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푸른 혁명

4월 혁명 50주년 사진아카이브展   2010_0412 ▶ 2010_042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주관_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_양철모

관람시간 / 06:00am~06:00pm

국립4.19민주묘지 서울 강북구 4.19길 196-1번지 Tel. +82.2.996.0419 419.mpva.go.kr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부속고 학생 8명이 모여 시위를 조직했으며, 이튿날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가 커졌다. 이 사건은 고교생들이 주체로 나선, 계획적 조직 시위의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상 6.10 만세 사건, 광주 학생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그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학원의 자유보장" 을 외치며 시위에 들어간 고교생들 1960년 2월28일

5월로 예정되어 있던 선거를 농번기를 이유로 들어 3월 15일로 앞당긴 것이 부정 선거의 시작이었는데, 이는 미국에 신병 치료차 자리를 비웠던 조병옥을 의식한 처사였다. 이승만 정부의 내무부가 마련한 부정선거 시나리오는 4할 사전 투표, 3▪5인조 공개 투표, '자유당'완장부대의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과정에서 표 바꿔치기 등이 있었다. 마산 등의 지역에서는 유권자의 20% 정도가 투표 번호표를 받지 못하기도 했다. 마산 민주당의 선거 포기가 자유당 정권에 대한 불만이 크던 마산 시민들을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정이 난무한 3.15 정부통령 선거

김주열의 시신 발견으로 인한 충격과 마산의 2차 의거의 불길은 마산 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되어 이승만의 부정에 대한 반감과 혁명에 대한 열기를 북돋우게 되었다.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도립마산병원 앞에서 침묵으로 시위하고 있는 어린이들
죽은 학생에 대한 책임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할머니들
진압당하는 시위 현장 학생들의 모습.
거리로 쏟아져 나온 분노한 혁명 군중. 4.19는 '피의 화요일'로 불렸다.
계엄령 선포와 통행금지의 폭압을 깨고 4월25일 오후 서울대 의대에 모인 대학 교수 258명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원남동에서 을지로를 거쳐 국회의사당 앞으로 진입한 그들은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를 계속 하였다. 교수들의 시위에 통행금지를 뚫고 3천여 명의 시민이 뒤를 따랐고, 시위대는 금세 수만 명으로 불었다.
4월26일 날이 밝자마자 시민들뿐만 아니라, 초등학생들 까지도 거리로 나와 '오빠, 언니에게 총을 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군중들에게 발포하던 계엄군도 시위대에 합류하자 한계를 느낀 이승만은 이날에서야 하야를 결심하고 발표한다.

4.19 푸른혁명 ● 「4월혁명 50주년 사진아카이브 展」 기록되고, 펼쳐진다. 그것이 역사다. 안타깝게도 '일어난 일'은 역사가 되지 못한다. '기록된 일' 만이 역사가 된다. 개인의 역사는 머릿속의 기억-기록만으로도 가능하지만, 공동체의 역사는 이야기, 문자, 이미지들, 그리고 그것들의 총체로만 기억되고 기록된다. 그렇게 기록된 역사는 되풀이 쓰여 지고, 해석되고, 펼쳐진다. 오늘과 내일의 역사는 다시 그렇게 축적된다. ● 4월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4.19 푸른혁명「4월혁명 50주년 사진아카이브 展」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성찰해 보기위한 한 갈래의 해석이다. 모든 해석은 부분이며 삶이라는 전체를 향해 작용한다. ● 불과 10년 전의 일조차도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의 속도와 거의 변형에 가까운 변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반세기전에 일어났던 혁명이 가지고 있는 작용점은 무엇이며, 그 작용점은 아직도 유효한가. 이 전시는 이 질문에 대한 되묻기이자 대답이다. ● 주체와 공동체. 4월혁명은 공동체의 파괴에 대한 주체들의 저항에서 비롯되었고, 주체의 주체되기-시민(민중)의 시민(민중)되기, 즉 주체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으로 일단락되었다. 그 자각은 그 이후와 그 이전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눈'이 되었다. 우리는 비로소 개명開明한 것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주체의 '초과'를 경험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말한다. "난 나야" 사는 것買이 사는 것生이 되어버린 전치된 삶의 구호다. 주체가 없는 공동체가 전체주의라면, 공동체가 없는 주체란 허구이다. 그런 것은 상품 광고 속에서만 존재하는 초과된 주체고 분열된 주체의 껍데기다. 50년 전의 혁명은 그런 우리에게 공동체의 의미를 묻고 있다. 주체의 자각이 꿈꾸던 것은 그것의 초과된 형태가 아니라 공동체의 지향이 아니겠느냐고. ● 4월혁명은 이후의 정치, 사회적 혼란 때문에 흔히 미완의 혁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씨앗은 씨앗의 형태로 이미 완성된 것이다. 완성된 씨앗은 언젠가 그 싹을 틔운다. 기록된 것을 펼치는 것은 그 '언젠가'를 기약하는 장場으로 다시 기록될 것이다. ■ 4.19 푸른혁명 전시기획위원회

Vol.20100416h | 4.19 푸른 혁명-4월 혁명 50주년 사진아카이브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