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MASTER

박종영展 / PARKJONGYOUNG / 朴鍾盈 / sculpture   2010_0120 ▶ 2010_0128

박종영_Metamorphosis_나무, 인조안구, 구동장치, 푸쉬버튼스위치, 낚시줄_가변크기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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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122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0:00am~05: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KEPCO PLAZA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1층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gallery

박종영의 조각-인형의 이중성, 욕망의 이중성 ● 인간의 관점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은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의 창조의지에 부응하는 인간의 개념이 신인동형설이다. 진작부터 신과 인간 즉 신성과 인성은 서로 닮았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한갓 질료일 수가 없다. 인간의 몸은 그 속에 신이 거하는 성소(교회)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신을 닮고 싶은 욕망이 내재돼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의 정점에 창조가 있다. 신의 피조물이 인간이라면, 인간의 피조물은? 어쩌면 미술사 속에서 가장 많이 재현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는 인간은 단순한 소재와 재현의 경계를 넘어, 인간이 창조한, 인간의 피조물들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박물관에 가면 이러한 인간의 피조물들을 만날 수가 있다. ● 그것들은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과 똑같지는 않은, 인간의 피조물이며, 대리물들이다. 신인동형설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신과 같을 수가 없듯, 인간과는 다른 부류의 종족들이다. 그리고 인간이 신을 닮고 싶은 만큼 그 종족들 역시 인간을 닮고 싶다. 인간의 창조와 신의 창조가 다른 것은 인간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가장 결정적이다 싶은, 혼(생명)을 불어넣을 수가 없다. 피와 살이 감촉될 것 같은 생생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왠지 무표정한 것 같고, 중성적인 것 같고, 말을 잃은 듯 침묵 속에 잠겨있는 이 피조물들의 혼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혹, 자신에게 필요한 혼을 스스로 일궈내고 생성시킨다고 볼 수는 없을까. 그리고 둔감한 감수성 탓에 정작 인간이 그 혼의 실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볼 수는 없을까. 그렇게 인간의 피조물들이 스스로 일궈낸 혼에는 선령이 깃들 수도 있고, 악령이 깃들 수도 있다. 낯익은 감정이 거할 수도 있고, 낯선 감정이 자리할 수도 있다.

박종영_Eve_나무, 인조안구, 구동장치, 동작감지센서, 낚시줄_60×30×30cm_2009

유리관 속 철봉 위에 자리한 채 시간을 잊은 고대 석상, 손때 묻은 봉제인형, 연결된 줄로 움직이는 목각인형, 주술을 부리는 짚 인형, 부분적으로 페인트칠이 벗겨져 나간 마네킹, 차량이 충돌할 때의 충격으로 앞으로 목을 푹 꺾는 더미, 고무로 만든 팔등신의 몸매와 금발의 바비인형, 입술에 칠해진 루즈가 뭉개진 섹스풍선인형,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차갑고 정교한 섹스머신, 사이보그, 로봇, 원하는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는 아바타, 눈이 없는 가면, 인공안구, 인공심장, 인공관절, 각종 유전자 복제 장기들, 실리콘 가슴, 내장된 동력으로 움직이는 자위기구들이 모두 이 낯익고 낯 설은, 친근하면서 생경한 종족들이다. 인간을 닮았으면서 닮지 않은, 인간과 같으면서 다른, 인간의 욕망에 복무하면서 그 욕망을 배반하는, 자기를 드러내면서 숨기는, 그렇게 숨기면서 자기소외를 키우는 부류들이다. 그것들은 무표정과 침묵으로 말을 하는데, 이로써 자신의 신인 인간에 대해 말하면서, 때로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박종영_Marionette 1-2_나무, 인조안구, 구동장치, 낚시줄, 푸쉬버튼스위치_가변크기_2010

박종영의 작업은 일단 목조각으로 분류된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요즘 젊은 조각가들 중 직조를 접하기 어려운 현실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자체만으로 신선해 보인다. 좀 유별나다 싶지만, 현재 극사실주의와 팝코드의 경향이 지배적인 트렌드로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작업 역시 일면적으론 그 트렌드에 부응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작업은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목조각이나 직조의 경향성과는 사뭇 다른데, 인형이 그렇게 다른 인상의 원인이다. 인체를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선 정통적인 형상조각과 일맥상통하지만, 작가가 재현해보인 인체는 인간보다는 인형에 가깝고, 자연인보다는 마네킹에 가깝다.

