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호展 / LEEJUNHO / 李俊昊 / painting   2010_0120 ▶ 2010_0131

이준호_달을삼킨 호수_캔버스에 스크래치_180×180cm_2009

초대일시_2010_01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영아트갤러리_YOUNGART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2,3층 Tel. +82.2.733.3410 www.youngartgallery.co.kr

칼끝 - 풍경 ● 하얀 화폭 앞에 선다. -태고의 지층을 쌓듯 캔버스에 검정색, 붉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이 칠해지고 덮여지면서 이루어진 밑 작업이 끝난 공간. 화면은 날카로운 칼날 끝을 사용하여 생각이 이끄는 대로 긁기의 시작점을 정하지 않은 채 여기 저기 빈 공간은 드로잉으로 형상화된다. 긁혀진 선들은 태고의 신비를 벗고 작업 초반의 엉성한 형태에서 점차로 산의 형태와 호수, 폭포, 계곡의 윤곽으로 뚜렷해진다. 땅 속에 묻힌 유물을 발견하고 아주 조심스레 흙을 걷어내는 작업과 같다. 칼날 끝은 풍경의 윤곽이 드러남에 따라 닳고 무뎌진다. 뭉뚝해진 커터 칼날의 끝자락을 잘라내면 다시금 날카롭게 날이 선 칼날의 반복적 행위로 관념 속 풍경은 서서히 구체적 형상으로 드러난다. 칼날로 긁혀진 공간은 전통 산수의 구도에서 벗어나 사각의 틀 안 화면을 꽉 채운 네모의 산수로 탈바꿈 되며, 긁혀져 만들어진 공간 안의 풍경과 그렇지 않은 여백은 분명한 경계를 이루어낸다. 화면을 긁어내어 덮여진 색이 떨어져 나간 흰 공간과 사이사이 촘촘히 남겨진 선들은 내 사유의 공간 안에서 한 폭의 산수경으로 완성된다. 화폭을 가까이 대하면 긴 선들과 짧은 선들은 서로 얽혀 조형요소로서 단순한 선의 형태로 비춰지나, 조금 떨어져 전체 화면을 대하면 구체적 형상(산, 바위, 물 등)으로 거대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긴 선들은 첩첩이 쌓여 능선을 만들고 계곡을 만든다. 짧은 선 가닥들은 겹쳐지고 교차하며 숲을 만들어 간다. 바위산들이 우뚝 솟고 비스듬히 기울기도 한다. 서로 부딪혀 떨어져 나간 파편들은 협곡을 만들고,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도 한다. 기괴한 바위와 산, 폭포, 호수는 현실의 풍경이면서 관념의 풍경일 수도 있다.

이준호_산수경_캔버스에 스크래치_91×72.7cm_2009
이준호_산수경_캔버스에 스크래치_33×45.5cm_2009
이준호_산수경_캔버스에 스크래치_45.5×33cm_2009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괴한 산과 바위를 그려내고,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고 좌에서 우로의 이야기 전개 방식을 쓰며,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화면 중앙에 큰 협곡의 물줄기와 몽유도원을 바라보는 눈높이의 차이를 둠」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탄생시켰다. 관념으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작가의 직관이 뛰어났던 것이 아니었을까? 내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기법이나 재료, 시대는 다르지만 빈 화면을 바라보며 직관에 의해 관념의 산수풍경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감히 안견의 그것에 비할 수 있다.

이준호_심산유곡_캔버스에 스크래치_180×180cm_2009
이준호_항구도시_캔버스에 스크래치_110×110cm_2008

산은 광야처럼 넓고 밀림과도 같아 그 숲의 길이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펼쳐진다. 그곳엔 달이 있고 풍경이 있다. 달은 호수를 비추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는 달을 삼켜버린다. 높은 하늘엔 여객기 하나 목적지를 향해 날아간다. 우스꽝스러운 호랑이가 그것을 바라본다. 깊은 산 아래 항구 도시가 있고 숲엔 옛날 옛적의 호랑이가 있다. 현대 사회의 중심은 아이러니다. 상황이 다른 두 공간을 현대와 전통으로 묶어 형상화 하고 싶었다. 방법은 화면을 전개하는 이야기의 골자를 해학과 픽션으로 채워보고 싶었다. 전통의 시계와 현대의 시계를 한 곳에 집중시켜 묶으려 했다.

이준호_바라보다_캔버스에 스크래치_91×72.7cm_2009

사각의 공간에서 날카로운 칼끝은 또 다시 태고의 지층을 발굴한다. 지금 여기 태고의 지층만 존재할 뿐 나와 화면을 대하는 장소는 시간이 정지된 채 현실과 사유의 경계 사이에 있다. 엄지와 검지로 칼집을 거머쥔 상태에서 힘의 완급을 조절하며 화면을 긁어내고 칼집을 받친 중지는 긁어내는 반복의 노동으로 굳은살이 쌓여 손마디의 미세한 감각은 어느새 무뎌져 있다. 거대한 산의 기운을 휘감고 어머니 품처럼 들어앉은 마을 시미리! 관념의 세계에 빠져 설화를 만들어 낼 즈음, 작업실 바깥 풍경은 시나브로 밤으로 향하며 침묵의 세계로 접어든다. 육안으로 뚜렷이 식별되던 모든 사물들은 어둠 속에서 달빛에 의지해 자신들의 존재를 희미하게 드러낸다. 주변은 적막하고 고요하다. 이제 나는 잠든 생명의 숲이 깨어날 시간을 기다리며 칼끝 풍경에 서 있다. ■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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