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Generation

전채강展 / JEONCHAEGANG / 全彩江 / painting   2010_0617 ▶︎ 2010_0707 / 월요일 휴관

전채강_Sleeping on the Grass 1_캔버스에 유채_73×100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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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617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_16번지 GALLERY HYUNDAI 16 BUNGEE 서울 종로구 사간동 16번지 Tel. +82.2.722.3503 www.16bungee.com

새로운 세대의 이미지 아레나(arena)-전채강의 회화와 오늘의 이슈 기생하는 창조 ● 19세기 유럽의 골목을 떠돌아다니며 온갖 잡동사니를 줍던 넝마주이(rag picker)는, 21세기 이제 디지털 세계의 웹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를 건너다니며 넘쳐나는 파편 정보와 이미지를 긁어모아, 이리 자르고 저리 접붙이며 합성물로 가공해내는 이들로 거듭났다. 또 바야흐로 서구가 본격 모더니티사회로 진입하던 그즈음, 파리나 런던의 휘황한 조명 아래 아케이드를 탐색하며 느리게 걷던 산책자(flâneur)는, 월드 와이드 웹(www)을 통해 무한한 가상공간들 내부를 빛의 속도와 궤적으로 하이퍼링크 하는 디지털 유목민으로 점프했다. 한국의 경우, 그 가장 원조 격에 속하고 유명한 예는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에 상주하면서, 그곳의 수백 개 갤러리에 온갖 종류의 합성이미지를 만들어 올리는 '디시폐인들'이다. 이 사이트가 공식 오픈한 때가 1999년이니 벌써 십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한 인터넷 사이트의 성장이 아니라, 대략 그 시기부터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이미지를 이해하고, 만들고, 사용하는 세대가 출현했고, 그 과정에서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보는 우리 지각의 지형이 크게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마치 마른 땅에 물이 스며들듯이, 나뭇가지 위에 눈이 쌓이듯이, 매우 자연스럽고 무겁지 않게 특유의 감수성, 표현 및 수용의 방법론,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비선형적으로 결합하면서, 우리의 현실과 세계 이해, 관점 같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전채강_The Room_캔버스에 유채_160×180cm_2010

우리가 이 글에서 논할 전채강이 바로 이 같은 세대에 속한다. 그녀는 "동시대 예술 작업은 '기생'하는 '창조'여야 한다"(작가노트)는 생각으로, 자기 그림의 모티브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고, 그렇게 우연찮게 발견한 다종다양하고 원천이 상이한 이미지들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작가는 온라인 공간들을 부유하는 레디메이드(ready made) 이미지들을 수집한 후, 디시인사이드의 '폐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변형-합성하는 재구성 작업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데, 그것이 곧 전채강의 미술인 것이다. 원본성, 독창성, 권위, 전위(avant-garde) 등등, 현재까지도 우리가 여전히 예술의 금과옥조로 여기는 가치들이 동시대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여기는 작가의 사고. 당당하게 지금 여기 예술의 원리 혹은 창조의 한 축을 '기생'이라 꼽는 태도. 그리고 이제 곧 우리가 보겠지만, 어디서 주워온 이미지들만을 가지고 현실에도 없고 가상현실에도 없는 '오늘의 사건들(Today's Issues)'을 그려냄으로써, 오히려 우리 삶의 진짜 심각한 이슈들을 들춰내는 전채강 그림의 메커니즘. 이런 점들이 기성세대가 인정하지 않았고, 갖지 못했으며, 누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구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 세대의 인식, 감수성, 현실 대응력과 그 기술(technique)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채강_Festival_캔버스에 유채_180×180cm_2010

생물학적 나이로 따진 세대가 아니라, 사고와 감각의 면에서 이전의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며 목적지향적인 세대와는 다른 면모를 가진 이들을 어떤 이름으로 총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온라인상의 정보와 이미지를 가져다 제2, 제3, 제4로 끝없이 이어지는 재가공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이들 세대에게, 세상이란 '주어진 사실들의 세계' 혹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만 하는 세계'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 이들에게 소통은 일방통행이나 쌍방향을 넘어 다자적으로 열려있으며,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이미지는 놀이이자 현실 삶과의 접속 통로 중 능동적이며 생산적인 매체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서 '놀이'는 산업화를 부르짖던 시대의 어른들이 '반(反)노동', '게으름', '즐거움만을 좇는 유아적 행위'라는 뜻을 섞어 다소간 폄하하고 부정적으로 평했던 의미의 그것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누군가, 어디선가 만든 기성이미지를 기꺼이 서로 공유하고, 각자의 컴퓨터 파일에 컬렉션하며, 시시때때로 자신의 특정한 의도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그 이미지들을 조합하고 윤색하며 노는 새로운 세대의 놀이는, 자신의 외부에서 너무나 강력하게 돌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논평, 주관적 개입, 적극적이고 활달한 해석행위이다. 요컨대 가라타니 고진(Karatani Kojin)의 말을 빌리면,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현실의 해석을 바꾼다"는 의식과 실행이 거기에는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전채강이 말한 '기생하는 창조'란, 이미 닫히고 통제된 채로 주어진 현실에 '기생'하면서, 그 현실에 은폐돼 있거나 드러나 있더라도 우리가 가능하면 회피하고 싶어 하는 사회의 복잡하고 문제적인 면모를 예술작품으로 가시화하고 객관화하는 '창조'라고 비평할 수 있다.

