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공간·기억

최은정_김시내_정혜령展   2010_0116 ▶︎ 2010_0228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구로아트밸리 갤러리 GUROARTSVALLEY GALLERY 서울 구로구 의사당길 12(구로동 101번지) Tel. +82.2.2029.1700~1 www.guroartsvalley.or.kr

대지를 재생하는 작업, 낙원에의 희망을 찾아서시간과의 투쟁 혹은 추상으로 표현한 풍경 신문으로 종이죽을 만들어 건조시킨 후 그것을 다시 일정한 넓이로 잘라 화면에 조금씩 쌓고 있는 최은정의 작업은 지루하고 강박적인 특징이 있다. 이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단적으로 말한다면 시간과의 투쟁이자 자신을 시간이란 사슬로 묶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싸우는 것이든 마치 정해진 공정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기계처럼 반복적인 노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든 그 결과는 화면에 주름의 형태로 켜켜이 쌓아올린 물질의 누적으로 나타난다. 단단하게 건조된 종이란 물질의 축적은 곧 누적된 시간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물질과 시간의 관계는 상호교환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대단한 집중도와 지구력을 요구한다. 이처럼 편집적이리만치 동일한 작업방식에 매달리는 작가로 로만 오팔카(Roman Opalka)와 카와라 온(河原溫)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은정이란 젊은 작가를 이미 국제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두 작가와 단순 비교한다는 것이 과도한 것이긴 하지만 작업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서로 비교의 필요는 있을 것이다. 화면에 숫자를 계속 적어나가면서 자신이 기록한 숫자를 읽고 그것을 녹음하는가 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여 함께 전시하는 오팔카나 자신이 일어난 시간을 기록하여 엽서로 발송하는 카와라 온의 작업은 결과보다 현재에도 지속 중인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최은정에게 있어서 집요하도록 지루한 반복의 과정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팔카나 카와라과 비교할 때 최은정의 작업은 그 결과에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앞의 두 작가가 형태보다 개념이 앞서는 반면 최은정에게 있어서 형태가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 파문처럼 소용돌이치는가 하면 끊겼다 이어지는 표면의 결은 바람에 의해 대지에 그려진 모래사막의 주름이나 융기와 함몰을 거듭하여 형성된 산맥과 계곡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미시적으로는 잘 직조된 직물의 구조나 피부를 구성하는 세포조직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작품을 구성하는 단위들의 결집과 이완의 반복은 시각적 리듬을 형성하면서 보는 사람의 시선이 그 표면에만 머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조직 사이로 난 고랑까지 더듬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이 미세한 구조가 아니라 경계(edge)가 분명한 형태, 다시 말해 흡사 원생동물과도 같은 유기적 형태이다. 이것을 감싸고 있는 외부는 고른 평면으로써 짙은 갈색의 대양(大洋)이나 대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형태들이 마치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지구의 한 부분, 즉 산, 강, 평야는 물론 곶(cape)이거나 만(gulf) 또는 반도(peninsula)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추상으로 표현한 풍경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최은정_나_신문지, 커피가루_122×177cm_2008 최은정_나_신문지, 커피가루_122×177cm_2008
최은정_맥_신문지, 커피가루_170×69cm_2009 최은정_맥_신문지, 커피가루_170×69cm_2009

