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PIA

조동광展 / JODONGKWANG / 趙東光 / installation   2010_0605 ▶︎ 2010_0702 / 일요일 휴관

조동광_TROPIA_혼합매체, 가변설치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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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605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휴_ART SPACE HUE 서울 마포구 서교동 405-3번지 3층 Tel. +82.2.333.0955 www.artspacehue.com

조동광 개인전 『트로피아 』: 세상은 수집터, 자기는 수집가, 그래서 노획한 사물들거대한 채석장처럼 변해가는 이 세계에서 수집가는 폐품회수라는 경건한 일에 참여하게 된다. (손탁) 1. ● 조동광은 사물에서 형태를 본다. 그리고 조립한다. 그의 눈에 띄면, 주사기가 기둥이 되고, 유리병이 조명이 된다. 차원이 확대되어, 아예 공간까지 바꾸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년에 그가 카페로 했던 작업을 보자. 천장은 분홍빛 천으로 덮고, 천장 선풍기 중심에 마네킹 다리를 붙여서 돌리는 등등, 카페를 무대 비슷하게 바꿔놨다. 특히 압권은 화장실이었다. 성모마리아 그림을 좌변기 위에 설치해, 문을 열자마자 기묘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백라이트 조명을 배치한 탓에 엄숙한 후광까지 흘러나와, 누구든 숙연한 자세로 용변을 볼 수밖에 없다. 소변 보러 갔다가 성모 마리아를 영접했을 용변자이자 그래서 난감했을 관객에게 축복이 있었기를. 성과 속의 개념적 통일이자, 화장실의 '공간적 변용'인 셈이다.

조동광_TROPIA_혼합매체, 가변설치_2010

2. ● 이렇듯 '변용'은 조동광의 작업을 푸는 열쇠다. 기능을 멎게 하고, 형태를 꾸미는 것. 이 때문에 기능과 형태의 체계적인 불일치가 발생한다. 첫 번째 『안가린다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빨간 호수에 조명을 넣어 두고, 천장에서 바닥까지 늘어트려 놓은 탓에, 마치 반짝이는 기형의 생명처럼 보인다. 언뜻 보기에 낯설어 보이는 까닭이다. 이 같은 변용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발견'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조동광은 일상의 사물을 '우연히' 발견한다. 저옛날 예술가가 질료에서 형상을 '직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발견과 직관은 근본부터 다르다. 직관은 인간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신화의 시대는 뮤즈의 힘을 빌렸고, 하나님의 시대는 기도의 힘을 빌렸다. 반면에 발견은 노동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본주의시대는 자본의 힘을 빌렸다. 길거리를 관람하는 산보객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도시는 볼거리로 가득했고, 부르주아는 소비의 힘을 만끽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사물을 직접 수집했고, 돈이 없으면 이미지에 만족했다. 딱 맞게 등장한 사진은 돈 없는 사람도 수집할 가능성을 제공했다. 비록 복제일 지라도 말이다. "사진은 애초부터 중간계급에 속한 산보객의 눈을 확장시켜 주는 도구였다."(손탁) 사진가와 수집가의 태도는 그래서 동일하다. 이 때문에 박물관과 사진집도 같은 논리다. 소유라는 것. 요컨대 직관의 주체가 신자라면, 발견의 주체는 수집가다. 성실한 수집가로서 조동광이 이번에 노획한 것은 '트로피'다. 제목도 트로피에 공간을 뜻하는 어미 'pia'를 덧붙인 '트로피아'다. 무엇을 노린 것일까. 3. ● '트로피아'는 뜻만 보면 트로피로 우의화된 세계처럼 보인다. 설치는 세 가지다. 첫 번째 것은 박제된 비둘기에 트로피를 날개처럼 달았고, 두 번째 것은 회전하는 오르골에 각종 운동선수 모델이 조악하게 돌아가며, 세 번째 것은 가운데를 음각 얼굴로 깎은 금박기둥이다. 이 세 가지 모두 조동광이 틈틈이 거리를 수색한 결과로 제작된 것이다. 핵심적 질료인 트로피는 구매한 것이지만, 앞서 지적대로 구매나 수집이나 논리는 동일하다. 설치의 면면을 보면, 트로피의 의미와 형태를 각기 변주한 모양새다. 첫 번째 작업은 의미상 '트로피-스포츠-비둘기'로 전이되는 양상을 보이며, 두 번째 작업은 '트로피-스포츠-원형무대'로 이동한다. 세 번째 작업은 조금 모호하다. 신전의 기둥처럼 보이며, 주두(柱頭) 같은 것을 가운데로 옮겨 구조를 꼬았다. 여기서는 '트로피-어원-전승비'으로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조동광_TROPIA_혼합매체, 가변설치_2010

