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물치지 格物致知 Ideal Beauty and Images

일민시각문화5   2010_0618 ▶︎ 2010_082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_2010_0617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강제욱_고정남_구성수_금혜원_김규식_박정훈_박형근_박호상_오석근_이재훈_장용근

본 사업은 서울시 문화사업지원금으로 추진됩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일민미술관 ILMIN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1,2전시실 Tel. +82.2.2020.2055 www.ilmin.org

『격물치지 格物致知』의 한 연구 ● 이번 시각총서는 우리 선조들이 추구했던 문화가 빚어낸 형상에 관한 것이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유, 무형의 경관과 문화재, 풍속과 기물을 대상으로 잡아낸 그럼직한 형상 모음집에 '격물치지'(사물을 연구해 이치에 이른다는 뜻으로 통용됨)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터득된 사물의 이치는 결국 문화적 형상으로 표현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 사물의 이치를 온전히 터득했다면, 그만큼 표현은 실제 사물의 권능에 상응할 것이고, 그럴수록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반대의 명제도 성립한다. 사물의 이치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이치를 갈구하는 치성(致誠)이 표현된다. 이치는 터득한 것 같은데 현실이 결핍됐다면 번뇌가 표현된다. 긴 고민에서 오는 지리멸렬함과 환멸은 환상이 아니고는 사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기나긴 세월을 겪은 저간의 사정을 통째로 담고 있는 것이 전통문화요, 문화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는 이런 식의 솔직함이 없다. ● 미술은 시대가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를 형상화하는데, 미술은 인문학의 중심표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미셀 푸코 등 서구 철학자들이 그들 철학의 구체적 논변을 이미지 분석을 매개로 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 일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 현대문화에 이런 솔직함 혹은 정신적 사정(事情)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격물치지'가 우리 것이 아니거나 우리 것으로 화(化)하지 못해서, 우리 현대문화가 전제하는 사물의 이치에 대한 인식이 여러 갈래로 혼선을 빚고 있지만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인지 조차를 인지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사태가 이런 지경인지도 모른 채 속절없이 불면의 낮 밤을 지새우며 고통과 번민을 현대성으로 받아들인다.

박형근_대전시 남간정사
금혜원_서울시 경복궁
고정남_서울시 창경궁

『격물치지』는 문화적 형상이 내는 빛에서 우리 정신의 정수를 볼 수 있는가를 묻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위 그간 한국미의 특성이라고 지적되어 온 내용과 그것이 동일한 것인지 도 보고 싶었다. 제출한 이미지들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여느 때처럼 기획의도를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 편집진의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시선을 관철했지만,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수렴된 이미지 계열은 흔히 미술사에서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으로 거론하는 '단아(端雅)', '고졸(古拙)', '질박(質朴)'한 특성의 것들이었다. ● 하지만 이런 특성들 중 예스럽다는 '고(古)'와 수수하다는 의미에서의 '질박(質朴)'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그리스 고전문화에서처럼 '아카익(archaic)'이라고 하는 고졸기(古拙期)양식이 우리에게 별도로 존재했던 것도 아닌데, 오래돼서 예스러워 보이는 것의 본래 특성을 '예스러운'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언가 이상하다. 수수하다는 것도 맞지 않는다. 인류가 만든 모든 주류 전통문화의 위상은 당대 최고의 기술과 안목으로 빚은 생활의 장식이자 권위에 속한 것이기에 '화려'한 것이어야 했다는 것, 우리 전통문화도 우리 방식으로 곧 잡목 속 빛과 어둠의 그림자가 얽힌 내밀경(內密憬)의 환영 같은, 생활감각의 내밀한 기록, 화사한 생의 개념을 포착하고 있기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겉으로 발하는 우리 전통문화의 성격은 단아하고 소박한 것으로 다가온다. 지금 보면, 최종적 표상에서 최선이라고 여긴 것은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차원이되 '아졸(雅拙)'이나 '아치고절(雅致高節)'이었던 것 같다.

장용근_대구시 대구향교
구성수_서울시 종묘
김규식_서울시 운현궁

여기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짐작컨데 주요한 이유는, 핵심은 현실적 이유에 있을 것이다. 선조들이 깨달은 이치의 궁극(격물치지)은 민족 공동체의 활로에 관한 것이었을 터이다. 공동체를 위해 대자적, 대물적 관계뿐 아니라 국제정치적 관계 등 인간과 사회의 모든 관계를 적절히 정립하고 척도를 세우는 것이 깨달은 진리의 기능이요, 곧 문화의 과제인 것이다. ● 격물치지 곧 문화는 선조들이 생활에서 터득한 이치 곧 사회적 윤리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박하지 않되 겸손하게 처신해야 했고, 그런데도 '문화'를 느끼고 누릴 수 있으려면 단아하고 절도 있으되 '격물치지'를 사물의 허허실실로만 말해야 했던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것이 곧 '대교약졸(大巧若拙)'과 '아치고절(雅致高節)'을 즐긴 이유이자 인본주의가 '안빈낙도'로 나타나게 된 것 아닐까?

강제욱_전라남도 순천시 낙안읍성
이재훈_충청남도 예산군 수덕사
박호상_강원도 원주시 거돈사지

이번 시각총서는 어쩌면 전통문화의 정체성 보다는 미래 우리 문화의 비전을 위한 작업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다양성을 추구하고, 해체와 유목을 말하는 사회에도 만물을 가늠하고 재는, 정당화를 위한 인륜의 기준은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인문학적 중심기표를 획책(?)해봐야 한다는 편집진의 기도(企圖)가 반영된 과거 우리 모습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 문제는 중심기표가 있어야 사물의 의미는 확인 가능하며, 그로부터 또 발전도 한다. 우리 시대에 기호와 언어는, 광고언어든 학문언어든 일상의 말이든 정치가의 말이든 간에 의미가 전체적으로 어긋나 있다. 이런 현상을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다.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노아의 방주에서 바라본 세계상황과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사실무근한 비유도 스스로 떠올리며 의미화의 시작점과 끝점을 이루는 물신을 전통 속에서 찾는 방법은 어떨까 시도해 보았다. ■ 일민미술관 기획의원

Vol.20100614c | 일민시각문화5-격물치지 格物致知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