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展 / LEETAL / 李脫 / installation   2009_1218 ▶ 2009_1224

이탈_다른 것 같지만 하나로 움직이는 욕망_ 저속모터, 실린더, 크랭크, cctv, 영사기, 거품장치, 가변설치_200×60×90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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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9_121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문화공간 해시 CULTURE SPACE HAESI 인천시 남동구 구월3동 1359-16번지 재흥빌딩 3층 Tel. +82.32.423.0442 www.haesi.net

나는 그렇게 보인다망각과 기억 거머리에겐 피를 뽑을 빨판이 있다. 머리나 귀 눈 또는 여타의 기관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발목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강력한 빨판만이 필요하다. 최초의 거머리는 몸에 상처를 내고 파고들어 자국을 남긴다. 여기서 상처란 몸과 관계하였던 실재가 되고 자국은 상처가 치유됐던 시간들의 사실이 된다. 이렇듯 몸과 상처는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와 닮았다. 세계내의 모든 존재는 상처들의 숙주다. 그러나 숙주인 개별적 존재자 혹은 존재자들의 관계 속에서 시작된 상처는 폭과 길이를 만들어 내부에 침투하지만 허망하게 비워져있는 주체의 공허감으로 인해 상처의 공간은 다시금 외부를 향한 처절한 탈주의 통로가 된다. 결국 상처란 존재자의 욕망을 표출하기 위한 통로로 전락된 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상처 냄과 치유의 반복을 통한 마찰의 선염한 흔적이 된다. ● 욕망은 인간의 의식구조에 존재한다. 그러나 욕망은 몸과 반응했던 부재의 기억이며 동시에 완전히 소화되지 못한 음식의 앙금처럼 망각으로 남는다. 망각이란 오로지 피를 빨기 위한 거머리의 숙명 같은 것이므로 망각이라는 상처는 인간 의식에 나타난 홈파인 공간처럼 인간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망각들로 인한 파임과 메움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욕망의 자국들은 과거의 자국인 동시에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망각이라는 시간의 통로에 축적된다. 이렇듯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겨나는 상처들로 육체의 쇠락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구조에 상처를 낸다. 이런 의식의 상처들은 기억의 구조를 해체시킨 채, 수없이 많은 상처들만이 망각의 구조를 체계화 한다. 이러한 망각의 구조가 예술이다. 과거의 예술도 그렇듯 수없는 상처의 벌어짐과 덧남의 구조이며 기억될 것의 부재된 상태다. 미술에 있어서도, 망각되었던 상처들이 시대의 변화와 사건 속에서 자국이 되 듯. 그 자국을 발생시키는 욕망은 외부의 수많은 기생체로 예술 주위를 부유하다가, 적당한 외상의 조짐을 포착하여 숙주인 예술 속으로 파고들어 상처를 내고, 번식하여 그 시대의 몸을 괴멸시킨다. 그러나 완전한 괴멸이 아닌 의식의 소멸임으로 다분히 단편적 구조의 소멸이다. 상처의 홈파인 자국에 무엇인가로 메워간다는 소명이 덧붙여지지만 부재된 피크노렙시(pyknolepsie)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탈_Memory of unhatched eggs_전란의 기억_ 백열전구, 온 습도 조절기/센서, DC모터, 타이머, 가변설치_140×30×50cm_2009
이탈_Desires that seem to be different but move together_다른 것 같지만 하나로 움직이는 욕망_ crankshaft, cctv 7er, beam projector, Sensor/Timer, Automatic Sequence Controll, DC motor, 프레임에 가변설치_200×60×120cm_2009
이탈_Difference et Repetition_차이와 반복_ actuator, Linear DC motor, 릴레이, beam projector, Sensor/Timer, 가변설치_2009
이탈_Anne of Green Gables_빨간머리 앤_ 철프레임, 동력전달장치, 센서, DC모터, 인모, 가변설치_70×15×15cm_2009
이탈_수직으로 쌓아 올리기_시트지_지름 2cm, 3000er_2009