4. ● 여기서 변용의 방법은 '인용과 병치'다. 인용은 기능정지에, 병치는 형태변이에 해당된다. 알다시피 인용과 병치는 초현실주의의 전매특허다. "무엇보다도,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뜻밖의 만남과 같이 아름다운 것!"(로트레아몽) 조동광의 작업이 조금이라도 낯설었다면, 그가 사용한 방법에 기인했으리라. 그러나 저옛날 초현실주의처럼 현실을 날카롭게 칼질하지 않는다. 물론, 첫 번째 작업은 날것의 면모가 강하다. 박제 비둘기는 존재 자체로 을씨년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로피 날개는 너무나 해맑게 반짝인다. 마치 백치가 웃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다른 금빛 작업과 맥락을 형성하기 때문에, 병치의 '충격'은 (있을 지도 미심쩍지만) 더욱 상쇄된다. 병치의 칼날은 무뎌진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시대의 맥락이 달라졌다. 백년전 관객을 마비시켰던 감각의 수류탄은 오늘날 기껏해야 폭음탄밖에 안 된다. 게다가 수류탄이 폭발력이 강했던 이유도 그들이 기술적 표현을 '선취'했기 때문이다. "다다이즘은 대중이 오늘날 영화에서 찾고 있는 효과를 회화나 문학의 수단으로 산출하고자 했다."(벤야민) 재봉틀과 우산의 교합은 컷들의 몽타주로 훨씬 훌륭하게 변환되는 것이다. 백년이 지난 지금은 또 어떤가.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가 디지털을 타고 마치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듯 쏟아져 내린다. 눈과 귀는 가만히 있어도 홍수 같은 정보 때문에 언제나 신경과민 포화상태고, 정보들은 두뇌를 스크린으로 삼아 자동으로 병치된다. 상대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조동광_금자탑_혼합매체, 가변설치_2010

5. ● 그래서 조동광의 칼은 장난감일 수밖에 없다. 무뎌진 칼도 날 없는 칼도 아닌 장난감 칼. 무엇인가 벨 생각이 애초부터 없으며, 벤다고 해도 '무용'에 가깝다. 전시장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두 번째 작업을 생각해 보라. 소리만 난다면 완벽하게 우스꽝스러운 오르골이다. 사실 '트로피'는 매우 억센 질료다. 금빛에 조악한 형태도 그렇고, 그것을 둘러싼 의미도 그렇다. 만약 이것을 교과서처럼 활용했다면, 예를 들어 승자독식 사회를 가감없이 비판하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물론, 전혀 그런 생각이 없다고, 작업에 그런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작업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트로피의 의미보다 형태를 따라 전개된다. 세 번째 것에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어원으로 회귀하므로 '의미'가 별로 없게 된다. 거칠게 말해, 형태만 포획한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래서 안 그래도 파편인 '우의화된 세계'는 금박에 더 멀리 날아가 버린다. 이것은 그의 작업태도에 기인하는 바 크다.

조동광_TROPIA_혼합매체, 가변설치_2010

6. ● 지금까지 조동광은 야생동물이 은폐 엄폐 하듯 자신을 숨기고 숨겼다. 물론 작업과 전시를 안 한 것도 아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때로는 기회를 만들어, 꾸준히 작업을 했다. 하지만 그는 선뜻 '제도'로 들어오기를 꺼렸다. 늘 멈칫거렸다. 그는 자신이 사물을 '발견'하듯, 남이 그의 작업을 '발견'하길 바랐던 것일까. 카페, 당구장, 거리, 미용실 등등, 지금까지 그가 주로 선택한 공간을 보라. 거기서 길게 한 것도 있지만, 하루만에 끝낸 것도 있으며, 대체로 (아무도 모르게) 설치하고 회수한다. 물론, 잊지 않고 자신만의 의식을 '경건하게' 치러내는 것은 필수다. 현장을 사진으로 남겨, 자신의 흔적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이미지로 수집하고 소유한다고 할까. 게릴라처럼 치고 빠졌고, 제도의 시선을 얄밉게 피해갔다. 7. ● 하기야 수집가의 목적은 사물을 쓰는 것이 아니긴 하다. 모아 놨다 펼쳐 놨다 반복하며 혼자서 놀며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동광이 '전시'를 많이 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더욱 잘 알 것이다. 제도 바깥에 있다는 알리바이는 그러고 싶다는 지극히 소박한 소망일 뿐이며, 알고서 속는 일이라는 것을. ■ 김상우

Vol.20100613i | 조동광展 / JODONGKWANG / 趙東光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