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황동에서

류장복展 / RYUJANGBOK / 柳張馥 / painting   2009_1230 ▶︎ 2010_0105 / 신정 휴관

류장복_2009.4.19 1911_종이에 파스텔, 목탄_49.7×34.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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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신정 휴관

경인미술관 Kyung-In Museum of Fine Art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 5전시실 Tel. +82.2.733.4448 www.kyunginart.co.kr

2006.5.24 수. 오후 6시 산황동 길가에 섰다. 아파트 장벽을 따라 둔덕이 파랗고 논에 모종이 줄지어 또 파랗다. 석양이 논물에 빠졌다. 뚝뚝, 벌건 살점을 흘렸다. 구릉이 연달아 솟아나 있는 일대가 온통 뻘건 흙이라 산황이다. 가을에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석양의 구름아래 철새가 들판에 닿을 듯 말 듯 지나가면, 탁주 한 사발에 인생을 담아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기는, 예로부터 풍류가 절로 일어나는 곳으로 선비들이 꼬여 들었다. 그래, 날 좋은 날 해질녘에 뒷동산에 올라 친구와 막걸리 두어 사발 들이키면 좋겠다. ● 2006.5.28 일. 산황동 논둑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그렸다. 구름이 그려졌다. 먹물 풀리듯 구름이 번져나갔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꽤 다녔다. 저기, 복장이 요란한 중년 여인은 필시 건너편 고층 아파트에 살게고 여기, 후줄근한 평상복 차림의 중늙은이는 십중팔구 동네 사람일 게다. 구름의 층이 아까보다 훨씬 두터워졌다. 노을이 졌다. 언덕배기가 발갛게 물들었다. 두 다리를 버팅기고 한창 그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너무 행복해 보여요' '황혼이라 아쉽네요.' '파스텔인가요?' '취미로 그리나요?' 2002년 1월, 철암에서 '추운 데 뭐하슈?' 라고 물으며 그림과 나를 번갈아 빤히 보던 그 아저씨의 표정이 생각났다.

류장복_2006.5.24 1932_종이에 칼라압축목탄_56×76cm

2006.6.1 목. 산황동이다. 비온 뒤 대기가 뽀송하게 느껴지는 그런 맑음이었다. 신도시의 가장자리를 따라 산황동 길이 길게 나 있었다. 비스듬한 전봇대가 엉성하게 꼽혀 있었고, 시멘트로 포장된 좁은 길이 흙으로 반쯤 덮여 있었으며, 길 가장자리에 벌건 흙이 파헤쳐져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생겼다. 그 옆으로 논이다. 신도시의 깔끔한 모습과 대조되는 전형적인 변두리의 풍경이었다. ● 2006.6.8 금. 왼쪽 철길을 따라 둑이 이어지는 길에 일명 딸딸이가 밀짚모자를 쓴 농사꾼을 태우고 덜덜덜 지나갔다. 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인가 보다. 오른 편에 펼쳐지는 들판에 잡풀이 무성했다. 무쓰 발라 이리저리 넘긴 알록달록한 젊은 머리칼 같았다. 멀리 고압전신주가 고압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풍동 아파트가 요새처럼 보였다. 날이 어둑해지는가 싶더니 창문에 하나둘씩 불이 켜졌다.

류장복_2006.6.4 1858_종이에 칼라압축목탄_36×51cm

2006.8.31 목. 딸아이의 말대로 한가하거나 공허한 풍경이 차창 밖에 펼쳐졌다. 디제이가 수다스럽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접시를 한입 깨물어 먹고 싶을 정도로 날씨가 좋다고? 대기 중에 습도가 이젠 많이 줄었다. 와중에 노을이 급격하게 졌다. 신랑각시의 볼에 찍는 연지곤지가 저렇게 붉은 색이였을까. 단순호치丹脣皓齒의 아름다움이 이 하늘에 있다. 대여섯 마리의 새떼가 부메랑처럼 날라 갔다. ● 2007.3.16 금. 해질녘이다. 비포장 길에 물이 고였다. 전봇대가 비스듬하다. 전신줄과 잔가지가 엉켜 쑥대 머리카락 같았다. 후미진 길에 오가는 것들이 참 많았다. 차와 자전거가 5분마다 지나갔다. 행인의 손에는 한 결 같이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류장복_2006.6.4 2009_종이에 칼라압축목탄_65×102cm

