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다-비우다

이원경展 / LEEWONKYUNG / 李嫄景 / sculpture   2009_1216 ▶︎ 2009_1222

이원경_짓다_밀랍, 조명_55×34×11cm_2009

초대일시_2009_1216_수요일_05:00pm

2009년 서울문화재단 정기공모 후원전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www.artspace-hyun.co.kr

사람들은 대부분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집을 짓거나 얻어서 살고 있다. 가장 안정된 공간이라 여기는 집의 부재나 흔들림은 불안한 요소로 작용한다. 우리가 안정을 찾고 있는 이 공간은 진정 견고한 것인가... 가정이라는 정신적 공간과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실재하는가... ■ 이원경

이원경_짓다_밀랍, 조명_54×26×20cm_2009
이원경_짓다_밀랍, 조명_44×38×21cm_2009
이원경_짓다_밀랍, 조명, 가변설치_가변크기_2009

집, 나의 거처이자 나의 피부-서술적이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 최근 이원경은 자신의 집을 4분의 1의 크기로 축소하여 재현했다. 옷장, 텔레비전, 냉장고, 소파 등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 익숙한 가구들을 축소한 까닭에 실재의 현실이 갑자기 걸리버 여행기 속의 소인국 풍경처럼 낯설지만 흥미롭게 줄어든 것 같은 설정 자체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들은 작가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파라핀을 재료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무언극과도 같은 연극적 상황에 의해 구성된 것이란 점에서 실재 너머의 것에 대해 상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파라핀이란 연약하면서 섬세한 재료가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느낌과 더불어 첫 번째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연출한 서술성이다. 이 서술적 상황의 설정은 그가 이 전시의 주제로 제시한 가정과 그들이 거주하는 집이란 공간에 대한 문제의식과도 연결된다. 대체로 가정은 집이란 공간에서 공동생활을 한다. 집은 가족구성원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장소이자 이 공동체를 견고하게 만드는 안전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없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인물을 보면 거푸집처럼 파라핀 덩어리로 둘러싸여 있는바 그의 존재는 양각에서가 아니라 내부의 음각을 통해 드러난다. 마치 고치처럼 인물을 감싸고 있는 이 파라핀 덩어리는 부재에 대한 상상을 자극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존재의 무게를 강조하는 특징도 있다. 특이하게도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대체로 음각으로 재현되고 있다. 그는 2005년에 발표한 작품에서부터 이미 음각을 통해 존재와 부재의 문제를 천착해왔으므로 음각이 부재의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채택된 것임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음각이 존재의 증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네거티브 공간을 통해 그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하지만 고독하게 유폐된 인간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집이란 대상을 선택했다. 남녀의 누드를 음각으로 표현한 작품을 제외한다면 현관을 들어서는 인물이 혼자이듯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도 혼자이다. 가구, 가전제품들을 갖춘 평범한 집이지만 실제 이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은 오직 작가 자신이란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독신자의 생활공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재현한 집은 가족공동체가 공유하는 공간이라기보다 개인의 생활공간이며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결핍되어 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도 작가 자신이고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사람도 오직 작가 혼자일 뿐이다. 이러한 결여를 잘 드러내는 것이 사물로서의 가구, 그것도 조촐하고 소박한 집기들일 것이다. 어떤 점에서 작가 자신이 집에서 누리는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이 작품들이 꼭 시간대별로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구조는 지니고 있다. 현관문을 들어서서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식을 취하다 냉장고에서 음식물을 꺼내 먹고 옷장에 걸린 옷을 고르거나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패턴 말이다. 만약 그의 작품이 이런 사적인 삶의 단편들을 일차원적으로 나열했다면 이 작품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대상의 규격이 1/4로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약한 성질의 파라핀을 재료로 선택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집이란 물리적 공간이 진정 견고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가정이란 정신적 공간'과 '집이란 물리적 공간'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해 이러한 연출의 방법을 취했음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품이 사색적이며 명상적인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다의적(多義的) 해석 앞에 열려 있는 것이다.

