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연展 / YANGYOOYUN / 楊裕然 / painting   2010_0129 ▶︎ 2010_0209

양유연_그 때의 잔상_장지에 채색_112×145.5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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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129_금요일_07:00pm

관람시간 / 12pm~08:00pm

꽃+인큐베이터_Ccot + Incubator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번지 B1 Tel. +82.2.6414.8840

상처와 가면의 일대기가면과 분비의 시간, 껍데기에 무릎 꿇린 주체 양유연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내 그림의 인물들에는 알맹이가 없다. 수동적인 껍데기에 불과하다. 누구나 스스로를 위해 악착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타자화된 주체일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얼굴이나 정체를 감추는 데 썼던 껍데기, 가면의 용도가 과잉되면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분신, 페르소나(Persona)로 재탄생한다. 페르소나는 이제 나를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나와 대등한 존재이자, 압도하는 존재로서 힘을 갖기 시작한다.

양유연_헤드라이트_장지에 채색_53×45.5cm_2009
양유연_아무 이유도 없이_장지에 채색_130.3×97cm_2009

가면은 「바람이 불어서」라는 작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돌이킬 수 없는」에서 페르소나로의 본격적인 분화를 시작한다. 그림 속 머리들은 거의 사념체(思念體)에 가까운데, 화면 속에 등장하는 감정의 분비물인 파란 눈물이나 텅 빈 눈에서 발사하는 헤드라이트로 공간, 내면의 풍경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작가의 초기작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머리를 풀어헤친 소녀들이야말로 '나'의 원관념에 다름 아니다. 작품이 거듭될수록 소녀들은 점점 작고, 무력해진다. 심지어 그들은 가면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구호 요청을 하고, 죽거나 죽은 척 해버린다. 페르소나는 마치 에일리언이나 초사이언처럼 진화를 거듭한다. 그리고 이들이 마침내 이르는 곳은 '주체의 자리'다. 처음에는 바느질 자국이 선명한 평범한 가면이었다가 '나'의 숭배를 받는 페르소나가 되고, 급기야는 '나'를 가두고 대체해 또 다른 내가 되버린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 껍데기에 갇힌 채 식물인간이 된 '나'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작품 「그때의 잔상」은 잔혹한 후일담이다. '나'는 여전히 죽거나 죽은 척하고 있고, 이제는 가면이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아직은 미봉된 틈새가 남아있지만, 과연 '나'는 내가 완전히 닫히기 전에 일어날 수 있을까.

양유연_숨바꼭질_장지에 채색_45.5×53cm_2010
양유연_잉여공간_장지에 채색_97×130.3cm_2010
양유연_우리 집_장지에 채색_72.7×91cm_2010

분열과 상처, 그리고 치유에 대한 조소 ● 작가는 누누이 이 같은 분열적 인식을 '상처'로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그 원인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단지 누군가 내 심장에 구멍을 뚫어 놓은 탓이거나, 아니면 스스로 쥐어뜯은 건지도 몰랐다. '흉' 전시가 새로운 전기(轉機)로 읽히는 것은 이 작품들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작가가 상처의 뿌리를 들추는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작가의 반추가 환상 공간이 점유한 소녀시대에서 사회적 메카니즘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청년기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양유연_귀가_장지에 채색_91×72.7cm_2010

특히 이전보다 구체화된 현실 공간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적인 사건들과 연관된다. 작품 「귀가」의 젊은 남자는 소녀라는 작가의 자화상에서 벗어난 객관화된 인간 군상이다. 마치 사진기 앞에 선 것처럼 화면 밖을 응시하는 남자의 얼굴은 야누스적이다. 반쪽의 얼굴은 경계와 질타의 시선을, 반쪽의 얼굴은 눈물의 호소를 보낸다. 이 두 개의 이질적인 얼굴과 감정은 상처의 균열을 닮았다. 나뭇잎도 다 떨어진 겨울, 얇은 점퍼로 달이 가까운 동네를 오가야만하는 청년이 남모르게 받았을 그런 상처를. 폭격을 맞은 듯 구멍난 건물 지붕에 걸터앉은 소년의 표정도 다를 바 없으리라. 「우리 집」은 어쩌면 붉은 점퍼 청년이 회상한 과거의 기억은 아닐까. 소외된 공간보다 무서운 것은 소외된 관계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 「잉여공간」의 배경이 「우리 집」 속 구멍난 건물에서 엿보이는 어두컴컴한 안쪽 상황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같은 공간에 여러 인물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한 채 무심히 서로를 등지고 있다. 죽은 자의 그것처럼 파리하고 무표정한 얼굴들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 조화되지 못하고 팽팽한 긴장을 이루는데, 그 긴장이 바로 공간의 균열을 야기하는 것이다. 작가의 인식은 결국 현실 공간은 외압적이건, 내발적이건 주체에 상처를 입힌다는 데 도달하고 있다. 어쩌면 그림 속 인물들은 주체를 완전히 찬탈하는 데 성공한 가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걸까? 작가는 'Humble Heart'전의 첫 번째 작품을 통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양유연의 그림 중 처음으로 등장한 밝고 완만한 피안의 풍경은 타들어가는 종이처럼 사그라든다. 텅 빈 가슴으로나마 그려보던 평온한 풍경마저 핏물이 배어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은 거의 치유에 대한 조소에 가깝다. 기억은 신이 주신 선물이자 형벌이다. 한번 겪은 상처는 뚜껑이 열린 판도라의 상자처럼 되담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 때문에 살아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기억해야하는 것들로 인해 상처는 끊임없이 덧날뿐이다. ■ 도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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