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NEVER LAND 분열된 자아들의 변용성(變容性)

오원영展 / OHWONYOUNG / 吳元榮 / sculpture   2010_0120 ▶ 2010_0201

오원영_The first travel_혼합재료_155×600×155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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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영 블로그_blog.naver.com/owy99

초대일시_2010_01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0:00am~06:00pm

덕원갤러리_DUKW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82.2.723.7771~2 www.dukwongallery.co.kr

자아와 타아(他我)의 경계에서오원영 근작 조각전 1. 최근 신세대 작가들의 작업경향의 하나는 작가 자신을 대리하는 상징물을 대거 등장시킨다는 데 있다. 이 추세는 그 매개물로서, 성장한 인간이 아닌 타자적 존재들, 이를테면 미숙한 것들이나 동물적인 것, 영상물에 등장하는 대중 이미지를 복제하고 변조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소비 사회의 정신적 가치들이 물화되고 사회적 환경이 물질화되면서 토해내는 부산물들에 주목한다. 이것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우리 시대의 자아가 끊임없이 '타자화되면서'(becoming other), '타아화(他我化)를 겪는'(going other‐ego) 이면을 다루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나'(ego)란 뭐냐 라는 물음이 동반된다. 신세대이기에, 새로운 시대의 환경과 대결하고 자신을 지탱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재정의 하는 게 당면과제일 것이다. 조각가 오원영 역시 자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킨다. 동세대 의식의 지평에 서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적 부산물을 빌려 '나'란 무엇인가에 주목한다. 그가 등장시키고 있는 소재들은 주로 어린이와 동물들이다. 동물로는 호랑이⋅곰⋅늑대⋅흑표범이 주를 이룬다. 이것들은 모두 어린이용 동물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지만, 작가가 살고 있는 어린이 대공원에서 늘 보았던 품목들이기도 하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건 호랑이다. 황호와 백호를 폴리에스터 레진과 우레탄으로 치밀정교하게 떠서, 아크릴릭으로 채색해 여실한 야성의 외관을 부각시킨다. 이것들을 극사실적으로 전신을 모델링한 어린이의 겉 몸에 입혀 동물과 어린이를 중첩시킨다. 그래서 보기에 작품의 모팁이 어린이인지 동물인지가 분명치 않다. 주요 작품인 「The First Travel」은 집 없는 앳된 아이들이 하얀 털의 백호와 칠흑같이 검은 빛깔의 늑대 털옷을 입고 옛 마차의 상석에 앉아 5마리의 흑표범들을 몰고 달리는 장면이 이채롭고 드라마틱하다. 아이들의 미발육 상태의 순결함과 맹수들의 포악한 본성을 동열에 세워 금기(禁忌, taboo)를 위반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복합적인 환유(換喩, metonymy)를 유발함으로써, 해학과 언캐니(uncanny)를 동시에 야기한다. 「Mimicry」는 같은 기법으로, 호랑이와 늑대의 피복과 머리를 얼굴에 쓰고 원형무대에 앉아 있는 5명의 무심한 어린이를 등장시킨다. 「Black Child」는 검은 맹수의 모습을 하고 보는 이를 향해 서있는 어린이를 묘사한다. 「Homage」는 박제된 동물들의 부리와 안면, 나아가서는 뼈가 앙상한 전신을 캐스팅하고 골드와 실버의 알루미늄호일로 표피를 만들어 벽에 부착하거나 플로어에 세워 토템의 물신(物神, fetish)을 느끼게 한다. 어린이의 얼굴과 손발, 이목구비, 몸체와 몸짓은 모두 유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작가는 이들을 묘사하면서 니체의 언급을 빌려 '아이는 순결이요 망각이며, 새 출발이며, 유희이며,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의 최초의 운동이자 신선한 긍정'임을 강조한다. 뿐 아니라, 동물들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 들었던 동화에 나오는 맹수들은 친숙한 것들이요, 때론 친밀한 동반자이기도 하고 무서운 존재로 다가오기도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맹수의 가면을 씌워 이들의 모습을 낯설게 하고 맹수들과 공존케 한 건 "어쩌면 작가 자신의 가장 은밀한 내면의 모습이거나, 아니면,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억압된 욕망이 투사된 작가의 분신적 존재들"(오원영, 2010)임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일 게 틀림없다.