박종영_Marionette Ⅵ_나무, 인조안구, 구동장치, 푸쉬버튼스위치, 낚시줄_가변크기_2008

일종의 인간의 대리물에 해당하는 이 인형들은 인간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인간의 이상(이를테면 날개로 표상된)에 대해 말하면서, 억압되고 좌절된 욕망과, 때론 성적 판타지에 연루된 금기와 터부와 죄의식(가면 같은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춰진)에 대해서 말한다. 인간의 논리로 생각하는가 하면(사실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동시에 사물의 생리(페티쉬 즉 인간의 욕망에 복무하는 물건으로 나타난), 기계의 생리(반복재생동작으로 나타난, 입력된 정보대로, 그 정보의 질량만큼 반응하는 인형은 일종의 기계장치다), 가면의 생리(얼굴이 곧 가면인, 웃음마저 무표정한)를 드러낸다. 무표정할 때 인형은 더 인형다운데, 심지어 인공안구마저 없는, 무표정한 가면 뒤쪽에 심연을 숨기고 있는 검게 뚫린 구멍에서 인형의 인형다움은 극대화되고 완성된다. 인형은 얼굴이 없는 만큼 표정도 없다. 그들은 가면으로, 무표정으로, 침묵으로, 의식 저편의 무의식으로,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언어의 질료로 말을 한다.

박종영_Marionette Ⅶ-1_나무, 인조안구, 구동장치, 푸쉬버튼스위치, 낚시줄_가변크기_2009

박종영은 인형 중에서도 특히 구체관절인형을 만들고, 마리오네트를 만든다. 사실은 이 두 인형이 하나로 합체된 경우로 보인다. 엄밀하게 구체관절인형은 구체(원형)가 관절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작가의 작업에서는 그 변형된 형태가 관절을 위한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런 관절의 도움으로 인형은 손과 발, 손목과 발목, 그리고 무릎과 목을 움직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구체관절인형은 초현실주의자 한스 벨머에 의해 성적 판타지와 결합된 바 있다. 초현실주의자에게 성적 메타포는 초현실적 비전을 여는 중요한 계기로 여겨졌으며, 더욱이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그 크기나 형태가 영락없는 사람의 실제를 빼닮았을 때 일정정도의 성적 암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작가가 이 인형을 만들면서 성적 암시를 생각했는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그 이면에 무의식적 욕망이 녹아들어있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혹, 그 욕망이야말로 인형이 스스로 일궈낸 혼이며 생명이지 않을까(인간은 결코 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가 없다).

박종영_Marionette project Ⅱ_홍송,구동장치,동작감지센서,낚시줄_30×28×45cm_2008

그리고 마리오네트는 신체의 부분 부분에 매달려있는 가녀린 줄로 움직이는 줄 인형이다. 주지하다시피 줄 인형은 인형극의 대표적인 아이템이다. 인형극의 원래 목적은 순수한 유희에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과 사회, 인간과 제도와의 관계에 연동된, 그리고 나아가 인간과 신, 의식과 무의식과 같은 상대적으로 더 존재론적인 조건에 연동된 유비를 숨기고 있다. 즉 관객은 보통 움직이는 인형을 보지만(인식하지만), 정작 그 인형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보지 못한다(인식하지 못한다). 혹, 인형과 함께 그 인형을 움직이는 줄을 볼 때도 있지만, 그 줄은 결코 주목받지 못한다. 관객들은 작동되는 현상(현실)을 보지, 그 현상(현실)을 작동시키는 시스템(체계)을 보지 못한다. 여기서 공연되고 있는 인형극이 감각적 현실과 의식의 층위에 속한다면, 그 인형들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는 제도와 무의식과 신의 영역에 속한다. 이처럼 현실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며, 의식은 사실은 무의식의 층위로부터 밀어 올려진 것이며, 나의 의지의 배경에는 신의 계획이 작용하고 있다.

박종영_Marionette project Ⅲ_홍송, 구동장치, 동작감지센서, 낚시줄_110×100×50cm_2010

작가의 작업에서 관객들은 인형과 함께 세팅된 스위치를 조작해 그 인형들을 직접 움직일 수 있지만, 그럼으로써 그 인형들에 관한한 마치 신과도 같은 전지전능한 권력을 체험할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마치 인형극에 초대된 관객들이 그런 것처럼 정작 인형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식을 간섭하는 무의식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현실을 가동하는 제도와 시스템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현실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나의 의지가 담겨진 신의 밑그림을 보지 못한다.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적어도 이러한 사실을 주지시킨다. ● 박종영의 인형들은 사람으로 치자면 선남선녀들이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인형들은 사람의 가장 좋은 시절을 흉내 내고, 그 순간의 모습 그대로 평생을 산다. 혹, 그 이면에 젊음의 순간, 청춘의 찰나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투사되어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불가능한 욕망, 왜곡된 욕망 탓에 인형들은 심지어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기조차 한다. 사실 그로테스크하다는 것은 인형의 본질이며 본성이다. 인간을 닮았지만, 그 무표정한 가면 뒤에 인간의 억압된 욕망, 왜곡된 욕망, 좌절된 욕망, 불가능한 욕망, 실패가 예정된 욕망이 그림자처럼 포개져 있기 때문이다. 인형은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표정하고 우울하고 낯설다. ■ 고충환

Vol.20100119e | 박종영展 / PARKJONGYOUNG / 朴鍾盈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