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또 하나의 공간-'심상(心相)'의 공간

박서령展 / PARKSEORYONG / 朴曙伶 / painting   2010_0414 ▶ 2010_0427 / 월요일 휴관

박서령_공간, 또 하나의 공간_한지에 수묵_70×225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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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41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_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공간, 또 하나의 공간은 또 하나의 세계다. 또 하나의 삶이다. 차이, 다름이 아니라 가치가 같은 또 하나의 공간이다. 공간, 또 하나의 공간은 선(線)의 리듬으로 백(白)의 바탕으로 하늘(天) · 자연(自然) · 마음(心) 공간으로 드러난다. 공간, 또 하나의 공간에서 삶의 이야기는 '아리, 아리랑'을 엮는다. 오고가는 여운의 '아리, 아리안'에서 너와 나, 우리, 섬김, 그리움, 염원, 삶의 빛으로 공간, 또 하나의 공간은 산수향(山水鄕)이 된다. ■ 박서령

박서령_공간, 또 하나의 공간 - 섬김_한지에 수묵_128×162cm_2010
박서령_공간, 또 하나의 공간 - 우리_한지에 수묵_130×162cm_2010
박서령_공간, 또 하나의 공간 - 그리움_한지에 수묵_142×110cm_2010

박서령의 '심상(心相)의 공간'에 대한 단상 ● 1. 간솔한 질박한 맛에서 농익은 화려함을 끌어내고, 담박함 속에 지극한 맛을 담아낸다.(發纖禾農於簡古, 寄至味於淡泊) 이 말은 시(詩)는 평이함과 담박함을 중시한다는 사유를 강조한, 서예에서 작가가 법을 숭상하는 상법(尙法) 서풍에서 벗어나 작가의 뜻을 담아내라는 상의(尙意) 서풍을 주도하고 아울러 사인화(士人畵)가 무엇인지를 말해 후대 문인화(文人畵)의 사상적 뿌리를 확립한 북송대 소식(蘇軾)의 말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간솔한 질박함과 농익은 화려함은 대립적인 예술풍격에 속한다. 하지만 동양의 음양론(陰陽論)에서 양속에 음이 있고, 음속에 양이 있듯이 소식은 이 두가지 대립되는 예술풍격을 절묘하게 서로 어울려 상승되는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 말은 회화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고요하기 때문에 뭇 움직임이 명료하고,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작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靜故了群動, 空故納萬境) 이 말은 정(靜)과 공(空)에 도리어 우주의 무한한 영기가 충만해 있다는, 동과 정의 관계 및 공과 경의 관계에 독특한 인식을 보여주는 역시 소식의 말이다. 중국 회화의 특징 중의 하나인 유무상생(有無相生), 허실상생(虛實相生)의 묘한 경지를 보여주는 무화처(無畵處)로 보이는 여백은 이처럼 우주의 영기가 충만한 공간이기도 하다. 동양화는 한 폭의 작품에 천지의 마음을 담고자 하는데, 화려하고 현란하면서도 욕망에 들끓는 젊음의 경지인 약경(若境)의 미학보다는 담담하고 무미한 듯 하면서도 맑은 심성의 늙음의 경지인 노경(老境)의 미학을 담아내야 한다는 소식의 일갈(一喝)이다. 기존의 작품 창작 경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자신의 철학을 담고자 한 공간, 에너지가 충만한 공간,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소요유(逍遙遊)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마음 경지를 하나의 대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심상(心象)의 공간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심상(心相)의 공간을 화두로 한 박서령의 작품을 보고 떠 오른 단상이다. 작가는 이제 심상(心相)의 공간을 통해 자신을 태어나게 한 삶의 뿌리가 되는 시원과의 소통을 꾀하고자 한다.

박서령_공간, 또 하나의 공간 - 너와 나_한지에 수묵_130×162cm_2010
박서령_공간, 또 하나의 공간2_한지에 수묵_45×53cm_2010