재생(rebirth)하는 대지 ● 최은정의 작품에 대해 많은 이론가들은 대체로 시간의 축적에 대해 주목했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시간은 중요한 개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시간에 지나치게 주목할 경우 최은정의 작품이 지닌 형태와 방법이 지닌 특징에 대해서는 자칫 소홀해질 수 있다. 먼저 그의 작품이 사각틀을 경계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적 특성을 지닌다는 점이 부각된다. 그의 작품이 '추상으로 표현한 풍경'처럼 보이는 이유도 형태 못지않게 사각공간을 프레임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넓은 모노크롬의 가장자리로 얕게 융기하여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맥」이란 작품은 두텁게 바른 커피가루가 건조되는 과정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바 매우 의도적이고 섬세한 작업과정과 아울러 우연하게 나타난 결과까지 수용하여 작품의 회화성을 고양시키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신문조각을 켜켜이 이어붙인 비정형의 복잡한 형태가 가장자리의 확고한 경계에 의해 '닫힌 공간' 속에 위치한다는 점은 평면과 입체가 한 작품에 공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형태를 규정하는 기본 물질은 종이죽이 된 신문과 커피전문점에서 제공한 폐기된 분말이다. 복잡한 구조의 조직들이 으깬 신문을 쌓은 것이라면 표면의 갈색은 커피가루이다. 신문이나 커피가루는 다 같이 효용성을 상실한 '잉여물'이자 재생(recycle)을 위한 재료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에서 재생은 시간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사각 프레임 위에 그려가는 혹은 구축해 가는 형태가 유기적인 생명체의 단위이거나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폐기된 물질을 재활용하여 새로운 맥락의 작품으로 제작하는 것은 곧 자연이나 대지의 재생(rebirth)이란 차원과도 연결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대지의 재생'을 위한 시도라고 보는 것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최은정의 작업은 시간과의 투쟁 또는 그것에의 순응을 통해 자기존재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한편 이 지독한 집중의 과정 속으로만 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폐기된 물질의 재활용을 통해 자연이나 대지의 재생은 물론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까지 재생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이 지닌 갈색의 어두운 색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죽은 자연'에 바치는 진혼곡이 아니라 잃어버린 낙원에의 기대를 지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소 논리적인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은 텅 빈 공허한 대지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다시금 복원할 수 있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최태만

김시내_시간의 흐름 1_스테인레스_270×50×70cm_2006 시간의 흐름 4_스테인레스, 알루미늄_300×130×70cm_2006

빛과 선의 윤무, 시간을 결집하다 ● 김시내는 재료의 물성을 통해 빛의 선들을 엮어 시각적으로 연출하는 조각가이다. 그녀는 주로 스텐레스 스틸 제품들이나 알루미늄 같은 현대 건축 재료를 주로 사용하여 비교적 가는 선을 엮거나 용접하여 구조물을 만든다. 외곽 형태를 만든 다음에 선 하나하나를 엮어 리듬감과 흐름이 강한 형태를 만들어 낸 이 구조물들은 공간에 펼쳐지면서 관람객의 시각과 더불어 빛과 선의 윤무와 같은 역동성을 자아낸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업은 단순한 구조물이기 보다는 공간에 펼쳐지는 선의 연출인 셈이며, 실재공간에서 현실적인 움직임을 수반하기 보다는 빛과 선에 의한 시각적 효과를 창출하게 된다. ● 현대조각에서 연극적 요소들은 매우 쉽게 발견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그의 소논문 「기계적 발레들 : 빛, 움직임, 연극」에서 마이클 프리드의 견해를 빌어 조각의 연극성에 대해 논한다. 기존의 예술은 규범적 진술로부터 고유의 본질과 특성을 발견함으로써 경계를 구분 지었지만, 마이클 프리드에 의하면, 조각과 연극을 구분해 주는 지표는 시간개념인데, 조각의 경우 시간적 경험이 실제 경험과 결합하는 양상이다. 크라우스는 이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조각가들이 이러한 연장된 시간개념에 관심을 가지고 연극과 연관된 작업을 하거나 전시공간을 연극화 시키려는 조각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연극성은 키네틱 아트와 라이트 아트, 설치미술에도 적용된다.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업들은 나움 가보의 1920년대에 제작한 「움직이는 구조물」의 기하학적 구조물을 좀 더 진전시킨 예로써,(로잘린드 크라우스 KRAUSS (Rosalind), 『현대조각사의 흐름(Passages in modern sculpture)』, 윤난지 역, 예경 1997, pp.237-244참조) 그는 모빌 작업에 공기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다양한 속도로 부드럽게 회전하는 원동력, 즉 운동의 대위법을 창출한 키네틱 아티스트이다.(니코스 스탠고스 편, 『현대미술의 개념』, 성완경․김안례 역, 문예출판사, 2000, p.315-316 참조) ● 김시내의 작업은 키네틱아트에서와 같은 연극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형태상으로는 나움 가보와 유사한 기하학적 구조물이기도 하다. 그녀의 선 작업에는 외곽형태, 다시 말하면 경계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래주의 작가 펩스너의 작품에서도 그녀의 작업에서와 같이 외곽형태를 기점으로 한 선적구성을 보여준다. 그의 1948년 작품, 「달걀구성」은 달걀의 형태에 기초를 두고 복잡한 브론즈 곡선의 면들을 조합해서 만들어 진 것인데, 성장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 선들의 역동성은 형태들이 원심력의 핵심부 주위에서 소용돌이처럼 보인다. 나움 가보의 「Torsion, Variation」 작업에서도 이러한 역동성은 스텐레스 스틸 선과 빛의 관계에 의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김시내의 작품 「시간의 흐름 8」은 이들 작업과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평면에 가까운 뼈대에 교차 면을 형성하도록 수직, 수평선을 이용하여 볼륨감을 덧붙인 형태이다.

