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우상

박상희展 / PARKSANGHEE / 朴相禧 / sculpture   2010_0414 ▶ 2010_0427

박상희_AD.2010년_합성수지, 자동차도료 코팅_146×145×25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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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41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_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십자고상(十字苦傷)의 거룩한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양 손에 권투 글로브를 낀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표현한 박상희의 「AD2010년」은 그 형상에 있어서 신성모독으로 비쳐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고귀한 희생을 상징하는 가시면류관이 두피에 파고드는 가시를 엮어 이마에 씌운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여성의 몸들로 구성된 「Mr.예수」를 보고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대부분 경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상희_Mr.예수_합성수지, 자동차도료 코팅_56×53×48cm_2010

예수에 대한 그의 모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러시안룰렛이란 위험한 게임 앞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남자를 형상화한 「고린도전서 13장 14절」에서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파멸을 앞두고 있는 고독한 승부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 아래 만들어진 하나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콘이 특정대상을 연상시키는 전형(典型)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분명 도발적이다. 그렇다고 그의 이 도발적인 작품들이 반그리스도교를 표방한 것으로 볼 수 없다. ● 그는 유사한 맥락에서 현대 중국에서 또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마오쩌둥 시리즈를 제작한 바 있다. 아직까지 중국 현대미술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오쩌둥의 아이콘은 혁명가이자 현실세계의 정치지도자로서 마오쩌둥을 지시한다기보다 그가 추진했던 문화혁명과 그 유산에 대한 환유(換喩)라고 볼 수 있다. 박상희가 재현한 마오쩌둥의 아이콘이 탈정치적인 것처럼, 권투글로브를 낀 채 공중에 매달려 있거나 여성의 벗은 신체들로 엮은 면류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내기를 걸고 있는 예수의 형상 또한 탈종교적인 것으로 봐야한다.

박상희_시간의 초상-부처_나무에 채색_40×28×28cm_2008

고린도전서 제13장 14절은 '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 ' 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14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가능성의 여백이다. 러시안룰렛 게임을 통해 붉은색으로 칠해진 한 남자가 걸고 있는 내기는 그 여백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맥락에서 사랑의 결과는 구원일 것이다. 인류로 향한 사랑으로 죽음을 받아들인 예수는 따라서 구원의 상징이자 구원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격발 직전의 위기를 표현한 이 작품에서 구원을 말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자 사실을 부회(府會)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이것은 작가가 예수를 통해서 이 시대의 현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세계 여러 곳에서의 자살 폭탄과 테러, 전쟁 등의 시대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또한 기독교 도상학에서 십자가는 수난과 부활, 구원의 상징이었지만 박상희의 작품에서 이 도상들은 과거란 시간을 현재로 호출하는 요소로 차용했다. 즉 인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예수가 남긴 에피소드, 그 에피소드를 현실 속에서 느끼도록 만드는 강한 흡인력을 지닌 상징물들을 견인해냄으로써 그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하나의 오브제로서 재생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사실(史實)의 증거로서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작가 특유의 상상과 사유에 의해 가공된 것이므로 허구이다. 글로브를 낀 예수는 작가로 하여금 그리스도 손에 빨간 글러브를 낀 작품을 하게 한 시대적 배경과 욕망과 성애(性愛)를 암시하는 면류관을 쓴 예수, 도박사인 예수는 신앙의 차원에서 허구를 넘어서서 악마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적(敵)그리스도적 발상으로 비쳐지겠지만 작가가 이것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표방하는 종교란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시간은 모든 존재를 불연속 상태로부터 연속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삶은 유한하다. 이 유한함이 삶의 드라마와 파노라마를 만든다. 예수의 십자가도 그런 점에서 누적된 시간의 한 지점에 위치해 있는 사건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인류의 문화유산인 피라미드도 시간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결과물이며, 영원불멸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영약(靈藥)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들을 파견하고 자신의 현실을 무덤 속으로 가져가려 했던 진시황도 결국 죽음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방부제에 의해 부패되지 않은 채 보존되고 있는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박상희는 이런 인물을 통해 삶의 유한성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 오브제로서의 시간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의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시간은 우주의 빅뱅으로부터 발생하였지만 특정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예컨대 태양이 소멸했을 때 지구에 있는 인간이 그 사실을 자각하는 데는 8분 정도의 시간이 경과해야 한다. 과학적 사실과는 상관없이 이 간극에 주목하여 시간과 공간을 분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볼 수도 있다. 만약 시간과 공간을 분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치 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시간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 박상희가 추구하고 있는 오브제로서의 시간은 이런 점에서 시간을 장소로부터 떼어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즉 비가시적인 시간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시간을 하나의 오브제로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재하는 오브제를 통해 시간을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시간은 비가역적(非可逆的)인 것이 아니라 이탈과 비약을 통해 원래상태로부터 분리된다. 이 분리과정에서 예술가 특유의 몽상이 개입한다. 몽상의 결과는 특정한 대상을 지시, 암시, 은유하는 형상을 빌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초현실적 방법을 통해 현실을 가공하기도 한다.