2. 작가는 한국적 심성의 근간을 이루는 백 혹은 담이 갖는 의미와 그것을 표현하는 조형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그것을 일상적 삶속에서 흔히 접하는 산수, 특히 산에 접목하고자 한다. 산과 하늘이 연결되고 산에 빛이 투영되어 분리된 공간을 일체의 공간으로 통합시킨다. 그 산은 하늘과 교통하는 산이다. 작가는 그런 산을 통해 시원에의 그리움을 담은 심상적 공간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작가가 과거에 시도한 작품을 보았을 때 느낀 점은 일단 매우 농밀(濃密) 혹은 농후(濃厚)하다는 것이었다. 어디가 산이고 하늘인지 경계가 모호하여 때론 몽롱(朦朧)한 느낌마저 주는 산수, 간혹 청묵(淸墨)을 사용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흑과 백의 뚜렷한 대비를 통하여 산과 나무를 아주 농밀하고 농후하게 그리되 동일한 형태를 거의 반복적으로 행하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즉 그동안 불혹(不惑)의 나이에 이를 때까지 삶에서 버릴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 버릴 것을 작가는 역설적이게도 농밀한 채움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마치 구도(求道)하는 마음으로 삼천배를 하듯, 동일한 대상을 무수한 반복을 통해 그려내고자 하였다. 그것은 때론 표현된 사물간의 경계의 모호함이나 그려진 산 외곽의 자연스런 번짐 등을 통한 몽환적인 산수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려진 대상 하나하나는 미적 이미지를 담고 있는 조형물이지만 아울러 자신의 몸짓이면서 언어였다.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투영하고 있는 심상적 자연이었다. 작가는 공간을 크게 2단으로 나누어 상단은 농묵으로 하단은 담묵으로 처리하여 역(易)의 음양이 상징하는 밤과 낮의 원리를 담아내고자 하였다. 하늘과 산을 표현할 때는 하늘은 주로 검은 먹으로 처리하여 산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한 시각적 효과를 노리면서도 아울러 천현(天玄)의 의미를 담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려진 대상은 레고(Lego)식의 단순한 조합과 쌓임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물망처럼 얽어진 채움을 통해 우주와의 소통을 꾀하고자 하는 결과물이었다. 작가는 역설적이게도 농밀함 속에 평담무미(平淡無味)한 맛을 담아내고자 하였고 아울러 '채움을 통한 비움'을 시도했던 것이다. 농후함 속에 담백함을 지향하고자 하였다. 이에 밀(密)하지만 소(疏)를 절묘하게 조화하여 기(氣)의 소통을 적절하게 꾀하고 있다. 채움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추스린 작가는 이제 그 '채움'을 보다 적극적으로 '비우는 과정'을 통해 허심의 공간, 기로 충만한 공간을 통해 나의 사고가 투영될 수 있는 공간을 꿈꾸게 된다.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시원(始原)에 대한 그리움과 소통을 실현하고자 하는 공간을 설정하게 된다. 이런 사의(寫意)의 공간, 심상의 공간은 아직은 삶의 흔적이 뚜렷하게 각인되지 않은 공간, 무엇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기가 응축된 혼돈의 공간, 무한한 움직임을 예비하고 있는 생성과 변화의 공간이면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소요적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통해 작가는 시원과의 소통을 꾀하고자 하며, 그것을 빛을 통해 때론 우주목(宇宙木:cosmic tree)을 통해 담아내고자 한다. 작가는 빛은 하루의 시작이고 생활의 활력이면서 오래된 공간에서 현재와 소통이 가능하게 하는 내면의 밝음이라고 규정한다. 그 산수의 표현된 거대한 에너지와 빛에 몸을 맡기면 절로 천현(天玄)에 도달할 것 같다. 명대 이사달(李士達)은 산수에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창(蒼), 일(逸), 기(奇), 원(圓), 운(韻)이 그것이다. 창은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빛깔과 느낌을 상징하는 것으로, 문인화의 중요한 심미표준의 하나다. 색으로 보면 청색 때로는 회백색의 맛이 그것인데, 작가는 청묵을 사용하여 창(蒼)하면서도 윤기(潤氣)가 있는 맛을 살짝 내고 있다. 때론 농한 맛을 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담을 표현하고자 한 산수의 조형은 하늘의 거대한 에너지가 불꽃놀이 하듯, 또는 하나의 거대한 섬광이 터진 것 같아 황홀경에 빠져 들어가게 한다. 아울러 흑과 백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음양의 명암을 뚜렷하게 부각시키면서 한줄기 굵은 빛을 통해 천지와의 소통을 꾀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측면이 꿈틀꿈틀 용트림 하는 듯한 산세의 형태적 측면과 어우러지면서 기이(奇異)하면서도 방일(放逸)한 맛을 담아내고 있다. 간일(簡逸)한 맛도 있다. 전체적으로 심상적 공간에서 표현된 산수에 기운(氣韻)이 생동하며 기취(奇趣)와 신운(神韻)이 감돈다.

박서령_하나의 공간_한지에 수묵_34×47cm_2010

3. 집단과 함께 하지만 끼리끼리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집단들이 지향하는 것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한 작가는 외롭다. 그려진 인물은 흔히 전통 문인화에서 보듯 소요하는 은자(隱者) 혹은 경치를 감상하는 관상자로서의 인물이 아니다. 항상 마음속에 있는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실현하고자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때론 초월적 세계와 합일을 시도하는 인간이다. 그렇다고 세속과 완전히 단절을 꾀하지 못하는 엉거주춤 고민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과감하게 집단 속의 개인임을 포기하고 집단을 뒤에 두고 홀로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보다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실천에 옮긴다. 그 욕망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는 나무의 형태에서, 때론 내려올 까 혹은 올라갈 까 엉거주춤하고 있는 인간 옆에 농묵으로 그려진 위로 솟구치는 거대한 산의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시원과의 소통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은 현실세계를 완전히 초월하고자 하지 않는다. 현실적 삶의 세계를 잠시 떠나 자연과 접하면서 초월적 삶을 살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시금 노래를 읊으면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영이귀(詠而歸)'하고자 한 삶을 살고자 한다. 피곤했던 삶의 여정을 일단 마무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돌아온' 삶은 타인과 다른 경험을 한 형이상학적 삶이다. 노자(老子)는 "무미를 맛보라(味無味)"라 한다. 도(道)는 무미하다. 이미 작가는 시원과의 소통 즉 도의 무미함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무미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번 작품에는 밝히고 있지 않다. 빛을 통해, 심상적 공간을 통해 맛본 무미의 신비로운 공간이 어떤 미적 조형을 통해 드러날 것인지가 기대된다. ■ 도하(道下) 조민환

Vol.20100414d | 박서령展 / PARKSEORYONG / 朴曙伶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