김시내_Drawing1_페인팅_280×400cm_2006 김시내_Drawing3_페인팅_40×70cm_2008

김시내는 형태와 구조에 앞서 작품제작과정에 더 많은 의미를 둔다. 그녀에게 있어 선을 한 줄 한 줄 엮거나 스텐레스 봉을 한 선 한 선 용접하는 과정은 시간을 엮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시간은 삶과 존재에 대한 은유이며, 살아있는 생명력의 에너지이다. 베르그송은 그의 저서 『창조적인 진화』에서 삶과 시간의 인식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우리의 경험세계는 물질성과 오브제를 인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더 나아가 우리의 인식체계 문제를 추억과 관련하여 "나는 지속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 한다"로 함축하고 있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진리란 각기 다른 원인들이 어느 한 지점에 모여지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이다.(Arthur Szathmary: The Aesthetic Theory of Bergson, Cambridge, Mass., 1937, S. 4-5 Georg Simmel: Zur Philosophie der Kunst, Potsdam 1922, S. 141) 이때부터 미술작품에 표현되는 시간은 일차적으로 역동적인 흐름과 유사하게 이해되고 있다. 미래주의 작품에 나타난 단계적인 변화, 움직임-시간은 이러한 베르그송의 지속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 조각에서 재료에 의한 물성, 그리고 재질감은 우리의 경험조건들과 연관된다. 때문에 물질과 형태는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다. 김시내의 2006년 작품, 「시간의 흐름 4」은 한 점을 향해서 선들이 집중되거나 분산되는 움직임들이 가시화 되어있다. 그녀가 스텐레스 봉을 용접하여 만든 이 작업들은 선의 방향도 중요하지만 용접되는 연결고리들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흔적들은 우리의 삶에서 매 순간마다 행해지는 일처럼 기록되고 기억되는 시간을 함유한다. 그리고 명암대비가 강한 이 선들은 빛을 난반사하며, 교차하거나 병치된다. 결국 김시내의 선 작업은 시간을 집적함으로써, 삶과 존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상하의 대비되는 구조로 표현된 다이아몬드 형 구조작품, 「시간의 흐름」은 이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김시내의 작업은 주로 스텐레스 스틸과 같은 금속성 재료나 은색, 금색과 같은 빛에 반응하는 물성을 지닌 재료를 사용하여 선형태의 작업을 한다. 이 선들은 하나 하나 용접하는 작업과정에서 일상과 존재에 대한 시간의 연결고리가 되어, 작품에 표현된 역동적이고 균질성을 지니는 한편 변화하는 공간은 삶의 공간과 마찬가지이다. ● 김시내의 2003년에 제작된 설치작업, 「무제 2」는 연극적 요소들을 강하게 드러낸다. 작가의 말을 빌면, 이 작품은 가지 않아도 되는 장소를 실내에서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으며, 영상 이미지에 어딘가에서 본 듯한 바다 풍경을 담아 관객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녀는 빛을 통해 쏘아 올리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고자 시도했다. 또 다른 2002년의 설치작업 「무제 1」은 물이 떨어지는 소리 및 물의 운동성을 이용한 물의 순환 현상을 표현한 작품인데, 물에 빛이 반사되어 나타나는 빤짝임의 현상적인 부분은 관객에게 서정적인 교감을 전해준다. 그녀의 드로잉 작업, 「시간의 흐름 Drawing」 역시, 물에 반영된 빛의 현상에 주목한 작품으로써 선을 통한 반복적 행위를 통해 반짝이는 햇살의 물결을 표현하고 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작은 선 하나 하나에 묻어나는 제소의 느낌을 고체화 한 느낌으로 시각화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드로잉은 재료와 작가의 행위가 만들어 내는 우연성을 그대로 엮어낸 작품으로 이 순간들이 작은 선의 집합체를 이룬다. 선은 규칙적으로 칠해져 있지만 물성과 행위의 결과에 의해 바람이 살결에 묻히듯 남겨지는 빛의 윤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녀는 또 다른 드로잉 작업들에서도 아크릴 물감과 금색, 은색을 사용하여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빛의 효과를 지닌 선 작업을 실험하고 있다. 물성과 선의 작업은 오브제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빛과 형태, 물성은 이들 작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 김시내는 대학 때부터 현재의 박사학위 과정까지 충실히 조각활동과 연구에 전념해오고 있는 조각가이며, 1993년부터의 많은 초상이나 추상 조각 등의 다양한 기념비 조각상 제작에 참여한 바 있고, 1997년부터의 한국 조각가 협회전, 서울 현대조각전, 현대미술작가초대전, 국제현대미술제등 다수의 기획전이나 단체전에 출품한 역량있는 조각가이다. 또한 그녀는 일찍이 지난 2003년 12월 1회 개인전에 용접을 통한 금속선의 조각형태들을 전시하여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최근 결혼과 출산으로 약간의 공백기를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다시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녀는 보다 성숙하고 심도 있는 작품을 보여주리라 기대한다. ■ 이봉순

