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PART 1 : 치유, 죽음 그리고 선택

이은희展 / LEEEUNHEE / 李恩熙 / printing   2010_0602 ▶︎ 2010_0608

이은희_치유의 나무_리노컷_가변설치_2010

초대일시_2010_060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신관1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검은 여왕이 들려주는 끝이 없는 이야기 ● 꼬마들은 혼자서도 잘 논다. 남자아이들은 장난감 병정놀이를 하면서, 여자아이들은 인형놀이를 하면서 혼잣말을 하는가 하면, 무슨 복화술사처럼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도 하고, 곧잘 이야기를 꾸며내기조차 한다. 이은희는 자기 아이가 그렇게 노는 것을 보고, 똑같이 그렇게 놀았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린다. 작가는 어릴 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자기만의 공상을 공 굴리고 부풀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작가의 작업은 이런 사실의 인식에 연유한 것이다. 곧잘 이야기를 지어내 혼자 놀곤 했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이다. 이렇게 되불러낸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를 덧대는 것으로 살을 붙여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 그대로를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 것이다. 작가의 경우에는 판화이므로 엄밀하게는 판화 이미지로 옮겨놓는 것이다. ● 앞서 서술된 이야기는 이렇게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다. 엄밀하게는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각색한 것이다. 이렇게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기억이 작가의 작업을 밝혀줄 열쇠 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그 속성상 또렷하지가 않다. 더욱이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지어낸 이야기를 기억해낼 때는 더 그렇다. 이렇듯 기억이 또렷하지 않은 탓에 그 구조가 헐거울 수밖에 없고, 그렇게 헐거워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가동된다. 이런 연유로 작가의 이야기는 기억해낸 이야기와 상상력이 만든 허구의 합작품인 셈이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사실의 인식은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계기로 작동하면서, 이와 동시에 기억 일반의 속성을 밝혀주기도 한다(그 자체로 온전한 기억은 없다. 기억은 언제나 실제로 있었던 일 곧 사실을 근거로 하여, 그 사실을 보완하고 교정하는 과정 즉 소망과 착각이 덧붙여져 각색된 것이다). ● 여하튼, 이번 전시에서는 이 전체 이야기 중 치유의 숲으로의 여행이 메인 테마로 다루어진다. 도열해 있는 나무숲을 배경으로 그 숲을 통과하는 여행객들, 그리고 요람을 탄 채 하늘을 날고 있는 검은 여왕이 출연한다. 이 모든 정경의 한 가운데에는 최종 목적지로 연이어진 문이 있고, 그 문을 통과하면 만나게 될 9층짜리 빌라로 된 키 큰 나무가 배치된다.

