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 한남동 사람들

류장복展 / RYUJANGBOK / 柳張馥 / painting   2009_1223 ▶ 2009_1229

류장복_2009.1.16 2040 1978년 한남동에 태어나 거기서 살고있는 토박이_색지에 파스텔_49.7×34.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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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경인미술관 Kyung-In Museum of Fine Art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 Tel. +82.2.733.4448 www.kyunginart.co.kr

2009.2.7 토 ● 한남동이다. 솔고개 골목길 어귀에 섰다. 잔뜩 흐린 날씨에 사방이 밋밋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는 밤에 왔었다. 낮은 첨이다. 그냥 보이는 걸 그리자 돌아 다녀 봤자다. 맘에 드는 풍경은 늘 하나로 그게 그거다. 풍성한 이미지는 의도 밖에서 얻어지더라. 덩어리 지우자. 허름한 집들과 전봇대와 쓰레기통과 차들이 아우성쳤다. 저마다 가만히 있질 않았다. 시선이 닿자 튀어 오르듯 내게 돌진했다. 태생을 거슬러 모두 하나다. 본래의 한 몸으로 그들은 그 별에서 만난다. 개체마다 두고 온 저별의 흔적을 몸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운 것들이다. 그립다는 건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쩐지, 첨부터 낯설 지 않았어. 다시 쓰다듬듯 더듬어 그들을 찬찬히 보았다. 공기를 불어넣자. 개체 사이에 공기가 흐른다. 사이가 있어야 보인다. 시각은 접촉을 허용하지 않는다. 투명한 창 너머로 본다. 사이로 공기가 흐른다. 흐르지 않으면 생명은 멈춘다. 흐르는 사이에 활기가 있고 생기가 있다. 살아있음은 곧 사라져감이다. 사라지는 그들에게 경배를 들 때 사물은 살갗을 드러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뱉었다. 숨은 내장을 훑었다. 세상은 뒤집어 놓은 내 몸이었다. 기묘하게 정겨웠다!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자 사물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대기가 출렁거렸다. 빛 알갱이가 일렁이자 차례로 사물이 일어섰다. 어지러이 널린 전신줄이 공간을 째며 핏발을 세웠다. 줄지은 자동차가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로 중노인이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길을 휘휘 저어 올라갔다.

류장복_2009.2.21 1458 제천정 길에_보드지에 파스텔_54×38.8cm
류장복_2009.3.12 2346, 3.20 2433_종이에 목탄_78.8×56cm