정혜령_기억하다-작품(자라다, 3×3×5m사용한 나무젓가락 5상자, 철사, 2008, 자라섬)을 태운 재, 재에서 나온 금속, 아교, 사진_180×140×80cm_2009 정혜령_기억하다-여행_작품(오늘도 달린다,50여명의 아이들이 만든 기차,20m나무에 크레파스,2009,연천역) 를 태운 재, 아교, 나무, 철사, 사진_258×40×200cm_2009

정혜령 論 ● 정혜령의 작업에 대해 나는 두 가지 흐름을 따라간다. 하나는 컨셉, 아이디어가 중요한 한시적인 프로젝트 작업과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젝트들 마다 어떤 일관된 고리가 있다는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이 글은 이번 전시만을 다루지 않는다. 역사적인 접근으로 그녀의 작업이 어떤 시간과 이야기 위에서 변주해왔는지 보려한다. 전경(前景) ● 현대미술이 이미 내적 불일치를 지닌 이중의 딜레마를 본래부터 안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한 작가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사회든 개인이든 내적인 갈등과 불일치에 따라 발생하는 에너지가 창작의 에너지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정혜령의 경우 전통적인 현대미술의 현상과 주류 담론이 와해되고 새롭게 재편되는 과정에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작가로 미술계에 진입할 때는 이미 포스트모던이니 후기 구조주의니 해체주의니 하는 담론들과 현상들이 한국사회에 완전히 자리 잡은 시기였다. 이 시기 우리의 삶과 예술, 기억, 마음의 운동은 어떤 결절점에서도 열려있어 어디에든 또 어떤 것으로도 접속할 수 있는 '리좀(Rhisome, 식물의 잔뿌리)'으로 비유되었다. 이항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은 힘을 잃었고 '이산(離散, Diaspora)'은 시대의 키워드처럼 빈번하게 회자되었고 이성과 광기가 융합했다. 가치와 가치, 문화와 문화의 충돌만큼이나 밀레니엄 이전과 이후의 시대와 세대의 간극 또한 뚜렷했다. ● 여기서 한국 사회의 독특한 구조와 성격 즉 기존의 모더니즘 담론과 예술현상에 대한 비합리적일 정도의 뿌리 깊은 신뢰가 여전히 가시적인 현상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새롭게 대두된 유목의 미학과 다원, 다문화의 미학, 오브제와 내러티브로 상징되는 사물과 역사성이 창작의 전면에 대두되었고 또 그 과정은 단선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삼중으로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와 미학이 복합적으로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한국의 현대미술 씬(scene)은 서구사회의 그것과는 매우 판이하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 분위기와 미술계 상황은 개인들과 개별적인 창작의 성격에 깊은 영향을 준다. ● 한편 밀레니엄을 그 과정에 겪은 세대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시대의 큰 변화에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태도를 견지해야 했다. 이는 정혜령 세대의 공통된 경험이자 현실이었다. 또한 그에 따라서 자신의 창작의 과제 또한 보다 확고한 입장이 요구되었다. 작가들은 더 이상 타인의 목소리를 빌리지 않고 자신의 소리, 자신의 언어, 자신의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구성하고 표현해야했다. 미술계의 공식적 비공식적 제도와 인프라가 다양해지고 거대해지고 안정적이 되면서 작가들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더더욱 독자적인 자기 세계의 발판을 만들어야하는 내외부의 거대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과거 미술계는 매우 작은 영역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 급격하게 확장되면서 창작, 매개, 평가가 일정한 수준의 조화를 이루었던 분업의 호시절은 종말을 고해간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전과 기획전등 포함해 매년 만 여회를 상회하는 각종 미술행사와 텍스트의 양산은 신예미술가들을 더욱 고립시킨다. 국제화와 인터넷정보사회로의 변화는 정보와 지식, 시각이미지의 과잉이 역설적으로 무지에 대한 감각을 강화시켰고, 정확한 판단력을 구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은 현대미술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삶의 문제는 언제나 예술의 문제와 동반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혜령의 개별적이며 독특한 아이디어와 작업이 어떤 전개양상과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정혜령_기억하다–그_옷걸이를 태운 재, 재에서 나온 금속, 홍송에 조각 채색_122×60×10cm_2009 정혜령_기억하다–바람_꽃다발을 태운 재, 아교, 은행나무에 조각 채색_163×47×3.5cm_2010