박상희_몽상의 時_브론즈, 합성수지, 아크릴채색_140×67×30cm_2010

이를테면 「몽상의 시(時)」에서 볼 수 있는 조형적 수사(修辭)가 그렇다. 「Mr. 예수」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기에 앞서 성적 욕망을 느끼는 한 인간인 남성으로서 표현된 이 작품의 원전 또한 미술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 두드러진 데페이즈망 이란 방법을 주목하여 많은 사람들은 달리(Salvador Dali)를 떠올릴 것이다. 달리(Salvador Dali)의 「기억의 고집」은 그의 '편집적 비판'이란 방법에 의해 제작된 작품인데 마치 녹아내린 카망베르 치즈처럼 열에 녹아 늘어진 시계를 통해 시간의 건조함을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것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몽상의 시(時)」 역시 정장을 잘 차려입은 사람의 머리 위로 나뭇가지가 자라고 있고 그 위에 달리의 작품에 특징적인 젤라틴상태 직전의 시계가 매달려 있다. 시간에 대한 몽상은 「좌탈입망(座脫立亡)」에서 멈춰버린 시계로 이루어진 머리를 지닌 참선 중인 인물로까지 발전한다. 시계머리 역시 박상희가 이미 발표한 바 있기 때문에 낯선 것은 아니다. 이 멈춰버린 시계는 시간의 정지, 곧 연속성으로부터 분리된 시간을 상징한다. 「좌탈입망」은 자기존재까지 놓아버린 상태에서 시간조차 초월한 절대적인 깨달음을 상징하는 것일까.

박상희_좌탈입망 座脫立亡-시공 時空_혼합재료, 시계_125×86×58cm_2010

문제는 이 수행자의 머리가 온통 시계로 구성되었다는데 있다. 시계란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이도록 만들고 측정하도록 고안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시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가 작품을 통해 시간의 무한성에서 존재는 어차피 유한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시계로 만들어진 구체(毬體)는 시간을 정복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허망한 욕망을 떠올리게 만든다. ● 오브제로서의 시간을 상징하는 형태는 시계들을 집적한 것으로부터 「광화문의 아침」이나 「아내의 봄」, 「오도송」(梧道頌)에서 볼 수 있듯 거울처럼 투명한 구체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구체야말로 이 인물들의 현존을 비추는 거울이자 또한 그들의 의식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투영하는 마술의 공이자 시간의 추상적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상희_아내의 봄_합성수지, 자동차도료 코팅, 브론즈_100×50×45cm_2010

박상희의 입체작품이 단일한 형태를 통해 의미를 상징적으로 압축한 것이라면 디지털 편집과정을 거친 사진작업의 경우 서술성이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모스크바의 광장풍경을 촬영한 사진 위에 마치 우주비행물체처럼 상공을 날고 있거나 바닥에 착륙한 듯한 시계를 합성한 이 작품은 시간이 누적된 역사를 돌이키게 만든다. 반면에 고목이 있는 수면에 마치 시계가 부유하는 떠있는 합성사진은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시계야말로 그가 말하고 있는 시간을 담는 그릇일 수도 있다. ● 한때 시테크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인간들은 경제적인 목적달성과 효율성의 제고를 위해 시간을 초단위로 쪼개야 한다는 강박에 종속되기도 했다. 그만큼 시간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었으며 과학기술의 발달은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역시 사유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명상과 같은 초월적인 방법을 통해 시간에 대해 사유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포획하려는 시간은 물리적인 차원으로서의 시간의 정복이 아니라 주관적인 시각에서 시간을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위해 신체는 중요하다. 그가 다른 무엇보다 굳이 인간의 몸의 형태를 통해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최태만

박상희_사유의 강_합성수지, 아크릴채색_250×152×112cm_2010

보이는 시간과 보이지 않는 시간에 대하여 ● 시간은 그릇이다. 그 속에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시인 기형도가 있었고,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가 있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예수도 있었다. 배반과 사랑 욕망과 주검, 그리고 전쟁도 있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한 시간의 역사 속에서 나는 십자가의 붉은 풍경을 보았고 무소유의 소유도 보았다. 사랑과 증오, 용서, 또는 별리했던 그 반복의 시간이 존재의 숲이고 나는 그 안에서 사유하고 욕망한다. 그러한 시간이 내겐 오브제이다. 하나의 질료로서 예수와 부처 역시 그러하다. 시간은 역사의 모태이자 역사는 시간의 기록이 아닌가. 나는 그 곳에서 형태를 만들고 색을 입혀 보이는 시간과 보이지 않는 시간에 대한 나의 입체적 은유가 하나의 시가 되기를 원한다. ■ 박상희

Vol.20100414f | 박상희展 / PARKSANGHEE / 朴相禧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