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지문

전성영展 / JEONSUNGYOUNG / 全聖榮 / photography   2010_0414 ▶ 2010_0427

전성영_황룡사 금당터(경주)_피그먼트 프린트_41×61cm_2007

초대일시_2010_041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01:00pm~06:00pm

대안공간 건희 ALTERNATIVE SPACE GEONHI 서울 종로구 종로 6가 43-3번지 Tel. +82.2.554.7332 www.geonhi.com

역사 풍경 혹은 폐허의 미학 ●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제는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도 다 아는 이야기라서 식상하기까지 하지만, 전성영의 사진 작업을 이처럼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말도 드물듯하다. 전성영은 한국 사진가로는 보기 드물게 역사라는 한 가지 주제를 고집스럽게 끌어안고 10년을 보냈다. 그는 북만주와 요동, 한반도의 남쪽, 그리고 일본을 오가며 한국 고대사와 외롭고도 긴 대화를 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 카(E.H.Carr)는 역사가의 주관성을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전성영은 그의 시선과 철학, 상상력으로 역사와 대면한다. 틀림없이 다큐멘터리이지만, 그의 작업은 객관의 기록이 아니라 작가의 지식과 미적 감수성으로 건져 올린 역사 풍경이다. ● 한 때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 편집자였던 지포드 햄프셔(Giford Hampshire)는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그리고 후대를 위하여, 그 주제의 중요성을 각인시킬 수 있을 만큼, 그것을 충분히 아는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성실한 접근이다." 햄프셔의 정의는 역사 다큐멘터리 사진가 전성영에게 안성맞춤처럼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사진가이지만 역사 전공자 못지않게 한국 고대사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지식뿐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과 애정, 그리고 역사 현장에 대한 풍부한 경험까지 포함한다. 전성영은 30대 때부터 역사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수많은 발굴 현장에는 늘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운명처럼 짊어진 그가 있었다. 그는 또 자신의 이름으로 역사 기행서를 펴낸 필자이기도 하다. 전성영은 "그 주제의 중요성을 각인시킬 수 있을 만큼, 그것을 충분히 아는 개인"이었다. 그런 그가 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심연 속으로 들어간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 전성영의 작업에서 특별히 눈여겨 볼 대목은 공간에 대한 관심이다. 특히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던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탐구와 백제의 흔적을 찾아 일본 남부지방을 탐색하는 작업이 그러하다. 이들 두 지역은 한국 고대사의 주요 무대였으나 지금은 우리의 땅이 아니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중국 동북지방은 겨레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금단의 땅이지만 우리에게는 정신의 뿌리이자 역사 영토인 것이다. 전성영은 이 선험적 공간을 종횡으로 탐구한다. 특히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이 수면 위로 드러난 2000년대 초반부터 그는 매년 빼놓지 않고, 어느 해에는 일 년에 몇 번씩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날아갔다. 때로는 주제로, 때로는 지역으로 요동과 북만주를 훑으며 영혼과도 같은 역사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서일까?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고구려의 천리장성, 만주 땅 곳곳에 화석처럼 단단히 박혀있는, 그러나 한없이 쓸쓸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풍경은 사진이 아니라 해란강을 달리던 어느 시인이 쓴 서사시처럼 읽힌다. 카메라로 쓴 슬픈 서사시.

전성영_생초고분군(산청)_피그먼트 프린트_77×90cm_2002

전성영의 역사 다큐멘터리의 가치는 일회성에 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한, 복제 가능성 이전의 예술에 존재하는 아우라로서의 일회성이 아니라 주제로서의 일회성,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유일성이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하며 남의 집 담장을 넘듯 아슬아슬하게 촬영한 고구려 천리장성 작업은 감시가 심한 탓에 이제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고, 고고학 발굴 현장은 발굴 후 다시 덮어버렸거나 다른 용도로 개발되어 현장 자체가 없어진 까닭이다. ● 미켈란젤로는 돌멩이에 이미 형상이 살아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정과 망치로 그리고 조각칼로 그 돌멩이의 일부를 떼어내고 다듬어, 이미 돌 안에 살아있던 형상을 보여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전성영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무너진 성곽과 주인이 없는 무덤과 폐사지의 돌덩이 안에 역사가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켜켜이 쌓인 시간이, 굴곡 많은 그 시대의 사연이 깊은 삶이, 스치듯 지나간 바람이, 어둡고 때로는 투명했던 하늘이 풍경 안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그는 다만 그가 본 풍경을 긍정하며 작가의 고유한 지식과 정서와 감수성과 애정을 동원하여, 사진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역사의 숨결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시인 오규원은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고 노래했다. 그의 시에 기대어 말하자면, 이미 사라진 역사는 시간이 흘러도 다시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그 자리에 서서 혹은 서늘한 땅에 누워서 누군가를 외롭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전성영은 역사에게 다가가 바람처럼 말을 건다. 이윽고 역사가 다시 살아난다. 아프게, 쓸쓸하게, 폐허의 미학으로! ■ 유명종

