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잉

황세준展 / HWANGSEJIN / 黃世畯 / installation   2009_1226 ▶ 2010_0115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_2009_1226_토요일_06:00pm

기획 / 양은경_우아름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175_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karts.ac.kr/gallery175

기획의도 ● 175갤러리는 12월 26일부터 내년 1월 14일까지 황세준 작가의 새로운 작업들을 선보인다. 1989년 첫 번째 개인전 이후 네 차례의 개인전과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한 바 있는 작가는 80년대에는 민주화 투쟁 속의 사람들을 그렸다. 그러나 작가의 방식은 그림을 어떤 외적인 목적을 위하여 소용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림 속으로 현실을 끌어들여와, 관조 가능한 거리를 확보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림이 현실에 대한 직접적 실천이 될 수 없다는 인식, 그렇지만 창작과 감상이라는 느린 방식의 소통을 통하여 관조 가능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작가에게 그림이란 과한 삶을 조금 덜어내는 작업이자 동시대를 살아가기에 알맞은 자세, 일종의 윤리의식인 것이다. ● 90년대에 잠시 그림의 밖에 있었던 작가가-대안공간 풀에서 기획자로 근무하기도 하고, 미술전문지 「포럼 a」와 「볼」지에 글을 실으며 비평작업을 하기도 했다-2000년대에 다시 본업으로 돌아와 치뤘던 개인전들에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었던 그림들은 충분히 쓸쓸하고 사실적인 풍경들이었다. 80년대에 당시의 폭력을 지나치지 못했던 작가가 2000년대에 내놓을 법한 그림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의 그림이 현실의 참혹함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도피를 위한 도상이었다면, 2000년 이후의 그림들은 눅눅한 삶의 비참을 견뎌내는 방식으로서의 그림이다. 섣부른 희망이나 절망 없이 그려내기. 이 그림들이 아름답다면, 동시에 조금은 고통스러우리라. ● 이번 『번잉』展에서는 저마다 각자의 목적에 '번잉'하는 삶에서, 그러느라고 놓치고 있는 의미들을 발굴하고 전달하고자 한다. 하여, 이번 전시작들은 내용과 형식 양쪽에서 '그리기' 보다는 일종의 '발언'에 가깝다. 너무 많은 정보들 속에서 등가로 치환되고 상쇄되어 결국 0이 되어버리는 이슈들, 경악하다가 마비되어 무심해진 우리들, 삼키지 못해서 되새길 수도 없는 방금 전의 기호들, 이를테면 지하철 비상대피로 안내판의 천연덕스러움과 네비게이션 속의 실경들. 이 모든 동시다발 속에서 분열하거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번잉'하다가 다 태워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집이든 문명이든. ■ 우아름

전시서문 ● 얼마 전 소말리아에서 한 남성이 간통죄로 투석형을 당해 숨졌다는 소식이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인터넷 뉴스에서는 남성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 숨진 남성의 시신, 모든 것이 끝이 난 자리에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의 사진들이 사형 집행의 순간을 숨가쁘게 묘사하고 있었다. 이 기사에서 마우스클릭 한번으로 이동할 수 있는 또 다른 뉴스에는 한 일본인 우주비행사가 소유즈호에 탑승하여 우주에서 스시를 먹게 될 것, 그래서 건조한 참치를 준비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지금 이 시간 중동의 분쟁국가에서 어떤 고문이 자행되고, 얼마나 자주 인권이 유린되며,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전쟁의 희생양이 되는지, 충격적인 이미지가 기상천외한 옷을 입은 어느 팝 가수의 사진과 함께 시시각각 전세계로 타전된다. 이처럼 실시간으로 무차별 쏟아지는 뉴스에서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어느덧 모두 같은 무게를 지니게 된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정보가 가진 밀도들은 한 데 섞여 희석되고 마는 것이다. ● 황세준 작가의 이번 작업은 좀 다른 방식의 정보 전달이다. 용산이든, 광화문이든 작가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어디든 나름의 아픔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그는 포토저널리즘적인 고통의 재현을 거부한다. 그의 작업 속에 나타나는 공간들은 고유명사를 상실한 채 맥락에서 분리된 공간이다. 치열한 투쟁이 있었던 삶의 현장은 네비게이션 속의 한 지점으로 치환되고 무미건조하게 배열된 픽토그램과 타이포그래피 속에서 삶의 비참함과 남루함은 그 구체성을 상실한다. 그러니까 그가 제시하는 기호와 문자들은 일종의 윤리적 마지노선인 셈이다. 끊임없이 확산되는 미디어적 스펙터클에서 다른 사람들의 겪는 고통이 일상적인 것들로 환원되지 않도록 하는. 그렇다고 작가는 스스로 방관을 용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호에 익숙하다. 기호를 소비하는 일은 사고思考라고 불리기도 무색할 정도로 빠른 시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약속을 깨고 낯선 방식으로 쓰인 기호들을 통해 작가는 먼 곳의 고통을 가까이로 가져온다. 구체적인 삶의 공간들은 그의 작업 속에서 한낱 기호로 전락하여, 그 곳이 지니고 있는 아픔의 흔적을 드러내고 보여주지 않는 대신 스스로 사유하게 만든다. 기호는 파편화된 고통의 이미지보다 천천히, 그러나 더 오랫동안 그 고통을 환기시킨다. 이 행위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작가로서 그가 포기할 수 없는 현실감각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실천은 아니더라도 성찰과 동참을 요구한다. 적어도 우리를 고통의 구경꾼으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 번잉burning 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폐기이다. 태워진 것들은 황무지를 이룬다. 황무지는 그 어떤 재생도 이루어지지 않는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 작가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불을 기대한다. 모든 무감각한 것들의 번잉 후에 공감과 연민이라는 그 생생한 감수성의 재생을 꿈꿔본다. ■ 양은경

