 연상되어 섹슈얼리티를 자극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유방과의 접점이 있다. 유방이 전근대 이전 육아를 위한 수단이거나 도구였던 것처럼, 즉, 유정란의 노른자는 흰자에서 생성된 병아리의 먹이이다. 그런데 주변부의 흰자에서 생명체로 변화하듯, 동시대 타자인 여성들도 중심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가? ● 위의 글들은 이미 제작되어진 작업을 감상한 소감이다. 작업들의 모티브가 두 가지 사물들의 만남을 통한 가늘고 좁은 스펙트럼이었다고 한다면. 그 작업들이 그린 궤적들 안에서도 가늘고 좁거나, 굵고 얇은 스펙트럼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궤적들은 감상의 "특정한 주체들, 개별적 자아들"의 취향이나 입맛 또는 그들의 문맥 안에서 제각각의 양상을 띄울 것이다.

한영권_Re-mind_Print on polyvinyl chloride tile_가변설치_2009

이번에 전시하는 작업에 대한 궤적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멀리서 그 궤적들의 흐릿한 불꽃놀이를 조망해보자. ● 이번 작업도 대리석과 삼겹살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의 만남으로 표면 이미지가 유사한 재료들의 만남이다. 그 이미지 중 하나는 건축의 재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음식의 재료이다. 작가의 표현으로는 대리석과 삼겹살의 시각적 표면 이미지가 비슷하며, 대리석의 영어명인 마블과 삼겹살의 구조를 일컫는 마블링의 상관관계가 작업의 모티브라고 밝혔다. 이러한 정보와 작업 계획안으로 작성된 전시장의 바닥면에 붉은 생 삼겹살이 확대된 이미지가 합성된 자료를 보고 연상한 광경이며 소감이니 실제 전시된 이미지와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대리석은 서구의 건축사와 관련해 건축의 주요 재료 중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은 대부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다량 분포된 지질학적 특성 때문에 서구 고건축의 주재료가 대리석이었다. 대리석은 석회암의 변성암이라, 물리적인 경도가 무르고 약해서 다양한 색채를 띄운다. 이러한 물리적 특성으로 큰 부피의 조각으로 떼어내는데 용이하고, 또한 연질이라서 다듬기도 편리하고, 표면 질감도 매끄럽다. 그래서 흰색의 대리석을 활용하여 대형 건축물과 조각물들을 만들어왔으며, 요즘에도 건축물의 마감재로 활용된다. ● 삼겹살은 돼지의 일부 조직으로 기름 층과 고기 층이 세 겹으로 이루어진 부위인데, 뻑뻑한 고기 사이에 기름 층이 자연적으로 브랜딩 된 부위이다. 삼겹살이란 음식의 재료이기도 하며, 개별 음식이기도하다. 그러나 삼겹살은 완결된 음식으로 만들어져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날것의 재료 그대로가 손님에게 제공되고, 이후 불에 굽거나 익혀서 음식으로 완성된다. 적절한 온도로 가열된 고기판 위에서 얇은 조각으로 수평으로 뉘어져 지글거리며 기름과 수분을 뱉어 내며, 뱉어낸 만큼 수축되며 흰색으로 익혀지는 삼겹살, 완성되는 순간 돼지의 일부인 다 익은 삼겹살은 음식이나 안주로 사람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 얼핏, 대리석과 삼겹살의 만남은 물리적 특성이나 문화사적인 맥락상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이나, 작가는 붉은색 대리석과 생삼겹살의 표면 이미지에서 유사성을 찾았다. 두 이미지의 유사성은 흰색 석회암질에 철 성분이 섞여 울긋불긋한 대리석의 이미지와, 흰색의 지방층과 붉은 육질이 일정한 방식으로 교차된 삼겹살 이미지를 공통분모로 만난다. ● 전시공간의 바닥면에 삼겹살이 확대된 이미지가 합성된 계획안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스친 감각은 울렁거림이었다. 날 색으로 프린트된 돼지고기의 붉은색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당혹감을 느끼게 했고, 이어서 실제의 삼겹살이 깔린 구간을 밟고 지난다는 상상을 해보니, 물컹거리는 바닥으로 인해, 신체의 신경들이 그 바닥에 집중하며 균형유지에 전념해야하는, 이런 낯설며 상쾌하지 않은 간접 경험이었다. 