2009.3.20 금 ● 이태리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일하는 23세의 아가씨다. 다양한 표정으로 그저 그런 일상의 이야기를 밝은 목소리로 힘도 들이지 않고 쏟아냈다. '일주일에 하루 반나절을 쉬는데 그 하루가 오늘이다. 모델서기를 마치면 동생이랑 노래방 가서 미친 듯이 놀 거다.' 자그마한 키에 연약한 몸매를 지닌 그녀의 손가락은 노동으로 단련되어서인지 막대기 같았다. '키를 훌쩍 넘는 큰 개를 키우고 있다. 고양이는 혼자 놀고 개는 같이 놀기를 좋아해서 개를 기른다. 산책 중에 오줌을 누면 그야말로 콸콸 쏟아낸다' 그녀는 깔깔 웃었다. '미용 일은 가위질이 서툴러서 그만 두고 의류를 공부하다 우연히 조리 일을 해보았는데 적성에 맞아 계속하게 되었다. 청담동, 압구정동에 이어 이태원의 솔티노에 오게 되었다. 보수는 월 150-200만원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게 꿈이 있다. 돈을 더 모으면 카메라 하나 딸랑 메고 정처 없이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를 쏘다니고 싶다. 이태리는 가고 싶지 않다. 나는 나를 무척, 사랑한다. 직찍 사진을 좋아한다.' 주방에 갇혀 하루 종일 일하는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고, 자라는 동안 사랑받지 못한 만큼 내가 나를 사랑해주겠다며 그녀는 꿈은 반대편의 현실을 말해 주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브레이크 타임이다. 주문은 저녁 10시까지다. 홀에 술 손님이 있으면 새벽 2시까지 대기해야 한다.' 레스토랑은 4차선 도로변에 있었다. 폭 10미터, 길이 40여 미터쯤 되는 2층 건물의 2층 전체를 쓰고 있었다. 길 건너편이 보이지 않고, 플라타너스가 창문 가까이 있어 바깥 전경이 답답해 보이지 않았다. '전면 창으로 계절의 변화를 볼 수 있어서 좋다. 건물 옆으로 5층 높이의 넓은 계단이 가파르게 위쪽 길로 이어져 있는데. 하프 타임에 그 계단에 앉아 쉰다. 솔솔 바람이 밑에서 불어오면 기분이 너무 좋다. 종일 화덕 앞에서 달아오른 뺨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준다.' 죽도록 일하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달콤한 행복이라며 그녀는 음미하듯이 중얼거렸다. '여긴 인테리어가 별스럽지 않다. 음식솜씨 하나로 손님이 바글바글 댄다. 20여명의 직원이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태리 견학을 간다. 외국인 주방장의 지휘감독아래 소스 하나도 만들어 쓴다. 그의 이름이 솔티노스다.' 그 때 실장이 나타났다. 처음 볼 때와 달리 진하게 화장했다. 홀의 분위기를 리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도 예스러운 인상이다. 생맥주 한잔과 마늘 피자를 먹었다. 오후 5시가 넘자 예약 손님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 백인 한 가족이 흰 무더기로 자리 잡았다. 그들의 느끼한 발음이 느끼한 음식과 닮았다. 자리를 일어섰다.

류장복_2009.3.21 1300_보드지에 파스텔_54×38.8cm

2009.3.21 토 ● 오전 11시쯤 도깨비 시장 길에 들어섰다. 골목길 귀퉁이에 어렵사리 주차했다. 초여름 같은 봄 날씨의 나른한 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앉은 채로 스르륵 잠들었다. 따가운 햇살이 살갗에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정오다. 화구를 챙겨 처음 한남동을 그렸던 골목길 계단을 찾았다. 골목길에 빛이 가득했다. 하늘에 맞닿아 있어 그런가 보다. 작은 종이를 먼저 꺼냈다. 빛을 쫓아 색을 흘려보냈다. 그늘도 환했다. 한 아이가 서서 한참 보더니 아예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고개를 꾸벅였다. 5학년이라고 했다. "그림에 넣어줄까?" 남자아이는 대답대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위쪽에서 아이를 부르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됐다고 하자 그제야 일어섰다. 그림 속에 잠시 나타났던 아이는 그림이 진행되면서 사라졌다. 다시 종이를 폈다. 목탄을 내쳤다. 단숨에 마치려 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낮은 희게 밝았다. 탄광촌 철암에는 낮이라 해도 검정이 있었고 작년 가을에 그린 한남동은 주로 밤이었다. 밤하늘은 시푸른 빛으로 우주의 색을 자아냈지만 대낮의 한남동은 달랐다. 하얀 빛이 그득했다. 빛을 좇아 칼라목탄으로 뒤덮었다. 손동작은 커질수록 소리도 요란했다. 와중에 웬 할머니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구부정한 노인이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치매증상이 있어 보였다. 조금 지나자 이번엔 웬 할아버지가 버럭버럭 욕을 해댔다. 후딱, 뒤돌아봤다. 천천히 걷는 할아버지의 눈은 먼 곳에 맞추어져 있었다. 얼핏 초연해 보였다. 그림을 끝내고 좁아터진 시장의 오르막길로 차를 몰았다. 저 앞에 꼬부랑 노파가 시멘트 길을 지르밟으며 가고 있었다. 갈지자로 기우뚱거리는 걸음을 비켜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기다시피 뒤를 좇았다. 흘낏 노파가 뒤돌아보더니 놀란 듯 비켜섰다. 결국 그녀의 세상을 무단으로 침범한 꼴이 되었다. 서둘러 선술집 이찌모에 들어섰다. 브레이크 타임이 2시간 남았다. 그녀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작은 눈을 치뜨고 곧은 자세를 취했다. 은은한 실내조명으로 사물의 음영이 약했다. 색을 놓아 그늘을 채우고 배경을 채웠다. 엉덩이에 쥐가 날 지경으로 그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좀 전에 과도한 힘을 쏟은 탓인지, 그림은 맥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류장복_2009.12.4 1604 제천정 길에_리넨에 아크릴채색_33.4×53cm
류장복_2009.12.4 2714_리넨에 아크릴채색_33×77cm
류장복_2009.12.20 0905 한남동 아침_리넨에 아크릴채색_72.7×50cm