전채강_Still Life_캔버스에 유채_73×53cm_2010

현실과 그 이미지의 원형 격투장 ● 전채강의 그림들은 정교한 주목을 요한다. 그녀가 미술대학 4학년 졸업반이었던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시리즈로 작업한 「Today's Issues」는 풍경화다. 풍경은 풍경이되, 대극장이 폭발하고, 항공기가 피격된 채 불시착했으며, 땅이 꺼지고, 건물이 화염에 싸여 붕괴하는 '재난의 풍경'이다. 또 무너진 잔해 밑에 시체들이 깔려있고, 진흙더미를 뚫고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과 뒷짐 지고 서 있는 소방구급대원들과 비키니 차림의 여행객이 기이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뒤엉킨 '환란의 풍경'이다. 그리고 특히, 자동차가 도심 한 구석 벼랑에 대롱대롱 매달려 언제라도 10차선 도로 위로 추락할 것 같은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위기를 예시하는 풍경'이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전채강의 「Today's Issues」 연작은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며, 종합적 구성에 따라 화면이 세심하게 조율된 그림들로 비춰진다. 때문에 감상자가 그 그림 속의 균열과 위험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이 작가의 그림들을 정교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림에 내적으로 잠복한 재난과 위기의 이야기를 인식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작품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읽어내기 위해서도 '정교한 보기'는 우리에게 요구된다.

전채강_On the Road_캔버스에 유채_160×190cm_2010

앞서 썼듯이 전채강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그림의 소재가 될 만한 이미지를 찾고, 그 이미지들 조각조각을 완전히 재편성해 새롭게 하나의 단일 이미지로 그려낸다. 이런 식의 방법론은, 비유하자면 원래대로 맞춰야 할 원본이 없는 퍼즐 게임처럼 회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전채강의 그리기는 게임의 행위자가 특정 키워드를 통해 게임 판의 무의식적 상태를 의식화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작가는 닥치는 대로, 혹은 그저 시각적 효과에 이끌려 인터넷 이미지를 채집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검색어를 가지고 일군의 이미지를 선별하기 때문이다. 그때 검색어는 '작가의 의도'나 '그림의 주제'의 다른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채강의 작품이 파편적 이미지의 재구성을 통해, 현실의 이면을 엑스레이사진처럼 가시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작업이 정처 없이 온라인을 떠도는 무수한 단편 정보들, 한시적인 담론들, 중요하지만 소홀히 취급 받는 여론을 재배열하고, 그림이라는 객관적 형태로 정착시키기는 일이라 평가할 근거를 갖는다. 이미지와 정보가 그때까지 놓여있던 시사적 공간, 사회의 기능적 공간, 공적 저널리즘의 공간으로부터 오려져, 작가의 그림이라는 또 다른 인공적 공간에 배열되면서 비평적 힘을 확보한다. 이것을 나는, 전채강이 자신을 포함해 "뉴 제너레이션(new generation)"이라 부른 세대의 이미지 수집과 합성 행위가 갖는 공공적 함의라 생각한다. 왜 그런가? 그 답은 작가의 그림들에 있다. 즉 일견 지극히 사적이고, 유별나게 꼽을 만한 예술적 차원도 스스로 포기한 듯 보이는 전채강의 회화 작업에 내포된 공공성을, 다른 어디도 아닌 그녀 그림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정교한 그림 보기를 강조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전채강의 작품 중 '한강'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보자.

전채강_On the Uphill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10

비단 서울에서 사는 이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한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강 르네상스 사업'이라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다. 서울시 당국이 한강을 파리의 센 강이나 뉴욕 맨해튼의 허드슨 강변처럼 세계 관광 문화 명소로 꾸미겠다는 의지로 2009년부터 펼치고 있는 사업 말이다. 그런데 같은 해, 전채강은 "한강의 장소적 특성 혹은 한강의 변모에 관심을 두고 관련 정보들을 재조합하여 구성한" 한강 연작 3점을 완성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이 작품들의 제목을 서울시의 한강 르네상스 사업 홍보 문구에서 따와, 「그곳에는 옛 한강과 미래의 모습이 어우러진 공간이 있습니다」라 붙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작 그녀의 그림에서 옛 것과 미래가 어우러진 한강의 모습은, 공사 현장과 자전거 행락이 버무려지고, 공원과 수해(水害)가 공존하며, 고대의 맘모스와 첨단 공법의 건축물들이 묘한 생태계를 이룬 환영적 세계로 출현한다는 점이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 그리고 작가의 진짜 의도와 입장에 대해서 여러 추측과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본인은 자신의 한강 삼부작을 통해 "한강의 변모와 관련된 예민했던 사회, 정치적 문제를 조심스럽게 상기시키고자" 했다고 말한다. 작가의 이런 진술을 참조하고, 그림에 가시화된 이미지를 정교하게 보건대, 전채강의 한강 연작이, 각종 정치적 논공행상(論功行賞)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얽혀들어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의 한강 일대를, 그 복잡한 내면을 초상화처럼 그려내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좀 전에 전채강 그림의 '공공성'을 운운했다. 그리고 이제 그에 더해, 전채강의 그림들은 '우리의 생활현실과 그에 대한 성찰적 이미지가 의미와 감각의 싸움을 벌이는 원형 격투장(arena)'이라 이름붙이고 싶다.