더욱이 비릿한 냄새가 확대된 삼겹살의 이미지처럼 수십 배 과장되어 내 후각을 자극할 듯 한 연이은 상상은 현기증을 일으킬 듯 했다. ● 하지만 이후에 그 시각적인 내용을 담지하는 그릇인 형식적인 측면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의 기존 작업들이 대부분 벽면에 디스플레이 된 평면 작업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작업의 특성은, 전시장 바닥에 전체 면적을 뒤덮는 방식이라는 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보였다. ● 대리석판은 바닥재나 벽면의 마감재로 활용되는 건축 자재의 특성이 있는데, 대리석과 삼겹살의 이미지가 서로 중첩되어, 바닥에 타일처럼 깔리는 방식의 디스플레이는, 미술적 문맥상으로 평면작업이기 보단, 입체물의 작업과 연관성이 가깝다. 그리고 엄밀히 따진다면, 특정 전시장 바닥을 빼곡히 채우는 방식은, 디스플레이라고 보기보단, 장소 특정성이 반영된 설치 미술의 방법이다. 그런데, 설치 미술은, 특정 공간에서만 미술 작품화되는 정체성(한계성/아이덴티티)을 가지는 일면 그 특정 장소를 떠나면 그 생명력이 다하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 미술작품이란 것이, 감상을 주된 목적으로 하되, 은밀하게 상징가치나 교환가치를 지닌 투자대상이라는 기능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작품의 대표적인 특성이 보존성, 내구성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서, 그 상징가치나 교환가치를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투자대상으로 교환가치가 결여되지 않거나 상실하지 않게 하기 위해, 평면 작업들은 밑칠을 하고 우수한 수지/바인더가 함유된 물감을 사용하며, 완결된 작품도 액자라는 보호 장치로 마무리한다. 또한 입체물의 경우 물리적으로 변성 가능성이 적은 견고한 재료를 활용해 제작하고, 좌대라는 보호 장치 위에 올려놓는다. 이렇게 미술작품은 물리적인 변성 가능성을 차단하는 여러 장치들을 통하여 교환 가치라는 도구적인 측면의 내구성을 보존시킨다. ● 대리석과 삼겹살이 오버랩 된 설치 작업은, 감상 대상으로 벽면에 디스플레이 되어 전시장의 일정 공간에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 바닥 전체에 설치되어, 그 작품 위를 감상자들이 오고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감상자들은 일반적으로 디스플레이 된 작품이 훼손의 방지 목적의 암묵적인 거리를 유지한 체 감상하고 다른 감상자와 소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과 직접 접촉한 상태에서 그 위를 거닐며 소감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는 전시 작품 자체가 작업에 대한 소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일종의 특수한 광장이라는 공간적 특성도 가지고 있다. ●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일정한 문화적인 코드와 작가의 독자적 문법이 어우러진 직조물과 닮은 측면이 있다. 상투적인 비유법을 적용하면 문화적 코드라는 씨줄과 독자적인 문법이라는 날줄로 엮어진 직조물이다, 그리고 이렇게 짜여 진 생천에 감상자들의 해석 가능성의 관심이 덧그려져 완성되는 것이 작품이라 생각해 본다. 동양화에서 안개나 구름을 직접 그리지 않고 그 주변을 그림으로써 안개와 구름을 대신하는 여백이나, 글자가 채워지지 않은 만화의 뭉게구름 같은 말풍선처럼 감상자와 독자의 화룡점정을 기다리는 그림과 닮았다고 할까? ● 만일 설치된 작업의 코팅면의 내구성이 완벽하지 않아서, 감상자들의 발자취, 흔적들이 표면에 일정한 스크래치를 만들고, 그러한 스크래치가 작품을 완성시킨다면 어떨까? 스크래치가 상처나 훼손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의도되지 않는 잠재적인 터치이며, '잠재된 터치'의 작가인 감상자들의 신체 접촉에 의한 흔적들이 어울려 완결되는 드로잉. 즉, 설치작업이 인터랙티브한 드로잉을 만들기 위한 과정 차원의 전시로 계획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 전시장의 바닥에 설치된 작업이 감상자들의 접촉, 만남으로 완성되고, 이렇게 완결된 드로잉이 평면 작업으로 벽면에 다시 디스플레이 된다면, 작가의 작업 문맥상 모티브인 개별적 이미지들의 만남이, 작가의 작업과 감상자들이 만나는 광장에서 (또는 잠재적 감상자와 잠재적 작가의 만남) 완성되어, 작품이 완성되는 개념도 확장시키는 셈이고, 미술사적 맥락에서 특정 장소에서만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설치 미술의 자기 한계성도 극복하는 실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그림者

Vol.20091220e | 한영권展 / HANYEONGGWON / 韓泳權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