2009.11.14 토 ● 제천정 골목길에 섰다. 겨울의 문턱이라지만 차 안에서 보는 풍경은 따스하기만 했다. 골목길은 하얀 빛으로 환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꼭 누가 지나갔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한적한 골목인데도 밤이건 낮이건 오가는 사람이 있었다. 무명배우처럼 무대에 올랐다가 그냥 사라졌다. 동작대교 아래로 갔다. 강 건너 새로 재개발된 반포동의 아파트 상층부의 불빛더미가 잠자리의 눈처럼 보였다. 거대한 외계인을 연상케 했다. 프러시안 블루의 짙은 하늘에 흰 구름이 선명했다. 유람선이 무거운 밤을 갈랐다. 강가에 갈대가 바람에 이리로 또 저리로 하얗게 흔들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다리 아래 떨어진 불빛이 뿌옇게 사라졌다. 긴 치마의 여자가 팔다리를 뻗어 큰 걸음을 내걸었다. 자전거 위에 몸을 구부린 사람이 뒤를 쫓았다. 2009.11.21 토 ● 남산에 지는 해를 보았다. 붉은 해를 등진 겨울나무가 꿈틀거렸다. 구름 뒤로 해는 지긋한 눈빛을 대기에 흘려보냈다. 해가 가라앉자 주위가 눈에 성큼 다가왔다. 배낭 맨 사람이 저기 걸어갔다. 남산 길마루를 막 내려서는 자동차의 불빛이 샛노랗다. 바로 옆에 빨간 반딧불처럼 차 꽁무니를 이어 고갯마루를 넘어갔다. 그새 하늘은 파랗고 노랗고 발갛게 변했다. 얼마 후 초저녁의 푸름이 낮게 깔렸다. 솔고개 마루 2길에 첩첩의 병풍처럼 언덕에 쌓인 집들이 시선을 가로막았다. 창마다 새나오는 노란 불빛이 정겹다. 비탈진 길옆에 한사람이 이제 막 귀가하는지 현관문의 열쇠를 찾았다. 2009.11.28 토 ● 한남동 대사관 길을 보았다. 비스듬한 언덕길이 정겹다. 어느새 은행나무의 가지가 앙상했다. 신경질적으로 뻗은 가지 끝에 매달린 늙은 은행잎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잔뜩 움츠린 한 사내가 웃옷에 양손을 찔러 넣고 걸어 내려왔다. 동작대교가 있는 강가로 갔다. 오후의 태양이 진한 대기에 퍼져 만연했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걷거나 뛰면서 강가를 오갔다. 늙은 나뭇잎이 바삭, 부스러질 것 같은 몸으로 태양을 품어내고 있었다. 밤이다. 이따금씩 동작대교를 오가는 전철의 굉음이 대기를 흔들었다. 까만 밤이 술렁였다. 강물이 거대한 생물처럼 번들거리며 천천히 넘실거렸다. 어중간한 주홍과 빛바랜 노랑과 침침한 파랑과 늙은 보라가 뒤엉킨 채 침묵했다. 강물에 떨어진 현란한 불빛을 배경으로 한 사람씩 무대 위를 지나가듯이 지나갔다. ■ 류장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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