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닥 시리즈 2009 the HOLEGATE

이원정展 / LEEWONJEONG / 李元精 / mixed media   2009_1222 ▶︎ 2009_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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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_경기문화재단_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_King of the Art

서울 용산의 재개발 길바닥

이원정의 노동1. 시작하다. 한 사람이 있다. 성별은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우연히 어떤 사람에 대한 흔적을 만나게 된다. 그 사람의 흔적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살아 있는가? 죽었는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흔적은 다른 흔적들을 유추해 낸다. 발견한 사람은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아니라 자기 가 유추한 흔적의 흔적을 찾아 유기적으로 분열 생성되고 있는 발견된 사람의 의식의 흔적과 그것들의 표피를 발굴하고자 한다. 그 사람은 화석화 되어 지층의 결에 자신의 썩어 가고 있는,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닌 희생자도 아니고, 희생의 수혜자도 아니다. 추상적 역사의식은 비판의 칼을 피해 갈 수 없다.

이원정-더홀게이트_혼합매체_가변설치_2009
이원정-더홀게이트_혼합매체_가변설치_2009
이원정-더홀게이트_혼합매체_가변설치_2009

2. 움직이다. ● 이 작업을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났다. 구덩이를 파고들어 갔다. 수직의 둥근 구덩이와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 비스듬하고 수직의 벽을 가진 구덩이 하나를 더 팠다. 수직의 구덩이에는 비닐의 면을 가진 정육면체를 만들어 위에 올려놓았다. 외부에서 그 비닐의 표면에 빛을 비추었다.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 비닐에 영사 되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의 재현(再現)적 이미지가 만들어 졌다. 재현(再現)적이란 뜻은 무엇에 대한 그럴듯한 행위의 연기되어진, 또는 그것을 대상화하려는 리얼리즘의 환상에 대한 숭고한 경배의 표현이다. 무엇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며 있을 것 같은, 앞으로 다가올 것 같은 그 무엇이다. 그것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재현적 이미지로 구축되어지는 형상을 만들기 전의 조소의 형틀과 같은 것이다. 구덩이들은-이구덩이는 두개의 복수화 되어진, 구덩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작가가 설계한 세계의 대상화로 재현된, 구체성(具體性)을 띠는 물질화의 과정에 놓여 있는 특이성을 가지게 되었다. 각각의 구덩이들은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시간을 담아내고 있으며, 그 시간성의 이미지화는 구덩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덩이를 형성하는 과정에 발견된 구덩이의 표면에 겹겹이 층을 이루는 지층의 결로 나타내어지고 있다. 그 결의 무늬는 정확히 선을 긋는 선 그자체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결의 각각의 정확한 위치와 차이는 결정된바 없을 뿐만 아니라 반복되어지는 결의 차이로 구덩이의 깊이에 비례하여 구덩이의 모습이 변화한다. 그 변화는 시간성이라는 시간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공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시간의 의미에 대해 시각화되어지는 경험을 가져다준다.

이원정-더홀게이트_혼합매체_가변설치_2009
이원정-더홀게이트_혼합매체_가변설치_2009
이원정-더홀게이트_혼합매체_가변설치_2009

3. 생각하다. ● 구덩이를 파는 행위는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경험의 획득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그 행위의 연희자(演戱者)나 또는 다른 노동의 대치로 만들어진 그 결과물의 최종 시각적 모습으로 담아 낼 수 없는, 그 것만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구덩이를 파는 행위는 공유될 수 없다. 공유 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공유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자에 대한 피경험자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은 제어되어야 하는 생명이다. 그것이 제어 되지 않거나 또는 욕망으로 발현되기를 무시당한 윤리적 구속에 머물게 되면 그것은 스스로 죽이거나 그 주체자를 죽일 것이다. 제어되어지는 것과 윤리적 구속은 다른 것이다. 제어되는 욕망은 욕망의 주체적 소비자를 그 대상에서 자유롭게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지만 생산된 욕망에 의해 소비된 쓰레기들은 주체적 소비자를 자유롭게 한다. 하지만 윤리적 구속에 머무는 것은 소비자를 스스로 소비시킬 뿐만 아니라 소비된 쓰레기에 의해 함몰되어 죽어 버리게 된다. 모든 것이 그렇듯 죽은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며, 상관없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관계가 아니라 상관없음 그자체가 되는 것이다. 절대 상관없음이다. 구덩이를 파는 행위는 구덩이의 모습보다 더 직접적인 설계자의 의도가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반영되어진 것이 아니라 반영되어진 대상의 유기체의 모습을 행위자가 행위하며 그 공간의 생성과 시간의 생성 경험을 하게 하는 세 지점이 정확한 꼭지점을 점유하며 생성되는 경험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것은 공유될 수 없는 재현의 것이 되는 것이며 재현의 소비적 욕망은 재현의 재현을 욕망하지만 그것은 결코 공유도리 수 없는 대상화의 대상으로 선이 그어지는 것이다. 설계자는 정확한 최종의 결과 물질로서의 설계도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획득된 경험의 재반영으로서의 그려지는 설계도면을 가지고 계속해서 새롭지 않은 그려지고 있는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계자의 의도뿐만 아니라 설계도면 스스로 더 정확히 말하면 설계되어짐 대상이 스스로 자라는 지능을 가진 로봇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의 것이 스스로 자신을 정의 내리고 그 모습을 다시 대상화하여 설계자의 설계도면에 반영 할 수 있는 합리적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설계자는 절대적 창작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협의 대상이 되는 수평적 관계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 이원정

전시관련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bV-2-L5u2fI http://www.youtube.com/watch?v=7GDhm7JQxMs http://www.youtube.com/watch?v=AqVUx_uoAKA http://www.youtube.com/watch?v=U-_y5O3zNaI

Vol.20091230d | 이원정展 / LEEWONJEONG / 李元精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