오원영_The first travel_혼합재료_155×600×155cm_2010
오원영_Mimicry series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0
오원영_Mimicry_혼합재료_110×50×40cm_2010

2. 근작들에서 작가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건 자아란 결코 단일한 불변적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의 자아란 유년기의 자아들이 혼성된 복수의 것이라는 말이다. '자아'(ego)란 다수의 타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자아에는 한 개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다수를 감싸는 '경계'(境界, boundary)가 있을 뿐 이라는 말이다. 이 가운데서, 그가 이번에 테제로 다루고 있는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의식 가운데 내재해 있지만, 지금은 그 저변에 가라앉아서 정체가 묘연한, 티 없이 자라던 자신의 유아 시절의 주체라면, 다른 하나는 전설과 우화를 듣던 아동기의 주체다. 일괄해서 유년 시절의 주체들이다. 유년 시절의 주체들을 근자의 그의 작업에서 테마로 등장시킨 건 소비사회의 물화된 의식(reified consciousness)이 '분열적으로'(schizophrenically) 증식하면서 그 전망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데 대한 '시발행동체제'(habitus)로서(브르디외)다. 나이 들어 심신양면에 걸쳐, 성장이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혼미가 지배할 경우엔, 또다시 유년 시절의 원초적 '커택시스'(cathexis)가 의식의 표면을 뚫고 이와 유사한 사물들을 응시하는 동기를 유발하는 경우(라캉)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이들처럼,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분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에서 나의 자아는 유희한다. 맹수들은 아이들의 친밀한 동반자이자 그들을 위협하는 두렵고 무서운 존재다. 어린이와 맹수라는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양상이 바로 인간의 타고난 모습이 아닐까? 그건 내 안에 존재하는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드러나는 게 아닐까? 이게 바로 오늘의 나의 진솔한 모습이 아닐까? 자아란 그래서 주어진 것이기 보다는 찾아야 되고, 변형되고, 왜곡을 거듭하는(프로이드) 다양체의 모습일 것이다. 결코 하나의 순정한 단일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기억과 환상이 뒤섞여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오원영, 2010)

오원영_Mimicry_혼합재료_75×55×45cm_2010
오원영_The passage_혼합재료_80×70×25cm_2010 오원영_Lost children_혼합재료_55×20×20cm_2010
오원영_black child_알루미늄 호일_220×100×700cm_2010 오원영_Homage_알루미늄 호일_가변크기_2009

작가는 무의식의 배후로부터 자신을 응시함으로써, 발굴해낼 수 있는 타아적 존재들에 주목한다. 어린이와 맹수들은 이렇게 해서 찾아낸 자신의 '분신들'(avatars)이다. 원초의 것들을 작업의 모티프로 한 게 여기서 연유했다. 그러기에 그의 근작들은 단순히 맹수와 어린이를 등장시켜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지구촌에 미래에 건립할 이상향이나 복락원을 꿈꾸려는 건 결코 아니다. 그가 근대의 '사유의 주체'(subjectum cogitabilis)를 등장시킨 대신, 어린이와 맹수를 각각 부각시켜 상호 모순적 이면서도 일견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는 '욕망의 주체'(subjectum cupidus)의 편린들을 다룬 건 그 어떠한 유토피아적 완상(玩賞)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인성이나 야성, 순결함이나 포악함 같은 모순대립적인 건 물론, '어린이의 원초적 망각'(니체)과 친밀한 동반자인 맹수가 갖는 포악성을 병존시킨 건 전적으로 인간 자아의 양가적인 면을 클로즈업시키려는 데서였다.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자아의 이면에 존재하는 '양가적 타아'(ambivalent other‐ego)를 스스로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자아가 타아들의 경계에서 불확정적으로 부동한다는 걸 보이기 위함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우리시대의 현실이 다양체(manifold)로 분열함으로써 야기하는 다가성(多價性, multi‐valence)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해석에서, 궁극적으로 질문해야 할 건 이것이다. 이와 같이, 분열적으로 존재하는 자아 속의 타아들과 현실 속의 타자들을 공개함으로써, 진정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다. 그건 현존하는 작가 자신의 자아, 사회 그리고 현실이 '분열증'(schizo‐phrenia)을 야기하고 이를 공유함으로써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인간상과 사회상을 공격하고 비판한다는 거다. 아니 그럼으로써 병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해체하려는 것이다. 다양한 이상증식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형상화하고 풍자(諷刺)하는 방법과 도구로서 조각언어보다 더 강열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회가 오늘처럼 물질사회화와 소비사회화를 치다를 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시대의 '분열하고 있는 물화의식'(schizoid consciousness of reification)과 대결하는 것(골드만)이다. 어린이와 맹수는 물화된 사회와 욕망하는 인간들의 짝패이자 알레고리의 파트너들이다. 작가는 이것들을 상징물로 등장시켜 분열증을 진단하고 인간의 현실적 병폐를 우회적으로 공격한다. 원초적 욕망의 대리물인 어린이와 맹수들을 등장시켜, 이들에게 알레고리의 기능을 허용함으로써, 현대인의 야성(野性, brutalism)을 폭로하고 그들의 위선적인 욕망을 비판한다. 이야 말로 오늘의 작가가 짊어져야 할 책무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우리가 '욕망하는 인간'(homo cupiens)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어렸을 적 자아에 내재해 있는 순정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걸 힘주어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분열을 조장하고 완상(玩賞)하는 게 아니라, 검열하고 처방하는 일이야 말로 작가의 진정한 뜻이라는 걸 그의 근작들은 함의한다. ■ 김복영

Vol.20100124b | 오원영展 / OHWONYOUNG / 吳元榮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