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선展 / JUNKYUNGSUN / 全慶善 / sculpture   2010_0113 ▶︎ 2010_0119

전경선_투명한것에 대하여_나무_280×270×200cm_2009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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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11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고도_GALLERY GODO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Tel. +82.2.720.2223 www.gallerygodo.com

기억한 것을 미루어 '몸'을 헤아리다기억의 물상物像과 형상形象이 교차하는 전경선의 조각론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은 본 것을 미루어 보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 들은 것을 미루어 듣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 익숙한 것을 미루어 익숙하지 못한 것을 헤아리고, 있는 것을 미루어 없는 것을 헤아리는 것이다" (혜강 최한기, 『기측체의氣測體義』,「추측제강推測提綱」편)

전경선_투명한것에 대하여_나무_280×270×200cm_2009

'기억'이 깃들다 ● 『기억』을 형상화한 작품 중 유일하게 몸의 내부를 실체화한 것이 있다. 작품의 구조를 보면, 기단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단순히 바닥이라고 할지, 물의 표면을 형상화한 부분이 가장 아래에 펼쳐진다. 물의 파동은 중앙에서 솟아 잔물결을 만들며 번져간다. 가만히 살필수록 작가가 새겨놓은 메타포의 섬세한 구석을 찾아 낼 수 있는데, 물의 표면이 마치 낮은 계단을 오르듯 상승하는 걸 보아, 어떤 흔적이 발생하여 파동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억이 기명(記銘)된 심연으로부터 몽글몽글 샘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위로 가벼이 떠 있는 듯, 연기처럼 피어오른 형상이 있다. 이것은 기억이라는 '뇌'속의 메모리가 물상의 형상으로 재현된 조각이다. 딱정벌레 과의 곤충처럼 외골격의 껍질을 나무로 하고, 그 내부에 물렁한 육체의 실상을 담아 놓은 이 작품은 존재의 나약성이나 자폐적 고립, 고독, 그리고 트라 우마(trauma)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초상을 보여준다. 1993년 개성 태조 왕건릉에서 출토된 왕건 청동상이 풍기는 그것처럼 벌거벗은 인간의 몸은 부서지기 쉽고, 존재의 위상 따위를 가질 수 없는, 참으로 '적나라함' 그 자체이다. 작가는 이 물컹거리는 속살이 바로 자신이며, 또한 '그'는 현실과 기억(과거)을 매개하는 자이며, 기억을 통제하려는 '바깥'으로부터 상상의 지평을 꿈꾸는 영토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의 심연이라 할 수 있는 '샘'과 그 샘으로부터 솟아 오른 기억의 물상이 심하게 일그러진 상태를 노정하고 있으며, 물상의 존재가 인간의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매직 쇼에서 펼쳐지는 '사라짐-나타남'의 놀람처럼 갖가지 유형의 동물들이 뛰쳐나오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경선_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_나무_280×250×200cm_2009

이 작품의 머리에는 뚜껑이 있다. 그 안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화들짝 도망 나온다. 껍질 안에 갇혀 있는, 미라처럼 굳어 버린 자아가 환한 통로를 돌아보며 비로소 생명을 얻어 깨어나는, 어떤 날의 찰나적 체험이 모티브였다. 자, 그렇다면 이 물상이 지닌 심리적 해제의 단서를 어떻게찾아야 할까.

전경선_10월 늦은 오후에_나무_80×50×10cm_2009

몸,기억의 집 ● 전경선은 첫 번째 개인전(1998년)에서 『공존』이라는 테제를 작품의 단서로 설정했다. 대주제로서 '공존'은 다시 소주제에 의해 구체화되었는데, '거리의 형상' '구속의 형상' '기억의 형상' '지배의 형상'이란 작품들이 연작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니까 「공존-00의 형상」이라는 연작을 통해 작가는 '공존共存'이라는 더불어 삶의 행태에서 '공共'과 '존存'의 양태를 분리해 내는 심리적 성찰을 시작했다. 즉, '공존'의 사람살이가 의미하는 사회적 체계와 정치성이 아닌 '공'과 '존'의 상극성에서 비롯된 실존적 맥락의 존재성을 들여다 본 것이다. 고독한 존재로서의 한 인간이 사회화될 수 없을 때의 고통은 필연적이며 원죄적이라 할 것이다.「공존-거리의 형상」은 '나'의 몸에 갇힌 다른 '나'의 형상을 두 개의 거울사이에 선 '나'의 모습처럼, 몸 안의 몸이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두상의 얼굴에 창살을 박고, 머리통은 옥(獄)이 되어 거리를 떠도는 이들의 모습을 가둬 놓았다. 이때의 공존은 서로가 서로를 가둠으로써 소통을 절연하고 결국엔 격리된 자아들의 만남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토로한다. 많은 날들이 그랬듯이 때때로 우리는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거리에서, 공원에서, 광장에서. 그 숱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와 '당신'들은 지나칠 뿐이다. 「공존-구속의 형상」도 다르지 않다. '공'이 '존'을 구속하거나 '존'이 '공'을 길들이려 하고, '공'은 '존'과 주종관계를 형성시킨다. '존'은 때때로 좌절하고, '공'은 폭력이 되고 억압이 된다. 개의 형상을 빌어 등장한 '공'의 얼굴에는 무수한 '존'의 실체들이 갇혀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 개의 목에 개줄이 있는데, 작은 '존' 하나가 개줄을 잡고 주인 행세한다는 것이다. 모순에 찬 이 관계야 말로 결코 풀 수 없는 '관계'이다. '지배의 형상'이란 작품도 '거리'와 '구속'의 은유로부터 멀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공존-기억의 형상」에서 8년이 지난 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기억'의 이미지를 만날 수 있다. 촛대와 초의 형상을 의인화해 풀어 헤친 기억의 잔상은 활활 타 오르는 촛불처럼 종국에는 한 점 연기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초의 운명과 닮아 있다. 역시 촛대 바닥에는 그곳이 현실의 지반인지 아니면 상상계의 영토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어떤 곳'이 설정되어 있다. 초를 보면, 촛불의 아른거림에서 인물의 초상을 끌어내고, 불꽃으로 산화하는 파라핀의 몸에서 벌거벗은 여인의 나상을 찾게 된다. ● "(기억에 있어) 기명이나 보유가 확실히 행해졌다고 하여 재생이 완전히 행해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재생이 언어나 그림 부호나 음률로 표현될 때는 표현기능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도 그것을 언어나 그림으로 나타내려고 하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또 재생에 두 가지 제약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다른 기억흔적과의 상호간섭이다."(사전적 의미에서)불꽃얼굴의 뚜껑을 열어 그 내부에서 상호 간섭된 기억의 흔적을 찾으려는 작가의 노력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이때의 기억이란 붙잡기 힘들고, 더불어 구체적인 형상과 연결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상해나가는, 현재의 작업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때의 작품에서 이미 작가는 '몸'이라고 하는 기억의 집을 통해 작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공존」연작이 개별적 지위를 형성하며 독자한 작품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 이제는 작품 하나하나가 통일적 상황 안에서 '연출'을 요구받을 만큼 상보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전경선_One_나무_35×80×10cm_2009