'재'의 메타포 ● 정혜령작가는 자신의 세계의 기초를 놓는 과정에 있는 신예미술가이며, 동시에 일정한 단계에 들어선 중견 작가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역사적 견지에서 보편적인, 다시 말해 큰 주제나 시각을 견지하는 태도와 불안과 변동을 보여주는 개별적이며 특수한 취미를 담보하는 것이다. 그녀의 작업의 중심 모티브는 역시 '재(ash)'이다. 그것이 2000년대 중반 그녀의 중심 화두였고 '기억하다' 시리즈에서 잘 나타난다. 폐허에서 수집한 쓸모가 없어진 사물들이 일정한 해석과 변형과정을 통해 정혜령의 오브제로 탈바꿈한다. 거기에서 실재와 현재성이 계속에서 부재와 과거로 밀려나가는 것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최근 제주도의 비양도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에서도 그러한 작가의 태도가 드러난다. 이번 구로아트밸리에 전시되는 오브제 또한 그 친족관계에 놓여있다. ● '재'는 '실존'의 문제선상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메타포이다. 좀 더 세분해 보면 재는 존재의 소멸과 재생에 관련된다. 재는 본래 죽음이며 무의 메타포이다. 생과 관계의 허무함을 재현한다. 삶과 일상은 마지막 숨을 내 쉬고 한줌의 재로 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적이기에 앞서 종교적이며 신비의 체험이다. 재는 생의 각축과 열기가 모두 사라지고 식어버린 후에 도래하는 어떤 균형 잡힌 상태이기도 하다. 에너지의 불균형이 평형을 이룬 상태, 잠잠하게 관조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Ash'는 예술의 두 기둥인 삶과 죽음의 미학을 전개할 때 들리는 최초의 소리이다.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깊은 어둠을 담는 재의 질료적 속성이 그 무엇보다 작업의 중심을 이룬다. 그것은 일시적인 단상이 아닌 순간이며 동시에 영원한 시간과 정신의 두께가 접촉하는 지점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 '재'는 단선적인 방향으로 소멸과 관계의 해체 또는 부재만을 향하지 않는다. 재는 명확한 대상이 아니다. 진행 중인 것이다. 어떤 과정을 상징한다. 하나의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성(變性)과정을 재현한다. ● 재는 모든 물질, 모든 존재가 지닌 내밀하며 견고한 관계가 점차 해체되는 것이다. 존재의 사건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 기억은 와해되고 사라져간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러한 운동에 대한 반작용, 심미적 저항 또한 점증한다. 따라서 시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이미지나 접촉할 수 있는 오브제의 이면이 부상한다. 이렇게 떠오르는 것은 의식적이기 보다는 보다 생득적이고 본질적이다. 정혜령은 그 점을 보다 부각하려 한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것들, 살아가는 것들, 일상을 채우고 있는 운동들이 모두 보편적인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순환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이 오래되고 보편적인 아이디어는 예술의 안과 밖을 채우고 있다. 작가가 재를 중심 모티브로 삼는 이상 그것은 필연적이며 실재적이다. 무(無)의 상징이 동시에 유(有)의 상징인 것이다. 비어있는 것과 채워 있는 것이 이중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통한 무한의 체험, 대립의 일치는 동서(東西)를 떠나 공통된 원형적인 인식이다. ● 이번 전시에 연출된 오브제들과 오브제들의 집합과 배열, 시선과 관계의 운동은 재의 상징과 원형적 인식에서 갈라져 나온 에피소드인 셈이다. 기차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숙명을 지니지 않는가. 또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의미와 논리의 연쇄를 경험하고 학습하는 것이 기차의 메타포와 중첩된다. 폐허에서 수집한 것들, 작은 오브제들의 연쇄. 이것은 재의 메타포의 무게가 지닌 중력을 덜어내는 제스처처럼 보인다. 흔히 말하듯 정혜령의 태도와 접근방식에 유연성이 생겼다고 볼 수 도 있다. 필멸의 운명의 상징인 재의 무거움(?)이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날아오르는 것처럼, 작업의 변화는 마치 한국현대미술계가 확대되고 다원화 되면서 동시에 유연성을 획득하는 것처럼 말이다. ● 예술가 자신에 대한 가장 엄격한 감시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가장 엄중한 언약과 법률은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약속과 비전이다. 매 순간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작가에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관조와 성찰은 반드시 통과해야할 관문이다. 작가 안에서 벌어지는 이런 내적 운동이 작업의 태도, 과정, 결과물에 함축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신예의 과정에서 성숙한 완성의 단계로 넘어가려는 작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자기 스스로를 배치하고 구성하는 단계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기차는 언제나 정거장에 서거나 지나기 마련이다. 작가는 궤도를 벗어날 수도, 정거장을 그냥 지나치기도 어렵다. 일상의 관계를 잠시 풀어놓은 화사한 넥타이들 또한 '재' 위에 걸려 있는 운명일 뿐이다. ■ 김노암