사실, 실재, 현상 ● 나는 오늘 신포동 커피숍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 윤미경씨와 커피를 마셨다. 테이블엔 물 잔이 놓였다. 잠시 동안의 대화를 마친 후 작업실에 돌아와 조금 전의 경험을 기억했다. 나는 윤미경씨를 만났다. 물 잔에 담긴 물을 마셨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엔 경험이 관여한다. 그러나 내가 마신 물의 양과 윤미경씨가 마신 물의 양은 다르다. 단지 물을 마셨다는 사실 속엔 물이라는 실재(實在)만 동일할 뿐 서로 다르게 마신 물의 차이로 마셨다는 사실의 형태엔 차이가 생긴다. 이렇듯 잠시전의 사건엔 사실(fact)과 실재(real) 그리고 마셨다는 현상(phenomenon)이 혼재한다. 또한 나의 기억에 필요로 한 것은 커피숍의 구조나 밖의 풍경은 아니다. 단지 테이블에 놓인 물 잔만이 필요하다. 뉴턴의 법칙에 등장하는 사과나무도 한 그루다. 단지 중력에 의해 사과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보도하기 위해선 한 그루의 사과나무만 실제(實際)로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뉴턴(Isaac Newton)이 목도했던 사과나무가 있던 곳은 공간이 아닌 장소가 된다. 장소란 끝임 없이 떨어지는 사과처럼 시간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장소다.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의 걸림과 내림을 반복하는 현전(presence)과 부재(absence)의 흔적이다. 그래서 미술관엔 사실이 없다. 단지 실재들의 들락거림의 현상만이 남는다. 뉴턴이 법칙을 만들기 위해 자연의 일부를 참고로 했듯 미술작품이 자연을 해석할 이유도 없다. 작품의 도상은 자연의 현상을 넓히는 과정이며 자연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실재들을 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품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사실과 다르게 실재에 의한 현상을 상징화 한다. ● 나의 작품은 사실 속 실재들을 이질적 장소에 재배치하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정육점에 고깃덩어리가 있다'고 할 때와 '진료소에 고깃덩어리가 있다'고 할 때의 의미는 다르다. 이는 진료소라는 일상적인, 혹은 습관화된 장소에서 목도된 고깃덩어리의 생소함과 낯설음에 따른 불편함이 작용하는 이유지만 한편으론 의식과 주체의 불안한 지각이 문제도 된다. 이렇듯 정육점이나 진료소나 걸려는 목적과 내리려는 의도가 문제시 될 뿐 고깃덩어리의 걸림과 내림에서는 동일하다. 따라서 하나의 사실을 바라보는 입장이 존재론적인지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만약에 '진료소에 고깃덩어리가 있다'에서 '에'와 '가'라는 접속어가 배제되면 '진료소'와 '고깃덩어리'만 남게 되므로 '진료소에 고깃덩어리가 있다'는 사실과는 다르게 각각의 실재들의 의미를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실재들은 사실과 다르게 개체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처럼 나의 작업은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는 낯설음의 충격을 통한 첫 사실 이전의 현상에 관한 기억이다. 모든 사실은 첫 이후에 만들어진 합리화이기 때문이다. ● 잘 만들어진 작품을 만나는 것은 즐겁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작가를 만나는 것이 불편하듯 잘 만들어진 작가와 잘 만들어진 작품을 연관 지을 이유도 없다. 굳이 법관이나 경찰관처럼 권력의 제복을 입혀 스스로 작가란 칭호를 강요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좋은 작품은 모든 사람들이 합의한 결론이 아니듯 작가의 속성이 자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이 휩쓸고 있는 황량한 미술 판에 언제 부턴가 작품과는 무관한 빨간색 딱지가 눈에 보였다. 그러나 딱지가 의미하는 바는 실제 작품의 사실과는 다르다. 만약 빨간색 딱지가 의미하는 실제만을 사실화 한다면 피크노렙시(pyknolepsie)적 상처만이 기억됨으로 모든 미술은 빨간색 딱지와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숙명만 남는다. 그래서 망각과 기억을 구별해야 한다는 소명(召命)이 시작됐다. 그러나 소명마저 기억해야 할 의무는 사라졌다. 사실 처음부터 나에겐 현존재가 부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과 실재를 거론하는 이유이다. 사실과 실재란 단지 사람들이 그렇게 관념화하기로 합의한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 이탈

Vol.20091227h | 이탈展 / LEETAL / 李脫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