이원경_짓다_밀랍, 조명_42×26×21cm_2009
이원경_짓다_밀랍, 조명_32×67×28cm_2009
이원경_빛으로 짓다_석고, 밀랍, 철, 조명, 물, 가변설치_가변크기_2009

과연 그것은 내게 실제로 존재하는가? ● 이원경이 열이나 압력과 같은 외부의 자극에 취약한 소재인 파라핀을 재료로 선택한 것은 조명효과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파에 누운 인물은 소파의 표면을 파고들어가 음각으로 부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설치한 조명에 의해 시각적으로 양각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작가 자신을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재현한 음각에 대해 부재에 대해 떠올릴 수 있으나 그것은 엄밀하게 부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물의 내부로 틈입하여 사물의 표피가 곧 작가 자신의 피부가 된 상태를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런 점은 옅은 갈색의 독특한 색조로 제작된 파라핀의 얇은 피막이 어딘지 피부를 연상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가능하다. 사실 그가 이 전시의 주제로 설정한 집은 신체를 편안하게 감싸는 일종의 보호막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신체의 외연, 곧 피부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보호막은 그 속에 거주하는 사람을 외부인의 시선이나 침입으로부터 보호할 뿐만 아니라 안온하고 때로는 나태한 안식을 보장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것을 노출하고 공개하는 것은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집을 공개하되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에 따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집이 단지 거주공간이 아닌 상징적 의미를 지니 것임을 알려주는 작품이 둥근 연못 혹은 수조(水槽)에 서서 자신이 소유한 집을 바라보고 있는 자소상(自塑像)일 것이다. 실제 크기보다 축소된 자소상은 석고로 마감되었으나 그가 들고 있는 파라핀으로 만든 집은 가장 단순하게 도식화된 작은 입방체에 불과하다. 이러한 크기의 전복은 거주공간으로서의 가옥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더욱이 그는 물이 얕게 채워진 수조 위에 섬처럼 서있으며, 아주 조금씩 떨어지는 물방울에 의해 수면에 일어나는 파문에 의해 연극적 상황을 강화하고 있다. 이 명상적인 장면을 둘러싸고 있는 파라핀으로 제작된 많은 구식 전구에도 상징적인 또는 암호와도 같은 형태들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그가 들고 있는 이 집은 소유하거나 임대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라기보다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좀 더 비약하자면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문화상징체계에서 집은 '세계의 중심', 곧 태모(太母)의 보호자적인 측면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을 들고 있는 자소상은 세계를 관조하는 자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이 작품을 종교로까지 확대하는 것이 비약일 수 있으나 불교에서 집은 바로 자아이기도 하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가 쿠시나가르에서 열반하기 전 바이샬리 근처의 벨루바란 마을에 잠시 머무를 때 모든 제자들을 떠나보낸 후 홀로 붓다 곁에 남은 아난다에게 '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자신을 집으로 삼아라. 그리고 법으로서 등불을 삼고, 법으로 집을 삼아 이에 귀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때 집은 곧 법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공간이자 법 자체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작가가 불교의 교리까지 생각하며 이 작품을 제작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명상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이 거래를 통해 소유하는 보통의 집에 대한 작가의 관념을 투영한 것으로만 한정하는 것도 좁은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따르고 싶은, 지키고 싶은, 자신의 지향점으로 삼고 싶은 규범이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된 형태이다. 작가 자신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나 그의 모습은 거울 같은 수면에 투영되고 있다. 우리는 구체적인 형태로 재현된 작가의 모습과 동시에 그의 형상이 반영된 수면도 동시에 보면서 보는 것과 보여 지는 관계가 서로 교환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작품으로 가까이 다가서면 우리 자신의 모습도 거울 속에 비쳐진다. 여기에서 은유와 상징은 서로 교차하며 보는 것이 믿는 것이고, 아는 것을 본다는 지각심리학의 가설은 도전을 받게 된다. 보여 지는 것 너머에 있는 실재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작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과연 그것은 내게 실제로 존재하는가. ■ 최태만

Vol.20091224a | 이원경展 / LEEWONKYUNG / 李嫄景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