번잉 ● 1. '활력活力' 자체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있다. 좀 뻔뻔하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무기력은 싫다. 그건 더 뻔뻔스러워 보이므로. 활력과 무기력 사이의 어떤 위치를 찾기가 참 어렵다. 상냥한 위치, 그런 건 없을까. ● 2.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포털 사이트를 대충 훑고 나면 문자 그대로 '기력이 쇠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예 안보리라, 해도 이게 담배 같아서 끊기도 어렵다. 정보로 정보를 봉쇄하는, 아니 초토화 시키는 방법은 누군가의 기획일까, 아니면 자연 진화한 음모陰謀일까. 지면이든 화면이든 자욱한 넋두리들만 떠돈다. 윤곽만 남은 정보의 좀비들. 이것들은 멈추지도 죽지도 않는다. ● 3. 폭력에 대해 말하려다보니 작업 자체가 꽤나 폭력적이다.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우리 세기의 폭력은 거의 섬광과 같고, 우리는 그걸 '목도目睹'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보지는 못한다. 멀뚱멀뚱 + 풍자 같은 거 말고 개그를 좀 해볼 수 있을까, 했는데 이상하게 심각한 폼을 잡고 말았다. 에이, 좀 즐겁고 싶었는데, 라고 생각하다보니 요즘 심각한 것 만한 개그가 어디 있으랴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통째 개그'인 거다. ● 4. 도서관에서 추리소설을 찾다가 우연히 시집 '황무지'가 눈에 띄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어서 빌려 봤다. 보다가 황동규 시인이 '탄다' 라고 번역한 부분이 눈에 들어 왔다. 탄다, 그러니까 원문은 burning. 탄다, 거 좋네. 그러니까 '번잉' ● 5. 번잉, 이라고 '디씨' 스럽게 읽자, 번; 번외, 번제燔祭, 번신翻身, 번거롭다, 뭐 이런 게 떠오르고 이어서 잉; 잉여, 과잉, 징징 같은 것이 생각났다. 게다가 '번잉' 이라니. 상당히 억지스럽고, 얼마나 낯 뜨거운가. 그러니 이번의 작업들하고 잘 맞으리라. 원래 전시 제목은 '박력과 눈총'으로 할 계획이었는데 남의 책 제목을 비트는 것도 미안했고, 또 작업이 별 박력이 없어서, 그렇다면 박력이 없으면 눈총도 없다, 그래서 폐기. ● 6. 캔버스를 주로 평면으로써의 캔버스로 쓰게 되는 그림 작업을 하다가 이번에는 캔버스를 물질로 사용해 보았다. (좌천된 거 아니니 너무 상심하지 마라, 캔버스.) ● 7. 존 치버의 단편 소설 『세상의 모습』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그러므로 내 사슬들이 잔디와 집의 페인트로 이루어져 있는 동안에는 그것들이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묶어둘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내가 한 말에 대해, 자기의 외형적인 삶에는 꿈같은 속성이 있다고 한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억제되지 않은 상상력의 에너지가 슈퍼마켓과 독사와 구두약 통 속의 쪽지를 창조해냈다. 그런 것들에 비한다면 내 가장 분방한 몽상들마저도 복식 부기장 같은 진부함이 있었다. 우리의 외형적인 삶에는 꿈같은 속성이 있고, 우리가 꿈속에서 보수주의의 미덕을 찾아낸다는 생각으로 나는 즐거워졌다.) 그러면 우리는 '슈퍼마켓과 독사와 구두약 통 속의 쪽지'에서 뭘 끄집어 낼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 외형적인 삶이 가진 판타지의 밑그림에서, 등가로 치환되어 버리는 모든 정보에서 어떤 차이의 언어를 구救해 낼 수 있을까, 다. ● 8. 따져보니 나는 구원救援에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게 나의 로망은 아니지만 더 이상 나대지는 못하게 제어해주는 어떤 센서 같기는 하다. ● 9. 염치만 챙기지 말고, 염치껏, 은 지내기로하자. ("나무에 대한 대화가 수많은 불의에 대한 침묵을/ 내포하는 것이므로/ 거의 범죄 수준이 되는 시대", 라는 구절로 유명한 브레히트의 시「후손들에게」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대들이여,/ 인간이 인간을 돕는 세상이 오거든/ 우리를 기억해다오,/ 관대한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관대한 마음을 가져달라는 요구조차 할 수 없을 거다. 우리의 파렴치를 잊어다오, 정도일까.) 길에서 파는 떡볶이는 (언제나)생각한 것보다는 맛이 없고, 각목은 (언제나)기억했던 가격보다 싸서, 나를 (늘)흠칫흠칫 놀라게 한다. ■ 황세준

Vol.20091229h | 황세준展 / HWANGSEJIN / 黃世畯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