2007.3.17 토. 산황동 들판에 갔다. 육중한 고속도로가 들판을 가로질렀다. 흰색 탑 차가 지나갔다. 가는 수로가 눈 밑에까지 이어졌다. 밭에 파릇하게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두엄이 공룡의 똥처럼 싸질러 있었다. 갈아엎은 밭의 질감이 제각각 달랐다. 열병합발전소가 보였다. 까치가 날아올랐다.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들판에 마른 풀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발밑으로 지는 해의 자락을 기웃거렸다. 동산에 뽀얀 잔가지가 솜털 같고 마른 갈대가 고운데, 검은 비닐봉지가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류장복_2009.11.6 1749_캔버스에 유채_72.7×90.9cm

2009.4.19 일. 산황동 해질녘에 자전거 둘이 하얀 콘크리트의 신작로를 신나게 달렸다. 주저앉듯 덜컥, 해가 떨어졌다. 지평선 위에 모든 사물이 일순간에 붙었다. 검붉게, 짙푸르게, 검푸르게, 까맣게 서로를 물들여 갔다. 하얀 갈댓잎, 밭에 비닐 막, 앙상한 나뭇가지, 밭고랑에 잔설 따위가 석양에 반짝거렸다.

류장복_2009.11.11 1759_종이에 목탄, 파스텔_46×38cm

2009.12.15 화. 빈 들판이다. 들판에 큰 공기가 머문다. 큰 숨을 들이쉬었다. 흔적 속에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경배를 든다. ● 2009.12.17 목. 산황동에 갔다. 대기는 청명했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싸하게 했다. 석양의 햇빛이 소나무를 감싸고돌았다. 마른 풀이 번쩍거렸다. 이윽고 들판에 해가 떨어졌다. 마지막 열기를 하늘 천지에 흩뿌렸다. 보랏빛이 감도는 어둠을 배경으로 갈댓잎이 나부꼈다. 수확하다 만 알타리 무우가 햇빛에 노랗고 파랗다. 군고구마 모자를 뒤집어쓰고, 솜바지를 덧입고, 장갑을 끼고. 이젤을 펴고 캔버스를 놓았다. 물감을 짰다. 단번에 휘둘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차가운 공기에 씩씩, 거친 숨소리가 새나왔다.

류장복_2009.12.6 174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71.7cm

2009.12.26 토. 정오 무렵이다. 산황동 들판에 어제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잔설이 논에 고랑을 따라 겨울 햇살에 반짝거렸다. 맑은 하늘엔 열병합 발전소의 굴뚝마다 구름 같은 연기를 내뿜었다. 하늘에 콸콸 쏟아냈다. 얼핏 보기에 한가로운 전원의 풍경이지만 자세히 보면 괴이하다. 처마를 덧대어 방앗간 같기도 한 이층 양옥집과 옆에 너무 큰 창고가 두어 채 붙어 있었고, 뒤로 열병합발전소가 열개 남짓의 커다란 굴뚝 위로 연기를 뿜어댔다. 그리고 시멘트 전봇대와 앙상한 겨울나무가 바람을 갈랐다. ● 2009.12.27 일. 산황동 들판에 눈이 내렸다. 하얗게 쌓였다. 눈의 세상은 하나였다. 구름에 가린 빛과 바닥에서 반사하는 빛이 상쇄되어 회색의 세상으로 하나가 되었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오는 동안에도 주위는 밝았다. 눈의 대지는 발광했다. 한줄기 구원의 빛으로 신에게 선택되기 전에 사물은 제 스스로 어둠을 물리치고 몸을 드러냈다. 한없이 투명한 그 곳에 사물의 시작이 있었다. ■ 류장복

Vol.20091228i | 류장복展 / RYUJANGBOK / 柳張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