전채강_A Child_캔버스에 유채_각 25×25cm_2010

구경과 자극 ● 2010년 들어 전채강은 앞서 우리가 논했던 그림들과 방법론적으로는 동일하지만, 모티브가 변경된 작업을 하고 있다. 즉 여전히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재구성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과거 '사건, 사고의 풍경화'나 '사회, 정치적 문제를 상기시키는 한강 연작'과는 다른 소재를 다루는 것이다. 그 소재란 전작들의 비판성이나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파편들과는 달리, 일견 일상적이고 평온하며 우리가 흔하게 삶 속에서 마주치는 모습들이다. 가령 울고 보채는 아이의 얼굴, 공원 풀밭 위에서 한가하게 일광욕을 하거나 낮잠 자는 사람들, 청소가 안 된 방, 꽃과 예쁘장한 장식품들이 널린 공간 등이 그 소재들인데, 이것들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의미와 미적인 속성을 갖고 있겠는가? 전채강의 그림 속에서도 일견 이 소재들은 권태로울 정도로 평화로워 보이거나, 스냅사진처럼 평범하게 느껴지며, 심지어 일부러 조악하거나 난삽하게 여겨지도록 그려진 것 같다.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지 겨우 2년 된, 아직 '작가'라는 호칭조차 때 이른 감이 없잖아 드는 전채강이 벌써, '사람들이 편하게 볼 만한 그림' 혹은 '소박한 일상과 타협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그녀의 근작을 정교하게 보고, 정교하게 사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들에서 아이들은 한결같이 울거나, 화내거나, 인상을 찌푸린 모습들이다. 놀랍게도 풀 죽은 모습의 어떤 아기는 권총을 입에 물고 있기까지 했다. 일광욕하는 외국인 선남선녀 뒤로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성냥갑 아파트가 숨 막히게 들어서 있으며, 세상모르고 잠든 외국인 남자 주변에는 어지럽게 패스트푸드 쓰레기가 나뒹군다. 흘깃 보면 눈에 쾌적한 이 그림들 속에서, 일종의 비수처럼 그 '불편한 요소들'이 잠복해 있다가 그림을 보는 우리의 눈을 찌르고, 의식을 자극한다. 사실 이 불편함과 쾌적함의 공존은 전채강의 이전 그림들에도 있었던 것인데, 최근작에서는 그 모티브의 중립성 또는 모호함 덕분에 무신경한 감상자에게는 그림이 좀 더 '심미적으로 향유하기 좋은 것'처럼 느껴질 가능성이 커졌을 뿐이다. 말하자면 「Today's Issues」 연작에서 맑고 화창한 도시 풍경과 자동차가 부서지고 화염이 피어나는 재난이 충분히 그럴듯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처럼, 최근작에서는 순진함과 폭력이, 전형적인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가, 휴식과 폐쇄적 공포가 충분히 일상적으로 동반 표상돼 있는 것이다. ● 이상과 같은 기이한 결합과 조화야말로, 전채강의 그림을 전시장에서 감상할 우리, 구체적으로 들자면, 이 작가가 말한 "새로운 세대"보다 조금 더 앞서 살면서 이들에게 그 같은 세계를 물려준 세대가 불편한 심정으로 정교하게 들여다 볼 전채강 미술의 핵심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의 그림이 차용해온 이미지의 가장 근본적인 출처가 바로 거기, 앞선 세대가 부조리하고 기묘하게 구축해놓은 현실 ―작가가 강조하는 인터넷 공간이 아니라― 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전채강의 인터넷 이미지 콜라주는 발상지로의 반송이 결코 가능하지 않은, 되돌릴 수 없는 일회적 행위이다. 그런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원본 없는 이미지,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조각보, 정답 이미지 없는 퍼즐 맞추기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으로서, 정작 우리 삶을 바꾸는 데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서두에 썼듯이, 디지털 이미지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새로운 세대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표현 및 수용의 방법론, 의사소통 구조를 미세하게 변경해 가는 이들이 불지불식간에 사람들의 현실과 세계 에 대한 이해, 시각과 의식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명백히 진실이다. ■ 강수미

Vol.20100620g | 전채강展 / JEONCHAEGANG / 全彩江 / painting