이은희_치유의 숲_리노컷_가변설치_2010
이은희_여행자의 방_리노컷_가변설치_2010

작가는 이 이야기를 판화로 옮긴다. 주로 리놀륨 판화로 옮기는데, 언젠가부터 리놀륨 대신 모노륨 소재를 사용한다. 리놀륨이 고무인 것에 반해 모노륨이 비닐이라는 성분상의 차이가 있지만, 익숙해지면서 그 드러나 보이는 효과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리놀륨 판에서와 똑같이 실루엣으로 드러난 평면과 치밀하면서도 정교한 세선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작가만의 독특한 화면효과를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판각작업이 끝나면 그 이미지 그대로 종이에 대고 찍어내는데, 대개는 이로써 작업이 끝나기 마련이다. 여기까지는 다른 작가들과 작가의 판화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작가의 판화가 갖는 특정성은 그 이후의 과정에서 찾아진다. 즉 작가는 이렇게 찍혀져 나온 이미지를 오려낸다. 이렇게 원하는 부분 이미지 조각들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것들을 가지고 본격적인 공간세팅작업이 이뤄진다. 그림조각들을 벽면에 일정한 간격을 띄워 부착하기도 하고, 공중에 매달기도 하고, 드물게는 공간에다 세팅하기도 한다. ● 이 일련의 과정에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의미 있는 지점들이 발견된다. 즉 작가의 작업에서는 흔히 그렇듯 이미지를 가두고 결정화하는 프레임이 따로 없다. 전시를 위한 벽면 자체가 거대한 캔버스로 돌변하는가 하면, 나아가 열려진 공간 전체가 작업을 위한 장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평면에 한정되지 않고 공간 자체가 작업의 일부로서 부각되는, 작가가 구상해놓은 어떤 가상의 방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이 공간으로까지 연장됨으로 인해 가상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이 따로 구분되지가 않는, 이 모든 개연성들이 유기적으로 연속된, 일종의 벽면 드로잉 내지는 공간설치작업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더불어 이미지 조각과 다른 이미지 조각을 중첩시키기도 하는데, 이로써 일종의 입체판화의 가능성이 발견된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판화의 표현영역과 범주를 사각의 한정된 평면에서 나아가 입체판화와 (공간)설치판화로까지 확장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를 세팅할 때 벽면 위로 띄우는 탓에 벽면에 그림자가 생겨나게 되고, 그 그림자로 인한 입체감이 그 확장 가능성을 강화시켜준다. 그런가하면 찍혀져 나온 이미지들을 보면 유독 검정색이나 모노톤의 어두운 색조가 많은데, 모든 사실들을 집어삼키는 기억의 속성을 상징하며, 이야기가 발원된 기억과 무의식을 상징한다.

이은희_가이드_리노컷_53×45cm_2010
이은희_여행자_리노컷_30×13cm_2010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종의 연극적 상황이 펼쳐진다. 작가의 작업 자체가 내러티브가 강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 내러티브를 무슨 그림 이야기처럼 꾸며놓고 있는 것에 연유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에만 한정되지가 않는다. 삶에 연유한 온갖 사연을 떠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들로 표현된),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사람들(모굴 족에게 기억을 빼앗기는 것으로 암시된), 그래서 치유가 필요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록 전제된 포맷이 있고 정해진 골격이 있지만, 그 자체 결정적이지는 않다. 작가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다. 지어낸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로 덧붙여질 수가 있고, 부풀려질 수가 있고, 변형될 수가 있다. 아예 이야기의 살을 다르게 덧붙이는 것으로, 혹은 그림 조각을 다르게 조합해 그 연출을 변형하는 것으로 전체 이야기가 약간씩 달라질 수가 있다. 무슨 하이퍼텍스트처럼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아무 데서나 시작하고 임의적으로 끝낼 수 있는, 열려진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마저 동화적이고 신화적이다. 온갖 유형의 반인반수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처럼 동물과 인간이 서로 이야기하고, 나무와 새들이 서로 교감하는 것이다. ● 이로써 작가는 동화 속에서 그려 보이는 세계로의 도피를 통해, 상상력을 매개로 한 도약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남들을 치유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치유의 계기들을 추슬러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축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고충환

이은희_마지막 여행_리노컷_가변설치_2009

케리는 우연히 다락방에서 미치광이 고모부가 그린 그림을 발견한다. 여왕의 눈을 쳐다보지 말 것. 그림 밑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여왕의 눈? 호기심이 발동한 케리는 여왕의 눈을 쳐다보게 되고, 마침내 케리는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그림 속에는 검은 여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에서는 여왕을 제외한 모두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 나라의 지하세계에 사는 모굴 족이 기억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여왕은 기억을 추모하는 나무를 심어 기억이 사라지기 전날 기억을 걸어두게 하고, 요정들로 하여금 그 나무를 지키게 한다. 1년에 한번 검은 여왕은 죽음을 앞둔 사람,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치유의 숲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고, 자기만의 생각 속에 갇힌 사람은 그 생각의 굴레에서 놓여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숲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하면 9층의 빌라로 된 키 큰 나무가 나오고, 여행객 모두는 각자의 방을 찾아 들어가면서 여행은 끝난다. ■ 이은희

Vol.20100604h | 이은희展 / LEEEUNHEE / 李恩熙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