연기 혹은 화염 ● 기명과 보유, 재생이 분명하다 하여도 기억의 흔적과 잔상은 위에서 밝혔듯이 '상호간섭'을 받는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 다른 기억들과 겹쳐질 수 있다는 얘기이며, 이렇게 오버랩 된 기억들이 기명과 보유, 재생의 채도와 명도가 차이를 드러낼 때 어떤 기억은 묻히고, 어떤 기억은 새로워지며 어떤 기억은 점수漸修되어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정수리를 향해 흘러갈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이 전경선이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며, 한 작품의 완성은 점수의 완성이 되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예로, 무릎을 꿇고 팔장을 괸 여인의 나상을 보라. 이 여인의 두상은 기억의 흔적들이 여러 갈래로 흘러갈 뿐 아니라 그 모든 잔상이 연기로 피어오르는, 즉 니르바나(寂滅)의 화염을 피우며 해탈하지 않는가 말이다. 웅크려 앉은 고양이의 몸도 다르지 않다. 고양이의 머리도 불꽃이 되었고, 그 안에 구속된 '나'의 초상은 이제 평온한 적멸의 상태를 보여준다. 촛대의 상이 몸의 상으로 바뀌었을 뿐 몸을 산화해 허공의 빈 존재로 돌아가는 근원적인 문제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폐사지 순례를 했던 이지누는 빈 절터에서 돌부처를 만난다. "비록 문드러지고 머리마저 잃었지만 부처님은 부처님이다. 그 앞 주춧돌에 올라앉아 뭐 그리 할 이야기가 많은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라도 그리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것이,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만 스쳐 갈 뿐 그 앞에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폐사지 순례는 온전한 것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바꿔 말해보자. 전경선의 작품들은 대부분 '머리'가 온전치 못하다. 몸의 기억들이 피어올라 화염에 휩싸여 있는 머리들은 그야말로 '문드러진' 얼굴이다. 그리고 몇 몇 작품들은 아예 머리조차 없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되새김하며 묻는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무엇이냐고. 아니 '나'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과연 온전한 것인지, 아니면 다만 스쳐가고 있는 것인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경선의 「기억」연작은 '행복' '사랑' '자유'와 같은 양지의 단어들이 아니라 '쓸쓸함' '축축함' '멀어짐'과 같은 자기 서사적 표현의 깊은 슬픔이란 사실이다. 눈물과 흐느낌, 통곡의 쓸쓸함이 아니라 그것은 스스로 홀로 세움을 감당해 내는 거대한 존재감 같은 것이다. 그러니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비가 온다. 우주의 물방울에는 생(生)의 뿔(角)이 솟아있다. 뿔은 씨앗처럼 거울처럼 알처럼 투명하게 '당신'을 품고, '나'를 비춘다. 뿔에 투영된 '우리'의 얼굴은 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다시 거리에 구속되었던 새들을 자유롭게 한다. 씨앗이 터질 때마다 한 존재의 그림자는 법열에 든다. 몸에 깃들어 있던 '기억'들이 홀씨처럼 흩어진다. 어디에고 있고 어디에도 없다. 이렇듯 전경선의 조각들은 일상의 기억들이 산화된 꽃밭이다. 무성한 개망초의 들녘처럼 세상의 거리가 환하다. 그러니 꽃을 미루어 몸을 헤아리고, 몸을 미루어 기억을 헤아릴 일이다. 그 기억들이 씨알 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지 않겠는가.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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