2010년 겨울방학 맞이 구로아트밸리에서 마련한 『시간·공간·기억』展은 젊은 청년작가 3명이 참여를 한다. 이번 시간·공간·기억이라는 전시주제를 다양한 재료의 표현과 자신만의 양식으로 구축해 가는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며, 이를 통해 시민들에게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주제와 소통하고자 기획되었다. 전시는 주제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세가지 존으로 구성 된다. ● 시간이라는 존에 참여하는 최은정은 무수한 겹의 축적으로 인한 시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리고 일상적 시간의 지속을 표현한다. 공간의 존에 참여하는 김시내는 선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작가의 선은 평면 또는 입체 프레임 안에서 역동감을 보여주고, 프레임 밖에서의 연장선상을 생각할 수 있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기억의 존에 참여하는 정혜령의 작업은 일상속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지나가면 잊혀질 듯한 스토리를 화면에 기록을 한다. 오브제로 사용되어지는 재는 그것을 만드는 과정부터 의식이 시작이 되고, 작품의 완성을 통해서 잊혀지는 기억이 아닌 기록되어진 기억으로 결과물은 진행한다. ● 본 전시의 목표는 작가의 시각과 기억으로 이미 제작이 완료된 결과물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와 작가의 기억이 오브제를 통해 구체적 물질로 전환되는 그 과정을 언어화하고 생각해 보고자 함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들의 작품 내용을 공감하고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구로아트밸리 갤러리

Vol.20100116c | 시간·공간·기억-최은정_김시내_정혜령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