전성영_풍납토성(서울)_피그먼트 프린트_77×90cm_1999
전성영_칼바위제사유적(이천)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1998

내가 고대사와 관련된 역사다큐멘터리 사진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90년대 후반 모 항공사가 발행하는 잡지사로부터 중국 동북지역 8개 도시의 취재를 의뢰받은 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였던 집안(集安)을 방문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광개토대왕비 앞에 서게 되었고 7m 가까운 높이의 그 석비는 나에게 아주 강한 충격을 느끼게 해 주었다. 고구려인들이 직접 새겨 넣은 당시의 문자들, 하늘위로 치솟는 힘을 느끼게 해 주는 다듬지 않은 형태미를 가진 거대한 광개토대왕비는 한참동안 나를 얼어 붙은듯 그 자리에 서있게 만들었다. ● 서울로 돌아온 나는 본격적인 만주지역 촬영을 위해 고구려와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내가 살고 있는 한강일대가 고대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한강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 라는 말처럼 실제로 한강유역에서 고대사의 흐름이 바뀌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만주지역의 촬영은 뒤로 미루었고 한강유역의 고대유적과 역사경관들을 찾아다니면서 나의 역사탐험은 시작되었다. 중국의 만주일대와 고구려에서 받은 영감이 한강유역과 백제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라는 어머니의 나라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역사와 문화의 공통점이 많았으므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강유역의 백제를 탐구하면서 백제가 존재했던 기간 중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지역이 바로 한강유역이며 또한 그 시기의 백제, 즉 한성백제가 백제의 역사상 가장 강성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내가 한성백제를 주제로 사진기록작업을 하던 기간 중에 운이 좋게도 백제사 규명의 큰 단서가 될만한 고고학적 발굴조사들이 많이 실시되었고 나는 그 역사적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을 수 있었다. 미궁에 빠져있던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이라고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선생이 지목했던 하남시 고골지역의 교산동 건물지와 천왕사지 그리고 이성산성의 발굴조사를 참관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최초로 발굴되는 '당척'과 '고구려척' 그리고 고대도읍지의 유구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목탑의 심초석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또한 엄청난 양의 백제유물을 쏟아내어 세상을 놀라게 하며 새롭게 한성백제의 도읍지로 급부상하게 된 풍납토성의 발굴현장도 지켜볼 수 있었다. 풍납토성은 미궁에 빠져있던 한성백제의 실체를 우리에게 더 많이 알게 해 주었다. 풍납토성의 발굴조사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엄청난 양의 초기백제의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체 길이가 4km에 가까운 토성의 높이가 10여미터이고 성벽의 기저부가 40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라는 것이다. ● 풍납토성의 축조에 동원된 인원을 고대문헌에 근거하여 산출해 보면 연인원 100만명이상, 많게 잡았을 경우 150만명까지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성의 내부에서 출토된 목재들을 방사성탄소연대측정 한 결과 BC200년~ AD200년 사이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초기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이 서로 다른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록 사이에서 혼란에 빠져있던 우리에게 서슴없이 삼국사기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준 의미 있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백제인들이 이미 기원전후한 시기에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었고 연인원 100만명 이상 동원되어야 축조가 가능한 풍납토성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던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전성영_쌍릉 소왕릉(익산)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06

● 이렇게 한강유역에서 드라마틱한 역사 발굴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2002년에 나는 벼르고 벼르던 만주지역의 고구려 사진기록작업을 단행하게 된다. 몇 해 전부터 한 두 차례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환인'과 '집안'은 다녀왔었지만 2002년에 감행한 고구려 사진기록작업은 연개소문이 축조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천리장성'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고구려가 중원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천리장성이라고 하는 막강한 방어체제가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리장성은 고구려 영류왕의 지시로 연개소문이 총 책임자가 되어 축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수나라와의 전쟁때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그들의 침약을 막아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2002년 10월 말부터 약 20일간의 일정으로 중국 요령성 무순에서 대련까지 천리장성의 주요 거점성들을 조사하면서 사진으로 기록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중에서 고이성, 안시성, 건안성, 비사성의 동쪽지역과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의 피난성이었던 환도산성은 중국인들이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곳으로, 만약 그 지역에 들어갔다가 발각이 되면 큰 고초를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 큰 문제로 다가왔다. 몸으로 겪어야 할 고초는 감당한다 하더라도 만약 발각이 된다면 촬영한 모든 사진들과 카메라들을 압수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다. 촬영기간 중간에 서 너번쯤 큰 도시로 나가서 우편이나 DHL로 촬영한 필름들을 한국으로 보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선택한 방법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었다. 데이터화 된 사진들이 필름매거진 보다는 그들의 눈을 피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2002년부터 600만화소가 넘는 DSLR들이 출시가 되었고 나름대로 테스트해 본 결과 135슬라이드필름과 비교해 부족하지 않는 화질이 구현되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 고구려 천리장성 사진기록작업은 고달팠지만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갔다. 위험한 곳으로서 긴장했던 안시성, 건안성, 비사성 등을 감시망을 잘 피해서 성공적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촬영 14일째 되는 날 마지막 고비였던 환도산성에서 결국 공안원에게 체포되어 집안파출소와 공안국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이틀간 조사를 받은 후 가지고 있던 돈 모두를 벌금으로 빼앗겼고 두 세트의 카메라장비 중 한 세트를 압수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동안 촬영했던 사진들은 단 한 컷도 그들에게 내주지 않았다. 미리 준비했던 미노광된 슬라이드매거진 6개만 그들에게 건네 주었을 뿐이다. 그동안 촬영한 사진들을 지켜야 했기에 저항 없이 카메라와 돈을 넘겨주고서 탈출하듯 빠져나왔다. 그 사건이후 2년 뒤에 동북공정이 터지게 되었고 그때 내가 촬영했던 사진들을 글과 함께 모아서 '천리장성에 올라 고구려를 꿈꾼다'라는 제목으로 한길사에서 출판을 하게 되었다. ● 나의 고대사탐험은 만주지역의 부여, 고구려에서 한강유역의 백제 그리고 바다건너 일본열도로 연장되게 된다. 그것은 일본열도의 고대국가의 형성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마민족의 특징을 가진 집단에 의해서 라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5년에 처음 일본으로 건너가 열흘간의 일정으로 일본 고대문명의 중심지인 오사카, 나라, 교토일대를 돌아보았다. 일본의 고대문명을 돌아보고 온 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일본열도에서 출토된 수많은 고대유물들, 특히 기마민족의 유물인 마구(馬具)와 철갑옷, 투구, 환두대도 등이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뛰어난 일본열도의 고대문명의 기원이 한반도라고 생각해도 되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그 후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을 돌아보고 나서 깨끗이 정리가 되었다. 가야연맹국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본 후 일본열도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더 훌륭한 문명이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음을 유물들로 확인을 했기 때문이다. ● '에가미나미오'라는 세계적인 일본의 고고학자는 '기마민족 도래설'이라는 학설을 만들어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열도의 고대문명은 중국 북방의 기마민족이 내려와서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하다가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지배층을 형성하고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는 그들의 경유지였을 뿐이고 그들이 정착하고 문명의 꽃을 피운 것은 일본열도라는 주장이다. 이런 에가미나미오가 1990년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 발굴현장을 방문해서 고대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어떤 유물을 보고는 한편으로는 기쁨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기뻤던 이유는 그가 학자였기 때문이었고, 착잡한 이유는 일본인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를 기쁘게 그리고 착잡하게 만든 유물은 '파형동기'라는 유물인데 그것은 그때까지 고대 일본의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출토되었던 유물이었다. 바람개비 형상을 한 이 유물은 일종의 장식품으로서 방패에 부착하였던 장식물이었다. 그런 유물이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6점이 출토가 되었는데 일본의 파형동기와 비교해서 시기도 앞서고 크기도 훨씬 큰 것들이었다. 이런 파형동기가 금관가야지역이었던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출토됨으로써 파형동기가 일본 고유의 유물이라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또한 이 유물의 존재로 인해 고대 일본 지배층이 가야에서 건너간 계층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매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유적들을 찾아 조사하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일본의 신화 역시 고조선과 진한, 변한 그리고 백제인들이 일본열도로 진출하면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쉽게 풀어내기에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2005년부터 시작한 일본열도의 역사탐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그 작업은 진행중이다. ● 역사다큐멘터리 사진작업을 하면서 초기에 나는 나의 주관적인 감정을 많이 담는 것 보다는 가능한한 정확하게 촬영하여 많은 정보가 담긴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렇게 작업을 진행하면서 뜻하지 않는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어떤 유적이나 유구들은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다. 그런 감동들은 아마 '과거와의 교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천 수백년 전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던 현장에 나는 카메라를 들고 서있지만 그 유적과 나 사이에는 '시간의 벽'이라는 엄청난 가로막이가 놓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와의 교감'을 느끼게 되는 현장에서는 그 시간의 벽을 어느 정도는 극복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이런 감동들이 나를 역사탐험으로 계속 이끌고 있으며, 아마도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은 이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 전성영

역사 다큐멘터리 사진가 전성영이 지난 10년 동안의 작업을 모아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 전성영은 1990년대 말부터 사진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북만주와 요동, 한반도의 남쪽, 그리고 일본을 오가며 한국 고대사와의 끈질긴 대화를 시도했다. 인문학적 교양과 작가 특유의 미적 감수성이 녹아든 그의 작업은 그러므로,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카메라로 쓴 한국 고대사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고구려의 천리장성, 폐허의 미학으로 부활한 폐사지들, 일본 땅 곳곳에 화석처럼 단단히 박혀있는, 그러나 한없이 쓸쓸한 우리역사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

Vol.20100418d | 전성영展 / JEONSUNGYOUNG / 全聖榮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